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Chapter 60. 따스한 홍염의 기록

놀라서 달려가 공성현을 일으켰다. 어깨에 기댄 녀석이 입에서 피를 흘렸다. 상처가 깊은 팔은 물론 전신에서 짙은 마기가 풍겼다.
『공성현 씨, 당신······.』
『‘오염’이 중증에 이르렀어. 오래 놔두면 큰일 나겠는데······.』
영체를 빠져나온 큐어가 손길을 뻗었다.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화아아···
그녀가 공성현의 어깨에 대고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곧 빛이 잦아들고,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마혈석의 저주 때문에 정화가 안 들어. 거부 반응이 너무 심해.』
그 말대로 공성현은 신력이 닿자마자 괴로운 듯이 낮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전부터 신성에 닿길 꺼리던 녀석이니······.
『······젠장.』
초조한 심정으로 목이 타들어 갔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수호신에게서 벗어나 아군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주변 정경이 마력 공급실로 바뀌었다.
“공성현 씨······!”
때마침 일행들이 달려왔다. 그들이 주위를 둘러싼 가운데, 문예린이 곧바로 치유를 시전했다.
신성이 아닌 신록의 기운이라면 응급 치료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격통 정도는 덜 수 있겠지. 곧 눈을 뜨겠군.』
힘을 보태던 케르눈노스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가 다른 수호신들과 빛무리에 녹아들며 사라지자, 드디어 공성현이 깨어났다.
“······.”
녀석이 왼손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주변을 훑어보더니 별안간 비틀거리며 나를 밀어냈다.
“자, 잠깐만요··· 아직 움직이시면······.”
“······멀쩡해. 출혈로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이야.”
문예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떨어뜨린 혈검부터 주워들었다. 검을 등에 갈무리하자 이번에는 아군이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공성현 학생의 상태가 좋지 않군요. 그리고······.”
그 선두에서 송명학이 깨진 포드를 올려다보았다.
“저 마법사들도. 아마 마력장 유지를 위해 정신력을 혹사당한 것 같군요.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들이 보입니다. 그래도 마기 농도가 높은 이곳에 계속 체류하면 위험하겠지요.”
“······나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생존자부터 구해. 불사대가 저기 갇혀 있으니까.”
공성현이 숨을 가다듬으며 검으로만 상층부를 가리켰다. 남설이와 김재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알겠어요. 여긴 저희한테 맡겨요.”
날개를 펼친 임수아를 비롯해, 활공 능력이 있는 이들이 높이 도약했다.
후우웅··· 탁.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임수아가 날개를 접었다. 옆구리에 낀 두 연인을 내려주고 송명학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수색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생존자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포드를 둘러본다. 면목이 없었다. 변명할 수 없는 책임감에 짓눌려 어깨가 무거웠다.
그걸 피해서는 안 되겠지만···.
내게는 아직 구해야 할 사람이 남았다.
“······구출이 끝나면 여러분은 먼저 성을 빠져나가십시오. 저는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천장을 올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일행 모두가 내게 이목을 집중했다. 지친 기색으로 묵연한 눈빛을 보내오는 공성현 또한.
“······.”
녀석은 이내 후드를 쓰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근심이 드는 만큼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긴 위험하니까요. 저는 혼자 가도 괜찮습니다.”
어느덧 구조 작업도 막바지였다. 발전기가 빛을 잃었으니 텔레포트에 간섭도 없을 터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아군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늘은 집에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습니다.”
지상에 돌아가면 새로운 날이 기다린다. 그렇기에 그들을 먼저 보내주어야 했다. 종말에 저항한 끝에, 마침내 얻어낸 진정한 평화의 시대로.
“······알겠어요. 그래도 저녁 식사에는 늦지 마요.”
임수아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차분한 음성이었다. 발길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분명 맛있을 테니까요.”
드물게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너머에서 윤하얀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나는―.”
“최요환 씨.”
최요환의 팔을 붙잡으며 문예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를 이기지 못한 녀석이 결국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갔다 와서 얘기해요.”
