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BAD END: 신에게 바치는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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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영문 모를 메시지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창을 끄자 혼돈의 신전이었다.
“······.”
인도자 놈이 나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웬일인지 알 수 없었다. 놈은 언제나 저 빌어먹을 사장님 의자에 앉아 거들먹대지 않았던가.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용건이냐고.”
인상을 구기며 놈을 추궁했다. 주위는 엉망이었다. 이전에는 바닥이 깔끔했는데, 지금은 곳곳에 술병이 굴러다녔다.
이따위로 사는 놈이니 나와 홍시현의 재회를 방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거지.
놈은 웃지 않았다.
“그렇군. 이게 내 결말이라는 거군.”
검회색 눈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놈이 여느 때처럼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하긴 너는 내 역할을 빼앗겠다고 했으니까. 이게 네가 악신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거겠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놈은 리볼버를 내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꿨다. 총을 도로 가져가 천천히 자기 머리에 겨누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타앙······!
놈이 제 머리를 쐈다. 그 형체가 점멸을 반복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치지직―
시체가 글리치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뭐··· 야··· 이게······.”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삐끗, 무언가가 발에 밟혀 휘청였다. 빈 병이었다.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머릿속에 회상이 빠르게 스쳤다. 상실한 기억이 역순으로 재생되었다. 직전에 나눈 대화, 결전의 순간, ‘죽음의 시대’······.
생전에 허스타로스가 속삭인 내용까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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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알림이 귀따갑게 울려댔다. 홀로그램 영상과 생소한 인터페이스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개중에는 ‘자가 발전기 가동’ 여부를 표시하는 창도 있었다.
“아냐···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고개를 도리질 치며 상황을 부정했다. 반쯤 정신을 놓고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버튼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고 건물을 쥐잡듯이 뒤졌다.
놈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엔딩을 바라고 세계를 구원한 게······.”
불 꺼진 주방에 서늘한 빛이 들이쳤다. 식탁을 짚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패닉 상태로 숨을 몰아쉬다가 얼굴을 들면 액자가 놓여 있었다.
노부부는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개자식아······.”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영웅이 신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뿐이었다. 종언이 오려면 멀었다. 적어도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은 흘러야 이 세계는 작동을 멈출 전망이었다.
안타깝게도 말이지.
자, 그럼··· 우리의 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남겨놓고서, 이제 겨우 한 시대를 보낸 신유헌은······.
글쎄다.
그 심정까지 우리가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동안 무언가가 바뀌기는 했다.
가령 혼돈의 영역이 그랬다.
신전은 이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자리를 꿰찬 새 주인의 영향이었다.
복도에 깔린 고풍스러운 레드카펫.
곳곳마다 기사 갑옷와 무기를 장식했고, 조금 더 지나면 액자로만 한 면을 채운 벽이 나왔다.
사진은 우리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일행들, 그리고 ‘제2태양’ 일원들. 단체 사진 속에서 그들은 졸업 여행을 떠난 동창생 무리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유헌은 종종 그곳에서 사진을 감상했다. 까마득한 천장까지 느릿하게 훑으며 회상에 잠겼다. 그곳을 ‘영원한 추억의 장벽’이라 이름 붙였다.
그 장벽을 지나쳐 공성현은 홀로 걸었다.
저벅, 저벅···
워커 굽 소리가 일정 간격으로 울려 퍼진다. 그는 여전히 제복 코트 위에 망토를 걸쳤다. 걸음마다 검은 자락이 나부낀다.
한편 등은 어딘가 허전했다. X자로 메고 다니던 쌍검이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났으니, 더는 쓸데없는 피를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의미일까.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우리로서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불가능하니까. 그걸 엿볼 수 있는 이는 신뿐이다.
그의 계약 신인, 혼돈과 광기의 구원자.
“혼돈의 신이시여, 그럼 이만.”
“예, 살펴 가시고 나중에 또 뵙죠.”
신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신유헌은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왕좌에 턱을 괴고서, 그들이 벽 뒤로 사라질 때까지.
“······.”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투구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상부를 가리고 입만 드러낸 투구로, 자안의 능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누구나 편견 없이 대해야 하니까.」
수호신이 인간에게 차리는 예의였다.
“······.”
공성현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동안 먼 곳에서 기다렸다. 신유헌이 그를 눈치챌 즈음에야 신을 알현하러 다가갔다.
“왜 왔어? 쓸데없는 얘기면 말 안 한다. 입 아프거든.”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신유헌은 태도를 바꾸었다. 지루한 내색으로 시트에 푹 파묻혔다. 좀이 쑤시는지 한쪽 다리를 무릎에 접어 올리고 하품하기도 했다.
“지상에 발생한 문제는 해결됐어. 그보다······.”
