252. Chapter 59. 결전의 고성 (12)

디스트로이아가 손을 뻗어 최호준의 등을 끌어안는다. 놈을 데리고 떠오르며 새카만 눈을 번뜩인다.
《하지만 내 본체의 권능에는 당해내지 못해.》
“큭, 공성현 씨······!”
후우웅―
다급히 휘두른 대검이 공기를 갈랐다. 공성현이 마검을 독사로 변형시켜 날려 보냈지만, 그조차도 디스트로이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촤악······!
그녀가 소환한 혈 방패에 닿자마자 ‘흡력’이 발동해 마력을 모조리 상쇄해버렸다.
《후후··· 아직도 이딴 잔재주가 통할 거라고 믿다니. 날 너무 얕보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운걸요.》
콰앙······!
목을 휘감은 핏줄기가 공성현과 나를 벽에 처박았다. 사지가 구속당해 온몸을 비틀어보아도 역부족이었다.
《이제야 날뛰는 것들이 조금 조용해졌네요. 그렇죠, 최호준?》
디스트로이아가 품 안의 사내를 만족스럽게 쓰다듬는다. 마치 요람을 흔드는 대악마, 릴리스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렇군.”
최호준은 그녀의 권능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해져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감각을 확인하듯 손을 쥐었다 펴 본다.
“‘개화’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낙인으로 다시 힘이 돌아오고 있다. 아무래도 내 증오는···.”
김재우와 남설이. 두 연인이 잠든 포드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간다.
“배신자들과 다르게 온전히 내 것인가 보군.”
‘월식’으로 정화한들 녀석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인간성 인자와 상관없이 이미 악을 제 본질로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는 옛 동료를 설득해 죗값을 받아내겠다고 맹세했다. 정의를 관철하는 자안과 달리, 이 심장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 쓰기로 결심했으니까.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젠장··· 정신 차려, 최호준 이 멍청한 새끼야!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악행은 여기서 멈추라고······!”
“멍청한 짓이라고? 불멸의 권세를 거머쥐고도 너는 똑같이 말할 수 있나?”
놈은 우리가 몽매하다는 양 오만한 눈길을 보내올 뿐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그 이마에 다시금 온전한 죽음의 낙인이 새겨졌다.
화아아···
“나는 네가 몇 번을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게 내가 이룩한 만악의―.”
그때였다.
《흐음··· 하지만 말이죠, 이미 1라운드는 끝났거든요. 그러니 이젠 킹이 아니라, 여왕이 나설 차례예요.》
“······뭐라고?”
최호준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천리안에 얇은 장막이 덮인 것처럼 예지가 흐릿해졌다. 어떠한 궤적도 읽히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 자안에 맹점이······.
혼란스러운 시야로 디스트로이아가 천천히 손을 올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당신 쓸모는 다했다고요, 나의 계약자여.》
콰직······!
악신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어 심장을 뜯어냈다. 맥박치는 검은 생명을 거머쥔 그녀가 환희에 젖어 탄사를 내질렀다.
《드디어, 이 무한한 악으로 봉인을 풀고 나는 만악의 시대를 재현하는 거야······!》
“커헉······!”
최호준의 입에서 마혈이 왈칵 역류했다. 턱을 타고 흐른 피가 갑옷까지 끈적하게 적셨다.
“어··· 째서······.”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놈은 축 늘어졌다. 그런 뒤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서 송장으로 변해갔다.
종래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뭐야, 이게······.”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이런 미래 따위 본 적이······.
《후훗, 마혈로 이렇게까지 잘 숙성된 심장이라니··· 어디 한번······.》
악신이 심장을 콰직 물어뜯으며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꿀꺽.
입가에 과즙을 잔뜩 묻힌 채 고개가 넘어가도록 웃어 젖힌다. 끅끅거리며 희열을 진정시키다가도 못 참고 실소를 흘린다.
《말했잖아요? 그 눈으로도 내 수는 못 읽는다고.》
그녀가 손에 남은 과육을 핥으며 나를 조롱했다. 그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려 올라간 그때였다.
“······탱커 아재.”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최요환이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우리를 쫓아 이제 막 도착한 아군을 등지고서.
《500년 전에 내가 들이마신 권능.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저 아이에게 봉인해놨거든요. 덜떨어진 왕과 내 사이에서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쓸모없는 인간의 자식. 사랑스러운 나의 열쇠.》
“······뭐?”
최요환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반응에 악신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만악의 심장. 그 왕좌를 타고날 아이를 잉태하고 싶었거든요. 내 자식이라면 분명 악마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해서 ‘혼돈’을 불어넣었는데 웬걸······.》
그녀의 눈빛에 일순 멸시의 감정이 스쳤다.
《그냥 평범한 인간의 아이가 되어버렸잖아. 그래서 힘을 봉인해서 동굴에 버려놨죠. 신계에 들키지 않는 평민 사이에··· 오늘 이 순간에 내게 무사―히 도달하도록 안배하고서.》
설마, 그 말은.
《혼돈, 즉 광기. 전부 그 마을 주민을 조종한 내 뜻이었어요. 저 아이가 이곳에 도착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목이 메어왔다.
《내게 ‘운명’을 뛰어넘는 힘을 전해주기 위해서니까.》
최요환이 끔찍하게 아끼던 가족이다. 그분들이 녀석을 사랑으로 키워주셨기에, 그렇기에 녀석은 그 마음에 보답하려 했다.
부모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정상을 목표한 녀석이었는데.
“조종? 무슨 헛소리야, 대체 무슨······.”
녀석이 입을 틀어막았다. 확장된 동공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조차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럼 날 키워주신 두 분은··· 악신에게 이용당해서······.”
