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TRUE END: 신을 구원한 영웅 (3)

도착한 곳은 시간의 성 앞이었다.
댕··· 댕··· 댕···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중앙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다. 바늘은 정확히 12시를 가리켰고, 종성은 몇 번 울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여기에 공성현이 있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황량한 벌판이었다. 들은 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니 은둔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지.
푸드덕―
까악··· 까악···
인기척을 감지한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불길한 징조에 인상을 쓰며 걸음을 옮겼다. 입구까지는 금방이었지만······.
“흐음··· 역시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격자식 창살이 달린 성문이 문제였다. 밖에서 열 수 없는 종류이니, 들어가려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검 손잡이에 손을 뻗은 그때였다.
철컥, 차르르르륵―
도르래가 작동하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성주가 직접 열어준 건가?”
어둠 속을 거닐며 내부를 탐색했다. 성안은 횃불 하나 없이 고요했다. 창으로 들이치는 빛줄기만이 빛바랜 융단을 어슴푸레하게 밝힌다.
그 녀석··· 의식은 있는 거겠지.
인도자는 공성현이 봉인된 상태라고만 했다. 어떤 식으로 지내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깨어 있다면··· 다른 불사대와 마주쳤을 때처럼, 녀석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
이성이 얼마나 온전할지가 관건이다. 녀석을 어떻게 설득할지 궁리하면서 층계를 올랐다.
성안은 미궁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계단 위치가 오락가락해서 난항을 겪었다. 다음 층으로 오르려면 후미진 구석까지 샅샅이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끼이익··· 쾅.
기이한 소음만 연신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방은 수백 개지만 사람이 산 흔적이라고는 없다.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웬일이세요, 유헌 씨?」
「초대한 적 없는데. 그쪽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샤라락―
보랏빛 인영들이 손을 잡고 모퉁이로 사라졌다. 찰나에 스친 두 소녀가 묘하게 낯익었다. 무시하면 장난은 갈수록 심화했다.
「탱커 아재, 처음부터 안 거 아니에요?」
복도 문을 열어보던 와중이었다. 방에서 불쑥 튀어나온 환영이 그리 물었다. 최요환의 모습을 한 허상이었다.
「그러면서 모른다고 거짓말한 거겠지. 아재도 그렇고······.」
녀석이 등을 돌려 암흑 속으로 녹아든다.
「검사 아재도.」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마력으로 빚어낸 환영일 뿐이었다. 정적이 찾아들면 지독한 고독감이 스며왔다.
성주와 공유하는 그리움이었다.
“······.”
천장을 올려보아도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이는 ‘광기’가 아니라 공성현의 의지였다.
안전한 이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삼키며 숨죽이기를.
어쩌면 녀석은 이미 악마화했을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심이 들었다. 제어를 잃은 무의식이 끊임없이 환상을 자아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 녀석, 의외로 정신머리는 똑바로 박힌 것 같네.”
이딴 곳에 틀어박힌 의도만은 기특해서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절박했을 심정이 안타까웠다.
세상에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악을 쉬이 받아들이고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인간이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응당 그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악당들.
우리는 전쟁을 겪으며 그런 인물을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반면 본성을 억누르고 괴로움을 감수하는 인간도 존재한다. 광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한들 자기가 정한 선을 놓지 않겠다는 사람이······.
“공성현 씨는 그런 어른으로 컸다는 거지.”
다시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다. 녀석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너는 악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다음 계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그로부터 얼마나 헤맸을까.
온갖 유령을 거쳐 마침내 시계탑에 입성했다. 무심코 튀어나온 인사는 마음과는 정반대였다.
“열쇠 가지러 왔어, 공성현 씨.”
원래라면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저히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녀석의 낯짝을 마주하니 낯간지러웠던 데다······.
사과한다고 들어줄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챌칵, 챌칵···
구불구불한 흑뱀에 둘러싸인 채로 태엽 장치가 돌아간다. 하나, 둘··· 복잡하게 얽힌 톱니가 마수에 침범당해 버벅거린다.