그리고는 뒤돌아서 북적이는 인파로 들어가 버렸다. 할 말이 많겠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과 작별했다.
화아아···
등 뒤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면 성안은 고요했다. 나는 서둘러 계단으로 향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선 층계를 오르다 보면 뚫린 창문에 다다랐다.
휘오오오오···
눈꽃이 바람에 실려와 뺨을 간질였다. 바깥에 보이는 거라곤 얼어붙은 골짜기와 새하얀 벌판뿐이었다. 눈보라가 잦아든 가운데 폭설만 조용히 쌓였다.
“······.”
추운 곳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던 앤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 가둬두다니.
창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감상에 젖었다. 아니, 회상인가.
홍시현이 이런 식으로 걱정을 끼친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허스타로스와의 계약 당시만 해도 그랬다.
「홍시현··· 홍시현은요.」
성소에서 깨어나자마자 사제의 로브 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같은 장소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멍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
옆 침대에 홍시현이 잠들어 있었다. 뺨에 그을음이 묻었지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여서 떨리는 손을 놓았다.
「두 분 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사제는 그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면 나는 뜨거워진 눈가를 팔로 감싸고 웅크렸다. 안도하면서도 덜컥 두려워졌다.
모든 게 처음이어서, 그래서 목숨 걸고 일희일비하는 나날이었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마음은 안 들었다. 오히려 더욱 강해지겠다고 다짐했다.
검이 무서워져도 다시 싸웠고, 쓰러지면 몇 번이고 일어났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던 어느 날 홍시현이 대뜸 말을 꺼내왔다.
「······별장?」
「어. 비밀 아지트 같은 거 있잖아.」
수도 신전 앞마당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럴 때마다 새카맣고 긴 머리칼이 나부꼈다.
그녀는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고 성벽 저 너머까지 내다보았다. 녹음이 푸르른 숲 지대 어딘가에 집을 짓자는 얘기였다.
「터는 내가 봐놨어. 몬스터고 뭐고 보안 마법을 걸면 아무도 함부로 못 들어올걸.」
「음,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뭐래.」
눈을 피하는 나를 홍시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우린 친구여도 끝까지 함께 갈 거잖아. 그러면 내가 가출했을 때 받아주고 밤새도록 보드게임 해줄 집 정돈 있어야지.」
「······아, 그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 홍시현은 정말 제멋대로 굴었다. 붉은 벽돌이 좋다며 그런 지붕을 올린 아담한 저택을 세웠다.
「싸우다가 진짜 죽겠다 싶을 땐··· 이게 도움이 될 거야. 돌아올 집이.」
그 문을 쓸어보던 홍시현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말대로였다. 아니,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게 무엇보다 구원이 되었던 것은······.
「돌아가면 술 마시고 파티하자.」
「······방금 뭐라고?」
최호준을 뒤로하고 마지막 관문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잔당을 베어내고 대검을 털어내자 홍시현이 곁으로 내려왔다.
「그러려고 별장 세웠잖아. 다 같이 모여서 축하 파티나 하자고.」
뜨겁게 분출하는 용암을 배경으로 그리 말했다. 홍염을 다루기 때문일까.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길도 그녀는 겁내지 않았다.
죽음마저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말이지. 어쩌면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기적을 믿었다거나.
「······그러지 뭐. 이제 고백에 대한 답을 정정해줄 때도 됐어.」
「웃겨. 평생 기다려봐라. 어디 내 맘 바뀌나.」
장난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침울한 얼굴로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해. 곤란하게.」
쓸쓸한 심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그 당시 우리는 그랬다.
종전의 날에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함께할 수 있기를. 그런 미래를 바랐기에 동료를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랬는데.”
선택을 바로잡는 게 너무 오래 걸렸어, 시현아.
고개 들고 끝이 보이는 계단을 눈에 담았다. 최상층에 다다라 원형 홀로 들어섰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횃불로 밝힌 침소와 늘어선 책장, 저주서가 널린 실험대만이 들어차 있었다.
데빌 클로 수장의 개인 공간이었다.
