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Chapter 59. 결전의 고성 (13)

화아아···!
전신이 눈부신 광원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충만한 힘이 손끝의 말초신경까지 타고 흘렀다. 전혀 다른 두 존재가 영혼을 침범했지만··· 어째서일까.
굳건한 의식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월광’을 세워보았다. 정화와 달의 검기. 그 신력이 검날을 감싸고 어디까지고 뻗어 나간다.
《후후후··· 아하하하···! 부질없는 저항이군요. 더, 더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라고요, 더······!》
그 끝에 디스트로이아가 있었다. 전장의 높은 곳에 떠오른 그녀가 양손에 마혈을 모아들인다.
검을 겨눌 곳은 정해졌다.
『이그니스.』
이름을 부르자마자 불사조가 날아들었다. 타오르는 날개를 펼치고 전장을 가로질러서―.
“키에에에에엑·········!”
위협을 가하듯 내게 포효했다. 녀석은 내게 협조할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랑은 초면이나 다름없다 이거지. 좋아, 이번 기회에―.』
불길조차 개의치 않고 검을 들고 질주했다. 손에 걸리는 마물을 모조리 베어 넘기면서, 그러면서도 다리는 멈추지 않은 채.
『제대로 길들여 줄 테니까······!』
힘이 들어간 기합을 자신만만하게 내질렀다. 녀석과 엇갈리기 직전, 자안을 빛내며 권속을 제압했다.
“키에에에에엑······!”
불을 내뿜던 이그니스가 부리로 나를 낚아채서 그 등에 올려주었다. 그 고삐를 잡자마자 녀석이 단숨에 고공비행했다.
성공이다.
『그래, 명색이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라이딩 정도는 해줘야지······!』
큐어의 혼이 탄사를 내질렀다. 그사이 나는 성검을 휙 휘둘러보며 자세를 다잡았다.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무서울 것 따윈 없다.
『가죠, 우리는······.』
뺨을 스치는 칼바람 속에서 씩 웃었다.
『오늘 이 순간, 무적이 될 겁니다.』
“키에에에에엑······!”
의지에 호응하듯 이그니스가 전장으로 향했다. 아군과 섞여 넘실거리는 검은 대군. 그 장관을 굽어보며 성검을 꽉 붙들었다.
적군은 인간이 아니었다. 전부 디스트로이아가 소환한 몬스터일뿐. ‘악의 시대’에 돌아온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저거, 단숨에 처리하죠. 다들 준비됐습니까?』
『좋다. 허락하지.』
『묻지 않아도 난 언제든 오케이야.』
승인을 듣자마자 깊은 심호흡을 마쳤다. 들이마시고, 내뱉은 뒤에는······.
『악을』
『처단하라.』
대검을 힘껏 휘둘러 지면을 갈랐다.
콰아아아앙······!
순백의 궤적이 닿은 곳마다 균열이 일고, 그 사이로 빛의 기둥이 솟구치면서 악마를 불태웠다. 신과 영웅의 이름으로 행하는 결전의 안식제였다.
“키이이이익······!”
그 빛에 당한 놈들은 저항조차 못 해보고 연소하여 흩어졌다.
『젠장, 엄청나잖아···! 역시 내 계약자, 홀리 나이트는 그릇부터가 다르다니까······!』
『신의 권능은 영혼을 거들 뿐이지. 네 존재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면 제힘조차 내지 못하고 부서졌을 거다.』
머릿속에 울리는 루나리스의 목소리가 감회에 젖어 들었다.
『부활한 너는··· 어느새 이렇게나 강해졌군.』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만큼 영겁의 세월을 거쳤으니까요.』
방어 자세로 다가드는 적에 대비했다. 검날이 삽시간에 냉기로 얼어붙었다. 달의 보호막이 드래곤 브레스를 상쇄하고,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스걱······!
떼 지어 날아드는 악룡 무리를 단 일격에 베어버렸다. 날개가 찢어진 놈들이 차례로 추락했다.
그 궤적을 따라가면 일행들이 있었다.
부상을 딛고 적들 사이를 누비는 공성현. 케르눈노스의 힘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문예린과 어둠에 동화한 최요환.
“절대로, 놓치지 않아······!”
화살 비로 용을 추격하는 임수아까지.
아군의 결사전을 눈에 새기고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역할을 다할 작정이었다. 지상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진 이 신들의 영역에서.
그리고 이제―.
《후훗··· 수호신 따위, 셋을 모아서 한꺼번에 골로 보내주지······!》
진정한 적을 마주할 시간이다.
디스트로이아가 X자로 모은 양팔을 해방해 핏줄기를 사방으로 날려 보낸다.
《아무도 내 함정을 피해 갈 순 없어······!》
촤촤촤촤촤촤악――!
