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Chapter 61. 데이터 검열 삭제 (2)

복도로 나가면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아서 다시 나타났다.
쉬이익―
개방된 문에서 배낭을 멘 남자가 뛰쳐나왔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갔다. 자연스레 우리도 그를 쫓아갔다.
도착한 곳은 지하로 가는 계단이었다. 옆벽에 비상구 표지판이 달려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다가 별안간 우뚝 멈추었다.
「······.」
그늘진 경계에 걸친 그가 지상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결국 발길을 돌렸다. 계단 위에 선 우리를 지나쳐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인도자 놈은 말이 없었다. 나는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래로 갈수록 짙어지는 어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격변 당일이라면서. 지하에는 뭐가 있는데? 그쪽은 왜 돌아가는 거고.”
“지하는 방공 시설이다. 돌아간 이유는······.”
놈은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지상에 사람이 남았으니까.”
“그 말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시선을 올려 멍하니 회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대격변은 현실이 가상 세계로 대체된 사건이다. 이유는 모른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경위를 아는 관계자는 단 한 명도 마주친 적 없다.
잠시 후 사내가 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말다툼을 벌였다.
「――!」
「―――!」
백발이 성성한 연구원은 겉보기에도 노쇠한 나이였다. 그런데도 벽을 붙들고 안간힘으로 버텼다.
그 순간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 갈 수 없네··· 결정을 내려야만 하네. 자네가··· 자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위에 통보할 수 있네.」
노인은 반쯤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사내가 팔을 잡아당겨도 강경하게 고개만 내저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당신이란 사람은··· 치매 끼가 보일 때부터······.」
헛웃음 지은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노인을 이끌던 손으로 허리를 짚고는 착잡한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 사람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살 겁니까? 난 이럴 시간 없습니다. 죽을 거면 혼자 죽어요.」
계단을 내려보던 그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아버지가 나한테 그 일 떠맡긴다고 죽은 사람 안 돌아오니까.」
「아니네, 아니야··· 안사람이 자넬 얼마나 아꼈는데······.」
노인이 주름진 얼굴을 초조하게 쓸어내렸다.
「나는 지하에 들어가도 곧 죽을 걸세. 원래는 그 사람 역할이었지. 이젠 자네밖에 없어. 나는 안 돼. 나는······.」
그러더니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진 얼굴로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게.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인류를 위한 결정이네.」
「······아무 의미 없는 짓일 겁니다.」
「자네가 맡아만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꾸겠네. 다신 해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그 말을 듣고서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을 일으켜 정중히 부축했다.
「준비를 서두르죠.」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은 어떤 표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
인도자는 침묵을 지켰다.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부 지난 일이라는 양 담담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놈의 반응도, 방금 들은 수수께끼 같은 대화도.
놈이 먼저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부자는 어느새 저만치 사라졌다. 그들이 지난 길을 우리도 따라 걸었다.
“설명.”
놈을 재촉하고서야 겨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게임 출시가 무기한 연기된 시점이었다. 내 어머니와 함께 이 게임의 공동 제작자였던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지.”
어렴풋이 짐작은 했어도 꽤 놀라웠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게 있었다.
노인은 분명 ‘위에 통보한다’고 언급했다. 격변이라는 사건에 배후가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인류를 위한 결정이라는 말은······.
“우리는 민간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기밀을 알았다. 그 일로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을 벗어나, 국제 프로젝트에 연루됐지.”
“······국제 프로젝트라고? 그럼 역시···.”
갈수록 온도가 싸늘해졌다. 손끝이 불쾌하리만치 차갑게 얼어붙었다. 단순히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류 보전 계획.”
기분 탓이라면 모를까.
“국가 인구 대다수를 손실할 위기에 처했지. 가뜩이나 세계 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한국도 처지가 다르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 이후를 대비할 방책을 준비해야 했다.”
놈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무감한 어조로, 마치 사실만을 줄줄 뱉어내는 기계처럼.
“네가 기억하는 그 격변이 터진 건 전쟁 직전이다.”
전쟁.
그 단어를 곱씹어 볼 여유도 없었다. 뇌가 정지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붕 뜬 기분이었다.
어느덧 계단도 끝이 보였다. 그곳도 별 다를 바 없는 연구동이었다. 복도를 쭉 가로질러서 비상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육중한 방호벽을 열었다.
끼이익··· 쿠웅.
잠금이 걸리자 외부와 완벽히 격리되었다. 그제야 풍경이 지하실에 가까워졌다. 생활 공간이 마련된 구역을 지나 연구실 문을 개방했다.
“그리고 나는 이날······.”
쉬이익―
“······이 게임의 시스템 관리자가 되었지.”
눈앞에 어두컴컴한 공간이 펼쳐졌다.
복잡한 전선이 연결된 생소한 장치였다. 그 의자에 놈이 앉아 있었다. 아니, 머리에 기어를 쓰고 반쯤 누워 있었다.
그때부터는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놈은 간혹 그 의자에서 내려왔다. 한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가끔 복도로 외출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실수였지.”
놈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광기가 그 얼굴에서 묻어나왔다.
베타 테스터였던 놈은 이 세계에, 이곳의 적정 위험 수준을 유지하는 전능한 역할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처 없이 눈이 흔들렸다. 예상대로 위험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럼 내가 구한 이 세계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전쟁이 터졌으면 현실은, 바깥에 있는 나는, 당신처럼 저렇게······.”
사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놈은 웃었다.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알다시피 격변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 현실 기준으로도 그랬다. 시스템 관리자에게는 연동된 바깥 정보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니까.”
