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EPILOGUE: 당신이 모르는 공백 (2)

그 무렵 공성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태엽들을 방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들이 거주할 시설을 손수 세웠다.
“그러니까 이 대저택을 자비로요······?”
“이 정도면 거의 성 아냐?”
일행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 결과물을 감상한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면 당신 시간의 성도 직접 만들었지?”
“설계부터 건설까지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마력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았어.”
무심한 낯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다층 저택은 지붕이 일광을 가려선지, 서역의 옛 병원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근데 취향은 한결같이 왜 이런 거냐? 평화로운 솔라리움 동북부 거주지에 웬 고딕풍?”
이놈 어릴 때 팀 버튼 영화라도 애청했나?
“건축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아니, 그 소리가 아닌데?”
“에드가 앨런 포를 연상시켜서 오히려 예술적이에요··· 전 무섭지만요.”
문예린이 탄복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사이 마당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한창이다. 헬베로스를 풀어놓으니 가시넝쿨 사이로 앳된 태엽들이 뛰어논다.
“야, 다 따라와! 오늘도 막대기 싸움이다!”
“머리 치면 단번에 기절하는 거 모르냐?”
나무막대로 또래 정수리를 때려대는 녀석들을 가리켰다.
“쟤네는 교육이 더 필요하겠는데.”
“좋은 일에 힘을 쓰게 하면 돼. 당신처럼 자경단이 된다든가. 다만 멀쩡한 선임을 만나야겠지.”
“멀쩡한 선임······.”
일행들이 우리를 번갈아 본다. 공성현은 물론, 나도 이목이 부담스러워 한 발짝 떨어져 섰다.
“됐고, 온 김에 안이나 구경하자.”
집주인을 앞세워 저택으로 들어갔다. 1층 넓은 홀에 남녀 불문 스카우트가 집합했다. 바깥 놀음하던 꼬맹이도 단상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 무대로 감시자와 소년이 올랐다.
“예정대로 아카데미 생활 기록과 성적에 따라 리더를 임명하지. 이름은······.”
그 녀석이었다. 공성현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던지던, 안면에 긴 흉터가 남은 소년. 녀석은 ‘운명의 감시자’ 로브를 물려받고 저택의 총관리자로 직책을 올렸다.
“저 아이 공성현 씨만 마주치면 틱틱대는데··· 의외로 저희한텐 예의가 바르더라고요.”
“저한테도요.”
“그렇습니까? 저는 무서워하던데요. 남자라고 차별하는 건가.”
우리는 무대 뒤편에서 갈채를 보내는 역할이었다. 이른바 들러리지. 식을 마치자 공성현은 소년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짧게 연설했다.
“기한은 6개월이다. 그동안 관리자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들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지.”
그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다투지 않는다. 이 작은 사회, 그들의 세상을 공정하게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자 경쟁한다.
“엇나가는 녀석은 강등이다.”
“알고 있어.”
소년은 공성현의 손을 뿌리치고 내려갔다. 들뜬 걸음으로 인파를 가로질러 계단을 뛰어오른다. 당장 로브라도 입어볼 셈일까.
“그래도 애들이라 귀엽네요. 어릴 땐 그렇잖아요. 다들 싸우면서 크지만, 다 자라기 전엔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는 거죠.”
“수아 씨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면 좋겠네요. 공성현 씨 말고.”
그 순간 공성현이 우리를 흘긋 돌아본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귀신이지. 나는 입을 싹 닦고 일행들과 훈훈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일행들에게 저마다 개인 주택이 생겼다. 그들이 리버사이드 숲으로 이사 온 덕에, 첫날부터 앞마당 정원에서 반상회가 열렸다.
“주택 자금을? 공성현 그 자식이요?”
“네. 혼자 감당하기엔 좀 부담스러운 금액인데··· 얘기하니까 선뜻 빌려주셨거든요.”
“그 사람 던전 운영은 남한테 맡겨놓고 세만 받아먹는대요. 모든 던전주의 이상이죠.”
처음에는 문예린, 그 뒤에는 임수아의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그때까지도 최요환은 저 혼자 카드를 수집한답시고 여관을 전전했다.
“난 모험가거든요. 세상을 방랑하는 사나이지. 모험 소설에 나오는 자유로운 영혼들처럼.”
그리 자부하더니 종래에는 녀석도 정착했다. 덕분에 내 별장 주변이 스x프 빌리지가 되었다.
“공성현 그 새끼,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사람들하고만 놀러 다녔다 이거지······?”
그날은 화풀이로 수집품에 쌓인 먼지를 털어댔다. 이웃마다 음식을 돌리니 냉장고가 만석이었다. 이 사람들이 자취 시작하니 요리를 배우는구나.
시간의 신전에 찾아가서는 대뜸 따지고 보았다.
“벌이가 쏠쏠하다던데? 나한테는 왜 들리는 소식이 없냐? 세금 상납해.”
“당신이 그런 식으로 굴 테니까.”
아치형 문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공성현도 대청소로 눈코 뜰 새 없는 모양이었다. 채비를 마친 녀석이 문을 열어주었다.
“여기가 이런 데였나? 좋은 데서 사네.”
그 너머로 복도가 설핏 보였다. 원룸이라도 워낙 넓으니 가구만 새로 들이면 남부럽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삭막한 공기가 꺼림칙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크로노시스는 탑을 떠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놈이 소멸하고 탑이 사라진 지금은 신전을 감시할 주인이 필요해.”
“왜, ‘운명’의 시계태엽이 저절로 착착 조립돼서 되살아날까 봐 불안하냐?”
“······.”
녀석이 나를 조용히 응시한다. 내가 넘겨준 태엽 성물을 목에 걸고서.