“······.”
중앙에 박힌 커다란 마법석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홍염의 기운이 느껴졌다. 불 꺼진 수정을 쓸어보다가 뒤돌았다.
촛불만 덩그러니 걸린 벽으로 가서 금속 촛대를 끼긱, 돌렸다.
스르륵···
촛불이 꺼지면서 비밀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공중 다리가 길게 펼쳐졌다. 그 끝은 결정에 뒤덮인 탑으로 연결되었다.
휘오오오오오······!
프랙탈이 회오리치는 그곳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들였다. 돌풍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 한 걸음씩 위태롭게 전진했다.
“······하아.”
도착해서는 벽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탑 안은 휑하니 비었다. 첨탑 지붕은 물론, 내부가 무너져서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딱 하나 유리관만이 온전했다.
후우웅― 탁.
‘독수리의 날개’를 써서 그곳으로 내려갔다. 관 주변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유리 너머로 그 안에 잠든 사람이 투영해 보였다.
전신을 칠흑으로 감싼 마법사의 로브. 가지런히 손을 모은 홍시현은 목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뭐랄까, 동화 속에 들어와 엔딩을 직전에 둔 기분이다.
자안을 빛내며 관을 열었다. 허연 뺨에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대신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솔 세이비어’의 검날에 서늘한 빛이 서렸다. 이번만은 교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해서.
‘······.’
흥미로워하는 시선도 개의치 않고 관 앞에 무릎 꿇었다. 대검을 세우고 낡은 기억을 더듬었다. 기사 서약의 맹세.
가호를 마치고 일어섰을 즈음이었다.
《용, 서··· 못해······!》
허공으로부터 눈바람이 들이닥쳤다. 흩날리던 눈꽃이 뚜렷한 형상을 띠었다. 소멸 이후 에테르화한 줄로만 알았던 ‘죽음.’
디스트로이아가 날카로운 손톱을 뻗쳐온 때였다.
화르르르르륵······!
소서리스가 적색 마법진을 새긴 손에서 화염을 뿜었다.
그 불꽃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봤다. 홍시현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유난히도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세월이 무색했다.
《키하악······!》
녹아내린 눈이 뚝뚝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제야 마법을 거둔 홍시현이 선명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오랜만이네, 신유헌.”
눈물이 날 정도로 따스한 재회였다.
그녀와는 싸울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악이 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곧은 의지는 묵을 가까이해도 물들지 않으니······.
그래서 이곳에 유배한 거겠지.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녀는 관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신기한 꿈을 꿨어.”
발 닿는 곳마다 만년설을 녹이며 내 앞에 섰다.
“되살아난 유령이, 이 세계를 구원하는 꿈을.”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모든 것을 아는 눈빛이었다. 태양 수호자의 상징. 찬란하게 타오르는 날개를 펼치며―.
“가자. 집에 돌아가야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래.”
우리는 단숨에 날아올랐다. 커다란 날개로 순식간에 탑을 가로질렀다. 홍시현은 오로지 천장만 향한 채로 말했다.
“······나도 한참 찾았으니까,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으니까. 우리가 한 고생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야. 알지?”
“알았어. 알았다고······.”
피식거리는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목구멍 안쪽까지 감정이 북받쳐왔다. 한 손은 붙잡혔고, 나머지 한 손에는 검을 쥐었으니 곤란할 따름이었다.
혹한에 얼어붙어, 눈이 되어 버리길 바라야지.
그러던 중 마침내 지붕을 통과해 탑을 벗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만이었다.
“······신유헌?”
홍염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멍하니 힘이 풀린 손바닥을 확인했다. 거꾸로 추락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유헌······!”
다급히 외친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콰르르륵······!
허물어지는 성벽이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머리 위로 벽돌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대검을 휘둘러 그걸 부수려 한 순간,
팟―
시야가 암전되며 의식이 끊어졌다.
- 작가의말
마법 통신에서 알려드리는 두근두근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기한 꿈을 꿨어. 되살아난 유령이, 이 세계를 구원하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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