공성현은 그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전에 했던 얘길 다시 듣고 싶은데.”
그들에게는 못다 한 대화가 남아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신유헌은 그를 붙잡고 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됐어, 그런 거라면. 보고도 메시지로 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으니까.
투구를 한 손에 벗어들고 그리 말했다. 울적함, 권태, 불만스러움. 그러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얼굴이었다.
할 말이 있는 기색이나 이미 문을 닫아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신유헌.“
공성현은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재촉했다. 억지로라도 그 내용을 들을 셈이었다. 저번에는 아쉽게 실패했다. 문장이 아니라 음절만 드문드문 뇌리에 남았다.
오늘은 다를지도 모른다.
”······아, 그래. 머리 좋은 당신이니까 아무래도 궁금하다 이거지.“
신유헌이 흥미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일 적과는 달랐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자조적이고 씁쓸한 미소였다.
한편 숨길 수 없는 광기도 슬쩍슬쩍 드러났다.
”좋아. 말할게.“
신은 눈을 반쯤 내리깔아 사도를 내려보았다. 위엄스러운 갑옷과 상반되는 격식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실없는 농담이라도 던지는 양···.
”사실 이 세계는 가짜야. 현실에선 당신도 죽었고, 나도 죽었다고. 내가 왜 우리 부모님을 못 찾았는 줄 아냐? 애초에 데이터가 없었거든.“
그 음성에 점차 떨림이 더해졌다.
”이 세계에 오지 못하고 누락된 기록도 많았어. 내 부모님은 애초부터 이 세계로 이전될 예정조차 없었다고. AI로 변환한 데이터 자체가 없었으니까······.“
나중에는 이마를 덮고 거의 흐느꼈다.
”우린 돌아갈 수도 없어. 전력이 꺼질까 봐 불안에 떨면서 여기 계속 살아야 해. 물론 좋아. 다 좋다고. 하지만 나는······.“
긴 한숨을 섞어 내뱉었다.
”이런 역할 따위 떠맡고 싶지 않았어. 눈앞에서 그런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놈이 죽은 뒤에야 전부 기억해냈어. 전부 다······.“
내 잘못이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혼자만 진실을 안다는 건 잔인하지. 그런 상태로 언제까지고 싸움을 중재할 수는 없어. 사람들의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볼 때면 나는··· 아니, 그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살면 미쳐버리니까.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소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공성현에게 닿지 못했다. 어김없이 시스템이 작동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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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성현은 입술을 뗀 채로 굳어버렸다. 이번에도 그 감각이었다. 기억이 소멸한 빈자리만을 절감하는 지독한 공허감.
”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잖아.“
신유헌이 숙인 머리를 감싸고 킥킥거렸다.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신이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나가서 당분간은 돌아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 신에게 차마 반발할 수 없었다. 절망하는 그를 두고 복도로 나왔다.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다음 일에 집중되지 않을 정도로.
신유헌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어째서······.“
무릎에 엎드렸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몸을 추스르고 신의 역할로 복귀해 손을 휙 저었다. 우수수 떠오른 홀로그램에 지상의 풍경이 비쳤다.
솔라리움과 루나리움, 위험 지대, 지하 세계까지.
하나 같이 평화로웠다. 세계가 중립을 유지하도록 밤낮으로 헌신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공평하고 정당한 헌법 아래서 자유롭게 살아갔다.
오직 자신만이 고통받았다. 왕관을 벗을 수 없어 그 무게를 외로이 견뎌야 했다. 비로소 인도자가 겪었을 어려움이 이해가 갔다.
불안과 광기, 후회, 회의감, 그 외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
전부 인간 때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던 존재는 역설 그 자체였다. 연민이 들지언정, 그 기저에 자리한 심연을 헤아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은 구역질이 났다.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서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이제야 그쪽을 이해했어, 인도자.“
피식거리며 어둑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런 결말을 바랐다면 신의 승리다. 제게 끝장나는 엿을 먹이고,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렸으니까.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야.“
돌아오지 않는 신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
자,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교훈을 하나 배웠다. 선택을 망설이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당신이 곧 신유헌이고, 당신의 선택이 곧 신유헌의 선택이니까.
그게 게임의 법칙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한 가지 유용한 규칙을 알고 있다. 세이브와 로드, ‘저장’과 ‘불러오기’다.
아주 편리한 기능이지.
인도자··· 아니, 신유헌의 전임자는 치밀한 신이었다. 당신이 후회할 것을 예상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놓았다.
그러니 선택해라.
지금 이 결말이 마음에 든다면, 물론 이곳에 정착해도 좋다.
[세이브 파일을 불러오시겠습니까?]
[1. 불러온다.]
[2. 게임을 종료한다.]
- 작가의말
[플레이어 ‘주권재’의 데이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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