그 가운데에 공성현이 앉아 있었다. 온기라고는 없는 금속 의자에 전신을 ‘속박’하고서.
조용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밥은 잘 먹고 다녔냐? 여긴 고용된 쉐프도 없는 것 같던데.”
“돌아가.”
안부를 물으면 무정한 축객령이 돌아왔다.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야.”
“왜, 그 팔 때문에?”
여유작작하게 검을 늘어뜨리고 턱짓으로만 녀석을 가리켰다.
녀석은 반만 악마화한 상태였다. 어깨 너머로 짙은 마기가 넘실거리고, 오른팔을 휘감은 뱀이 혈관을 좀먹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소환수가 조금 징그럽기야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침식이 심하긴 하네. 마혈석을 달고 있으면 치료해도 계속 재발하겠지. 그 모습으로는 사람들이랑 섞일 수도 없을 거고. 당신은 혼자야.”
녀석은 팔걸이에 놓은 손만 꽉 그러쥐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성을 거부하는 방어 본능. 살의를 느끼면서도 선공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가소로워서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인 걸 무서워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눈을 감으면 생전의 기억이 선명했다. 악마와 나눈 계약으로 배척당하는 나날이었다. 저러다 언제 폭주할지 몰라, 지나는 이마다 그리 수군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당신의 ‘공허’를 이해해. 그러면 이 검으로 정화할 수 있지. 구원하고 싶은 대상을···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넌 죽지도 않아.
그런 뜻으로 ‘월광’을 겨누어 보였다. 검날에 희미하게 신성이 서렸다.
녀석은 불멸의 반신이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 숨었다. 필멸자 사이에서 이성을 잃으면 참사가 끊이지 않을 테니까. 그게 녀석이 한 선택이다.
악당이 되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모습이어도 말이지, 밖에 나가면 당신을 도울 사람도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사람도 많거든. 그러니까······.”
숨바꼭질은 이제 끝이다.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콰아앙······!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거대 흑뱀이 벽에 처박혔다. 천장과 돌벽이 와르르 무너져 계단을 덮쳤다.
“그런 이상론이나 지껄일 거면 나가.”
공성현이 나를 흉흉하게 노려본다. 뱀이 똬리를 튼 오른손을 들고, 다시 뱀을 처박을 준비를 마친 채로.
파스슥···
잔해에 파묻혔던 거대 흑사가 먼지를 흘리며 녀석 곁으로 돌아왔다. 왕좌를 둥글게 감싸고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주시한다.
이러니 우습다는 거다.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 줄곧 이 성에 혼자 갇혀 있었으니까.
“······글쎄다. 이렇게 되면 당신 텔레포트로 나가야겠는데.”
스걱―
어느새 왕좌를 벗어난 녀석을 단숨에 가로질렀다. 고개를 돌리면 녀석은 오른팔을 뻗은 채로 굳어 있었다. 검은 들지 않았다. 마법진조차 새기지 않았다.
“······.”
대검에 베인 옆구리만 왼팔로 감싸 안았다.
“공성현 씨 당신 싸울 생각 없잖아. 가만히 앉아서 뱀을 부릴 수 있는데, 굳이 도발에 응해서 내 함정에 빠져줬지.”
여기까지 온 나를 믿으니까.
“옳은 선택이야.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
이걸로 해묵은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을 터다. 죄악을 짊어진 어제, 그리고 죗값을 갚아가려는 내일의 기로에서.
우린 내일을 선택했다.
치이이익······!
신성한 고열은 한 박자 늦게 녀석을 씻어내렸다. 얼마 후면 연기에 휩싸인 전신이 드러났다. 힘없이 손을 내리고 고개를 떨군 모습이었다.
악의 개화를 정화하는 ‘월식.’ 공허를 덜어내고 나면 무력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아직 저주가······.”
“됐어, 멍청아.”