그녀의 몸 주위로 피의 거미줄이 뻗어 나왔다. 그 혈실을 베어내는 사이, 악신이 팔을 벌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죽음의 영역에 기생하는 모든 마물이여. 이 땅의 주인인 나, 디스트로이아가 부활의 피를 선사하나니······!》
그 손에 죽은 마물의 피가 스며들었다. 눈이 검게 충혈하고, 폭발적인 마기가 전신에 깃들었다.
《일어나라! 살아나서 나를 위해 영원히 싸워라······!》
그 명령으로 재가 되어 스러졌던 마물들이 재생했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던 그들의 피와 살이 백골에 엉겨 붙었다.
허스타로스의 권능, 즉 사령의 주술이었다.
『이그니스······!』
“키에에에에엑······!”
악룡 무리를 피해 이그니스가 몸을 기울여 선회했다. 풍압을 피해 자세를 낮추고 스치는 용마다 닥치는 대로 베어냈다.
스걱······!
그러고 나면 남은 적은 악신뿐이었다. 거치적대는 거미줄을 잘라내며 그녀에게 돌진하던 그때였다.
《후후후······!》
검격을 피해 헤엄치던 그녀가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났다. 방향을 틀어 돌아본 순간, 그녀가 팔을 힘껏 아래로 처박았다.
슈슈슈슈슈슉·········!
대공을 장악한 소용돌이에서 메테오가 빗발쳤다. 죽음이 구사하는 혈 주술의 정점. 피의 탄막이 가차 없이 지상을 폭격해댔다.
『루나리스, 부탁드립니다. 어서 방어를······!』
『알겠다.』
손에 쥔 대검에 ‘청월’이 선명하게 겹쳤다. 화염을 두른 그 검을 단숨에 위로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강······!
초승달의 검기가 운석을 파괴하고 어디까지고 나아갔다. 구름 속으로 사라진 빛이 폭발하더니, 이내 거대한 성검의 닻을 내렸다.
쿠구구구궁······!
둔중한 소음을 내며 자리한 검이 돔 결계를 펼쳤다. 폭우는 그 위에만 내리칠 뿐, 보호막을 꿰뚫지 못했다.
그때였다.
《훗, 아군을 구하는 데 정신 팔려서는··· 방어가 뚫렸잖아······!》
피의 손아귀가 불시에 들이닥쳐 목을 콱, 잡아챘다. 예지가 틀어 막혀 그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핏줄기는 이내 불사조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키에에에에엑······!”
‘흡력’으로 불이 꺼질 위기에 처한 이그니스가 거세게 몸부림쳤다. 머리를 뒤틀며 괴로워하던 신수가 휘청이며 적벽 사이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아, 떨어진다······!』
『빌어먹을, 연막이었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날개 사이로 등부터 떨어져 내렸다. ‘독수리의 날개’를 발동하려 했지만,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디스트로이아가 아니었다.
《당신 위치는 거기야, 영웅······!》
『큭······!』
핏줄기가 목덜미의 성흔을 콱, 물어 정신력을 빨아들였다. 그로 인해 한순간 의식이 아찔해지며 전신에 힘이 빠졌다.
후우우우우웅·········!
『망할, 이대로라면 땅에 충돌하겠어······!』
『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콰각, 콰가가각······!
초승달의 결계에 서서히 금이 갔다. 마침내는 메테오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로 탄막이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흡력’의 영향이······!』
그제야 핏줄기는 목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큿······.』
어지러운 시야로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지상이 점차 가까워졌다. 갑옷에 감싸인 등을 태우는 고열. 격통의 공습이 나보다도 먼저 도착해 지상을 휩쓸고 있었다.
“최요환 씨······!”
“힐러······!”
“예린 씨······!”
수많은 비명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불안정하게 번뜩이는 결계 아래. 윤하얀을 필두로 집결한 이들을 악마가 가차 없이 할퀴고, 베고, 불태웠다.
『이대로라면, 전부······.』
그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망토를 두른 공성현. 녀석의 동작은 느리고도 선명하게 보였다. 어깨를 붙들고 숨을 몰아쉬다가, 혈검을 천천히 위로 겨누었다.
[‘저속화 Lv. ??’를 사용합니다.]
그곳에 커다란 마법진을 개방했다.
화아아아······!
모든 생명과 사물이 정지한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피의 탄막이 비명을 내지르는 아군의 머리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신유헌.
녀석의 입 모양을 읽어냈다. 그게 신호였다. 시간 정지 게이트를 열지 않았다는 말은······.
그때였다.
‘강물에 녹아든 허스타로스, 즉 내 피를 흡수해간 게 디스트로이아였지.’
『······뭐?』
갑작스러운 환청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인도자는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디스트로이아는 포탈이나 차원, 마물을 되살리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거다. 내 권능을 훔쳤으니까.’