녀석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꽉 그러모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냐, 최요환······! 저깟 개소리, 하찮은 이간질이고 술수일 뿐이니까 곧이듣지 말라고······!”
필사적인 내 외침 또한 공허한 소음일 뿐이라는 듯, 악신은 그런 우리를 비웃었다.
《푸훗··· 하여간, 그깟 사랑이니 가족이니. 싸구려 신파에나 흔들리는 인간들은 고리타분하다니까. 진실을 말해줘도 들을 귀가 없어서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죠.》
그리고는 지저분한 입가를 팔로 훔쳐냈다.
《자, 그럼··· 이제 남은 조무래기들을 청소해보실까요.》
그녀가 손을 휙 내젓자 한순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뺨을 스치는 메마르고 더운 공기. 지하를 재현한 드넓은 황야였다.
《후후후, 이곳에서 영웅에게 복수하고··· 지상에 현신해서 진정한 만악이 되는 거야······!》
쿠궁······!
흐린 천공에서 우레가 내리꽂혔다. 태양이 뜨지 않는 그곳에 붉게 타오르는 항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스타로스의 눈.
마물을 생산해내는 게이트를 고스란히 되살린 죽음의 별이었다.
키에에에에엑······!
드래곤의 포효가 희미하게 천지를 진동했다. 저편에서 지면을 강타한 검은 기둥. 까마득한 관문에서 악마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큭, 이거 풀어······!”
적벽에 묶인 채로 어깨를 비틀며 안간힘을 썼다. ‘흡력’으로 전신에 힘이 빠진 나머지, 지금은 대검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젠장, 공성현 씨······!”
녀석은 아까부터 상태가 안 좋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젖은 머리칼에 가린 눈이 열려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스스스슷···
그 몸에서 치명적일 정도로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젠장······.”
욕지거리를 삼키며 아군 진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도 혼란의 도가니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전방에 굳어버린 최요환을 문예린이 억지로 이끌었다.
“정신 차리세요, 최요환 씨······!”
“마스터, 서둘러 결계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악마 군단이 그들을 덮친 그때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어느 때보다도 명료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명과 함성에 묻히지 않고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인도자.”
보이지 않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자연스레 의혹이 내면을 잠식했다. 밑바닥을 구르는 듯한 깊숙하고 음험한 불신이.
‘너는 내 의도를 믿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나.’
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무수한 광원이 터져 나왔다.
‘수호신이라는 놈들은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나서겠지만··· 좋다. 이번만은 대가를 받고 너를 도와주지.’
마지막은 귓가에 직접 들려왔다.
‘옛 동료의 말로를 목도하고도 신과 거래하겠다면, 선택은 네가 해라.’
그러고서 놈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목전에 나타난 형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를 보호하듯 둘러싼 수호신의 뒷모습이었다.
정화와 부활의 큐어, 생명과 나무의 케르눈노스, 어둠과 그림자의 에레보스, 영혼 계에 머무르던 여타 수호신과 그 권속인 신수까지.
그리고······.
『······오는 게 조금 늦었군.』
스걱―
솔라리스와 정신을 공유하는 루나리스. ‘청월’을 휘둘러 우리를 해방한 그가 푸른 자락을 나부끼며 돌아섰다.
『더 이상의 횡포는 용납할 수 없다, 디스트로이아.』
그가 수호신들의 선두에서 엄중히 선포했다. 위엄스러운 그 용모에 걸맞은, 청량한 울림을 담은 신어로.
“윽······.”
“젠장, 싸울 수 있겠냐···?”
그러는 동안 나는 다 죽어가는 공성현부터 챙겼다. 녀석의 팔을 어깨에 둘러 부축하던 그때였다.
“······됐어. 부상은 당신의 동료들을 구한 뒤에 치료해도 늦지 않아.”
녀석이 나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놓치지 않고 사수한 혈검을 쥐고서 전방을 똑바로 노려본다.
《후후··· 가소롭군요. 내게 대항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나는 이미······.》
상공에 높이 떠오른 디스트로이아가 양 손아귀에 피의 구체를 응집한다.
《지상과 영혼 세계, 그 모든 영역을 지배할 권능을 거머쥐었는데······!》
화아아···!
마물들의 이마에 죽음의 표식이 타올랐다. 수천에 달하는 권속을 거느린 만악, 그 전신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항복하지 않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우리도 소멸을 불사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신들이 일제히 전방으로 무기를 겨누었다.
『전원, 진군하라······!』
그 외침을 들은 신수들이 괴성을 토하며 검은 대군을 향해 돌진했다.
“키에에에에엑······!”
불사조가 검은 파도를 가르며 불길을 뿜어댔다. 그 아래서 귀신 군주들이 적을 물어뜯고, 마혈을 흩뿌리며 육도 중에서도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다는 수라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만은 네 영혼을 빌리지.』
『합체할 시간이야, 계약자.』
정신이 들면 어느새 루나리스와 큐어가 양옆에 자리했다.
“······.”
나를 돌아보던 공성현은 이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사라졌다. 인화의 장벽이 지키는 성역. 결계를 펼치고 항전하는 아군이 있는 곳으로.
나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바라던 바입니다. 힘을 빌려주시죠. 저는 오늘 이 순간,”
‘백령화’를 발동해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물질계를 벗어나면 신의 인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들이 두른 에테르는 모두 나의 영혼과 동조하는 기운이었다.
“악신의 손에 종말을 맞이할 이 세계를 구원하겠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속성을 아우르는 혼돈의 홀리 나이트.
『기꺼이 들어주지, 그 소원.』
그 말을 끝으로, 자정과 부활이 내달리는 선풍처럼 영체를 휘감았다.
- 작가의말
마법 통신에서 알려드리는 두근두근 오늘의 하이라이트!
“악신의 손에 종말을 맞이할 이 세계를 구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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