녀석의 팔을 잡아채서 신력을 불어넣었다. 장갑이 찢겨 드러난 마혈석이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파사삭···
녀석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팔을 놓아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 능력 얻느라 늦은 거다. 미안.”
눈을 돌리면 뺨으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녀석을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돌무덤 앞에서야 출구가 마땅찮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려냈다.
정말이지, 이런 실수는 꼴사납다니까.
“집에나 가자.”
뒷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을 돌아보았다. 어색함을 무마하려 웃으면 녀석의 어깨가 내려갔다. 한결 진정된 얼굴로 느릿하게 걸어왔다.
“······여긴 섬이야. 처음부터 텔레포트를 시전해 줄 마법사를 데려왔어야 했어.”
“이미 있잖아, 여기 한 놈.”
지척에 멈춰선 녀석을 삿대질했다. 녀석은 고개 돌려 나를 외면할 뿐이었다. 이윽고 발치에서 보랏빛이 터져 나왔다.
섬이라.
그래서 절벽 너머로 파도가 쳤던 거다. 저편은 아마 망망대해로, 사람 사는 대륙까지 헤엄쳐 갈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을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비밀의 성처럼, 아주 멀고도 멀리.
“하지만 인간은 섬이 될 수 없지.”
녀석의 등을 퍽 소리 나게 후려갈겼다. 그 탓에 시전이 중지되어 마법진이 꺼져버렸다. 녀석이 등을 쓸어내리며 눈을 흘긴다.
“······신유헌.”
“감사 인사는 됐고, 다음에 담력 시험하러 오게 성은 남겨놔. 누구나 한 번쯤은 휴양지로 도피하고 싶은 법이니까.”
뻔뻔하게 농담을 던지며 씩 웃었다. 머지않아 게이트가 발동되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챌칵.
시계태엽이 휴식을 알리며 일제히 멈추었다. 계단이 있던 자리에서 한 무리가 손을 흔든다.
「······.」
우리를 배웅해주는 일행들이었다. 보랏빛 환상은 흐릿한 미소만 남기고 휘날려 갔다. 연기처럼, 혹은 한낮의 신기루처럼.
“우린 어쩌면 전부··· 외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걸지도.”
무심결에 흘린 중얼거림이었다.
이어져 있어도 고독한 마음. 부질없음을 알기에 손을 맞잡고, 서로를 지키고, 세계를 구원하려는 의지. 인간으로 살아있다는 증거.
유령이나 다름없는 세계를 사는 우리에겐 그것이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팟―
시야가 암전되면서 그렇게 섬을 빠져나왔다.
***
자,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세계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영웅과 인도자가 세상을 평화롭게 존속시키기로 약속했으니까.
신유헌은 이 세계를 사랑했다.
비록 유령이라 한들 우리의 영혼이 이곳에 살아 숨 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동료를 구원하고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앞으로의 미래를 묻는다면··· 모든 것은 당신의 손에 달렸다.
당신이 곧 신유헌이고, 당신의 선택이 곧 신유헌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넓으며 당신에게는 무한한 시간과 가능성이 주어졌다. 당신의 뜻에 따라 이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변화할 것이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도 남아 있다.
[□세계의 끝까지 선을 추구하라]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 끝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열려 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끝에 다다를지, 우리는 그 선택을 줄곧 지켜볼 것이다.
언젠가는 위성이 새로운 우주에 닿을 수도 있겠지. 우리를 실은 이 배가, 허상에 지나지 않는 인류를 발 디딜 터전으로 인도해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날 문명도, 첨단을 달릴 과학도, 사람만이 꽃피우는 문화까지도.
그때까지 이곳은 신유헌, 당신의 세계다.
이제 질문을 바꾸겠다. 오직 당신에게만 처음으로 묻는 것이다. 이 세계에 가장 몰입했던 영웅,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로 세상을 바꿔온 당신에게.
[SYSTEM: 당신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겠습니까?]
[“이 공백에 답을 적으십시오.”]
우리 시스템은 언제까지고 당신의 대답을 기다릴 것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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