“당신이 수호신들을 통해서 나를 시간의 신으로 임명했으니까. 맡은 일을 다 할 뿐이야.”
“그렇다고 여기 살 필요는··· 아닌가? 하긴, 이 공중 섬을 지상에 옮기긴 어렵지. 그리고 당신은 고립된 곳에서 혼자 사는 거 좋아하잖아. 성에 은둔한다든가. 전형적인 빌런처럼 말이지.”
여하간 수상한 습성을 가진 녀석이다. 그런 의미로 V자를 만들어 서로의 눈에 찍었다. ‘너를 보고 있다’는 의미다.
“태엽을 넘겼다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거든? 탈옥하면 지옥 끝까지 잡으러 간다. 당신이 저지른 만큼 일해서 갚아.”
“나도 여기 머무르는 게 내키진 않아. 파괴한 ‘운명’을 감시할 명목이지.”
“뭐야, 그런 거면 스x프 빌리지에 살아도······.”
말꼬리를 흐리니 녀석이 미간을 좁힌다. 무슨 뜻인지 추궁하는 기색이다. 나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 싶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다. 출발이나 해.”
녀석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 녀석은 전지한 시스템 관리자의 존재를 모르니까. 그 비밀을 선뜻 털어놓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기껏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녀석인데 수틀리면 큰일이지.
화아아······
공성현은 지시대로 바닥에 마법진을 새겼다. 둥근 영역 안에서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운명’하니까 생각났는데, 당신 그때 나한테 뭐라고 하다 말았지? 그건 뭐였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사람 이름 불렀잖아. 무지하게 중요한 얘기라도 할 것처럼.”
녀석은 나를 외면한 채로 입을 열었다.
“······딱히 별 건 아니었어.”
“별거 아니긴, 또 무슨 욕하려고―.”
이어진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SYSTEM: 불확실한 음성 기록을 복구합니다.]
[SYSTEM: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하려고 했어. 도와줘서 고맙다고.”]
[SYSTEM: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합니다.]
정신이 들면 사막이었다. 낙원의 오아시스, 휴식의 신전으로 올라가는 초입이다. 아니, 그보다는······.
“방금 뭐라고?”
눈썹을 찡그리며 공성현에게 물었다. 녀석은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별거 아니었어.”
“아니, 무슨 자동 응답기냐? 똑같은 말만 하게? 그거 말고 직전에―.”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아.”
“별거 아니란 말은 두 번 했잖아?”
어느덧 신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모래 세례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갔다. 앞서가던 공성현을 따라잡을 즈음이었다.
별안간 녀석이 뚝 멈추었다.
“뭐야?”
검은 망토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플로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신유헌, 그리고 감시자.”
그녀는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만만한 미소로 무장한 자태, 구태여 나를 먼저 호명하는 살가움까지.
“오랜만입니다, 플로라. 낙원엔 별일 없죠?”
“그럼요.”
우리는 자연스레 나란히 붙었다. 뒤따르는 워커 소리를 들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신전은 변함없이 쾌활한 생기가 넘쳐났다. 술통을 나르는 일꾼도, 왕좌를 둘러싸고 침 튀기며 논쟁하는 영웅들도.
“예상대로 인구는 더 늘어난 것 같네요.”
나는 360도로 몸을 돌리며 거꾸로 걸었다. 때마침 정원사가 지나가기에, 과일 바구니에서 술병 하나를 슬쩍 낚아챘다.
“오늘은 사람을 몇 명 찾아주셨으면 하는데요.”
도화색 라벨을 확인하고 그것을 공성현에게 휙 던져주었다. 솜씨 좋게 술병을 받아낸 녀석이 나를 원수처럼 노려본다.
“······.”
놀려먹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다. 불만스러운 눈초리에 싱긋거리며 받아치고 정면으로 돌아섰다.
“소식은 들었어요. ‘제2 태양’의 불사자들을 찾고 있다죠? 저번에 왔을 때 언질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뭐랄까··· 확신이 없었거든요. 악마화한 사람들이 여기로 온다는 걸 알고서도, 다들 기억을 잃었을까 봐.”
무엇보다 ‘감시역’으로 바쁘지 않았던가. 누구 씨가 마혈석으로 방대한 마력을 보유한 데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폭주하는 바람에.
“사부들 볼 면목이 없던 것도 있고요. 세계를 구한 지금이야 그런 걱정은 좀 덜었지만요.”
“후훗, 그러네요.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에요. 신유헌도, 감시자도.”
수호신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에 가까운 눈길을 주고 다시금 나를 본다.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그동안 저희 영웅들도 신전에서 놀기만 한 건 아니니까.”
어느덧 연무장 앞이었다. 똑똑, 노크한 플로라가 문을 열어준다.
“재회를 기다린 건 당신만이 아니거든요.”
마법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말끔히 복구한 전면 유리로 따가운 일광이 들이친다. 시릴 정도로 하얀 태양이 망막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전방에서 그리운 음성이 날아든다.
“허리 제대로 펴고, 그래, 그렇게 내려쳐!”
“정진이다, 정진! 그따위 무공으로 나를 뛰어넘으려면 아직 백 년은 멀었다!”
남도연과 길태후. 나를 가르친 스승들 아래서 제자들이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다들······.”
성급히 말문을 떼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러자 기둥에 가렸던 인물도 서서히 드러났다.
중갑 차림으로 벽에 기대어 선 다부진 형상. 단단한 턱을 쓸며 훈련을 관전하는 거구의 사내.
나를 발견한 류성철이 놀란 눈을 한다.
“······신유헌.”
나직한 부름으로 연무장 내부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 작가의말
[SYSTEM: 불확실한 음성 기록을 복구합니까?]
[Y /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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