『그게, 무슨······.』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모든 의문이 풀리며 퍼즐이 맞아 들어갔다.
만악의 심장은 지하계의 군주였다. 혼돈의 권속이지만, 신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악의 정점. 적어도 세간에는 그리 알려졌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혼돈은 모두 하나의 존재였다.
『그럼, 나는 줄곧······』
허스타로스였던 신에게―.
[SYSTEM: 불필요한 데이터를 검열 삭제합니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의 손이 시야를 가려버린 것만 같았다. 다시 주위가 밝아졌을 때는 동료의 모습만이 보였다.
마력 소모를 견디지 못한 공성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휘청거렸다.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군. 이제 선택해라. 그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아군의 파멸을 지켜볼지,’
그 목소리에 웃음기라곤 없었다.
‘아니면 내 힘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구원할지를.’
『나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말문을 뗐다. 찰나지만 막혔던 제3의 눈이 개안했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링크는······.]
이곳에서 내가 무너지면, 디스트로이아는 지상으로 나가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꺄하하하···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슬로우’를 뚫고 귓가에 울렸다. 그 의도를 알아채고 비로소 이가 갈렸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 따위 없다.
『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빌어먹을 신의 자리라도 빼앗아 보이겠어······!』
자안을 빛내며 확신으로 소리쳤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줄곧 원했던 답을 들었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그 즉시 대검이 십자 광원으로 번뜩였다.
‘혼돈이란 법칙을 깨는 힘이지.’
느린 세계에서 나만이 빠르게 움직였다.
‘거짓된 왕좌는 진정한 군주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네가 보여줘라. 신유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역수로 돌린 대검을 지면으로 내리꽂았다.
콰각······!
[‘절대 성역 선언 Lv. ??’을 사용합니다.]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을 걷어내며 블랙홀이 열렸다. 그곳에서 순백의 십자 검이 쏟아져 내렸다. 피의 탄막을 ‘무력화’하고 마물의 머리를 꿰뚫는 칼날이.
그 육중한 무게, 죄악을 짊어지고서 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올려댔다.
“이건······.”
“······신유헌?”
느린 시간에서 깨어난 일행들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오로지 악마만을 정화했다. 지옥 불을 식히는 단비를 맞으며 다른 이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인간을 살리고, 악을 멸하는 혼돈의 신성.
『나, 혼돈과 광기의 신이 명하노니.』
대검을 들어 일점을 겨누었다. 드래곤마저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절멸의 허공. 그곳에 피의 장막을 펼치고 활공하는 악신에게.
『우리의 성역에서 너를 영원히 추방한다, 죽음과 파멸의 디스트로이아.』
곳곳에 블랙홀이 여닫혔다. 십자 검이 사방으로 쇄도하며 죽음의 신을 몰아갔다.
슈슈슈슈슈슉······!
아래로, 더 아래로. 마침내는 인간 영웅의 검이 닿는 곳까지.
《말도 안 돼··· 내가 이딴··· 이딴 하찮은 술수에 당할 줄 알고······!》
디스트로이아는 분주히 포탈을 드나들며 도주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혈 탄환을 우리에게 날려댔다. 그조차 닿기 전에 녹아버리자 결국에는 나를 노려왔다.
《죽어··· 악을 거부하는 너 따위는 죽어버려······!》
화아아···!
전방에 열린 포탈에서 그녀가 불쑥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핏빛 손톱으로 다시 한번 내 목을 낚아채려 했다.
그 손날을 코앞에 두고 웃었다.
『다 보이거든.』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내달려서 음속으로 대검을 쳐올렸다.
스걱······!
반대편에서 달려온 누군가와 엇갈리며 대검을 착, 집어넣었다. 돌아보면 잿빛으로 물든 세상에 나부끼는 검은 망토만이 선명했다.
‘시간’과 ‘운명’을 감시하는 그 녀석은 언제나 제때 찾아왔다.
《나는, 이 세상을, 파멸로······.》
콰각······!
유언을 마치기도 전에 악신의 굽어진 등에 십자 검이 꽂혔다. 몸통을 뚫고 나온 첨단에서 마혈이 뚝뚝 흘렀다.
《아··· 아아······.》
그녀는 입만 벙긋거리다 끝내는 털썩 허물어졌다.
스스슷···
피 웅덩이에 처박힌 그 육신이 에테르화하여 휘날렸다. 존재가 소멸하고 마침내는 개념화한 ‘죽음.’
“······.”
그 말로를 공성현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검을 늘어뜨린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공성현 씨?』
눈동자에 빛이 꺼지며 녀석이 쓰러져 내렸다.
- 작가의말
마법 통신에서 알려드리는 두근두근 오늘의 하이라이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빌어먹을 신의 자리라도 빼앗아 보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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