나를 애잔해 하는 눈빛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연민.
“마지막 소식은 약 500년 전이었다.”
그 순간 눈앞이 암전되었다. 다시 주위가 환해졌을 때는 익숙한 장소였다. 혼돈의 신전. 그 최상층에 자리한 놈의 자리였다.
전면 유리 너머에 황폐한 지구가 떠 있었다.
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현실감이 부재했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나는 현실의 너를 본 적이 없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전쟁이 터진 뒤로 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말도 안 돼, 말도······.”
고개를 도리질하며 뒷걸음질 쳤다. 발밑에 미끄러운 무언가가 밟혀서 넘어질 뻔했다. 술병이었다.
“그날 네가 목격한 물체는 아마 위성일 거다. 너를 비롯한 사람들의 데이터가 모두 저장된 위성이지. 서버를 우주로 띄웠으니까.”
“아냐······.”
놈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유롭게 나아가서 전면 유리에 손을 댔다. 그 인영 위로 푸른 홀로그램 화면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지금은 나도 너와 마찬가지다. 실체가 없는 유령이지. 이 세계의 모든 주민이. 하나도 빠짐없이.”
“왜··· 지금 와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어째서··· 아무도 그 사실을, 나도······.”
눈가를 덮고서 횡설수설했다. 놈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것이 이상해서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놈은 몸을 돌려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서 그 표정을 분간할 수 없었다.
웃고 있나? 아니면······.
“생전에 네가 죽기 전에 모든 걸 털어놨지. 너는 잊어버렸다. 기억을 잃고 이 세계에 고통받으면서, 결국에는 내가 조작하는 요소 중 하나였던 허스타로스를 살해하고 죽었다.”
“······데이터 검열 삭제.”
불시에 떠오른 그 메시지를 본 기억이 났다.
그러자 꺼졌던 불빛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무수히 겪었던 이상한 순간. 그 비밀이 주마등처럼 뇌를 스쳐 갔다. 내 기억은, 정신은··· 영혼이라고 믿었던 의지는···.
관리자조차도 권한을 가지지 않은 시스템에 얽매여 있다.
“처음에는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윗놈들 의도가 그거였으니까.”
이제 놈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기억이 도중에 끊기지도 않았다. 1회차에 놈이 했던 말이다.
네 카르마 수치와 데이터양은 남들보다 월등하다고. 어쩌면······.
AI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후에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지구 전체의 생태계가 파괴될 거라는 전망이었다. 인간이 핵무기를 사용한 대가라는 거지. 그러니 그곳에 돌아가 적응하려면······.”
이어지는 것은 변명이었다. 눈을 내리깐 놈이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15살 중학생도 온갖 변이종과 괴물의 위협을 견디면서 생존해야 했다.”
그게 ‘악의 시대’의 실체였다. 이 세계가 끊임없이 종말의 위협에 시달리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놈은 간단히 결론지었다.
이 시뮬레이션을 견디고 살아남아서, 마침내는 열악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해서, 우리는 인간 형태의 컴퓨터에 이식되어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예정이었다.
과학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쩌면 생체 복제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지.”
놈은 알았다.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던 거다. 그 진실을 알리려고 나를 도왔다. 내가 세계를 구하고 한계를 뛰어넘을 때까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 역할에 질려버렸다. 지속할 동기가 없는 데다 미래도 없는 일이지.”
저벅.
놈이 한 발짝 다가들었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낯은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고독감이 느껴졌다. 기나긴 삶을 회고한 뒤에 느끼는,
회의.
”하지만 너는 다르다. 누구보다 살아있지. 한계를 깰 가능성이 가장 큰데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이 시뮬레이션에 몰입했던 영웅이니까.“
놈이 허공에 떠오른 창을 가져와 눈으로 훑었다. 그 내용이 내게도 보였다.
[자가 발전기 전력 가동: 이상 없음]
미련 없다는 듯이 놓아주자 창은 최소화되어 내려갔다. 그게 이 세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마력이 아닌 전기.
”나와 다르게, 네게는 이 세계를 지킬 이유가 있다.“
그러니 게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울컥하는 심정이 올라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대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리 없었다. 내게는 여전히 모든 기억이 소중했다.
설령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해도, 나는······.
유령과도 같은 이 세계를 저버릴 수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네게 이 역할을 넘길 생각이다. 위험 수준 유지 시스템인 ‘운명’을 파괴한 네게.“
놈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거리를 두고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카르마 선 세력의 척도인 플레이어지. 악 세력에 거부감이 크지만, 그보다도 위협을 진압하려는 ‘의지’가 더 크다.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그런 소리를 들으려던 게 아니었다. 시스템 관리자만이 열람할 수 있는 히든 스테이터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딴 건 아무래도 좋지.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이 이상 위험한 세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
놈은 그런 내 머릿속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최소한 네가 만들 세상은 나보다 나을 테니······.“
드물게 씁쓸한 음성이었다.
화아아···
허공에 블랙홀이 열렸다. 놈이 그곳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를 내게 겨누는가 싶더니만, 이내 손잡이를 내 쪽으로 돌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니 이걸로 나를 쏴라.“
총을 건네며 그리 고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 위로 작은 창이 떠올랐다.
선택지 창이었다.
[1. 총을 쏜다.]
[2. 총을 쏘지 않는다.]
[주의: 당신의 선택으로 이 세계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니 신중히 고르십시오.]
- 작가의말
“선택은 네 몫이다, 신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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