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 자나 깨나 감기 조심

하필이면 약속 전날 감기에 걸릴 줄이야.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끙 앓았다.
이마에 열이 펄펄 끓는 데다 전신이 아래로 푹 가라앉는다. 이래서야 내일 맛집 레이드에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누가 가볍게 입고 북방 동굴 싸돌아다니래?”
열린 방문으로 질책하는 목소리가 날아든다.
홍시현.
벽 너머에서 그녀가 분주히 움직인다.
냉장고를 열어봤다가, 마력 레인지를 점화했다가, 서랍을 여닫으며 냄비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불과 10분 전.
[수신인: 홍시현]
[첨부 파일: '(충격) 대영웅 신유헌, 저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 사인은 '급성 감기'로 밝혀져 (속보)']
띠링.
[발신인: 홍시현]
[진짜로 내 손에 죽을래?]
답장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홍시현이 부리나케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 과정을 일축하자면 다음과 같다.
1번. 벨도 누르지 않고 현관을 벌컥 열어젖힌다.
2번. 바닥을 쿵쿵 울리며 내 방으로 들이닥친다.
3번. 다짜고짜 버럭 화를 낸다.
'아, 신유헌 장난 메시지 좀 작작···! 응?'
4번. 초췌한 내 꼴을 보고 짜증을 누그러뜨린다.
'뭐야. 진짜로 아픈 거였어?'
5번. 성가신 부모님처럼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어휴, 안색이 창백한 게 거의 시체 꼴이네.'
'목쉬니까 진짜 900살 먹은 할아버지 같잖아.'
'있어 봐.'
'사 온 재료로 치킨 수프라도 끓여줄 테니까.'
그리하여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 참, 이거 뭐 제대로 청소해놓은 게 없어? 주방은 한동안 안 썼댔지? 아주 먼지 구덩이야, 구덩이.”
홍시현이 달그락대며 멀쩡한 냄비를 집어 든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불을 적당히 맞추자, 그제야 집안이 조용해졌다.
“으음······.”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이마만 더듬었다.
홍시현이 올려준 물수건이 어느새 미지근해졌다.
수건을 걷어내면 찬 공기가 닿아 시원했다.
“아, 가만 있으라니까 또 저러네.”
홍시현이 투덜대는 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눈을 뜨지 않아도 그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불만스러운 눈빛.
움츠린 입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동작까지.
피식 웃은 나는 찹찹해진 물수건을 도로 얹었다.
이번에는 화끈거리는 눈까지 전부 덮도록.
천리안으로 읽어낸 대로였다.
포춘 쿠키 식으로 말하자면 소흉.
병세로 시름시름 앓아도 어리광 부릴 구석은 있대서 걱정을 놓아버렸다.
그 증거로 홍시현이 대번에 달려오지 않았는가.
이 세계에서 감기란 의외로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사제조차 고칠 수 없고, 하물며 치료제도 듣지 않는다. 그야말로 희대의 전염병인 셈이다.
격변 터지고 아세트아미노펜이 귀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열 진통제를 유통하는 제약 회사가 죄다 멸종했으니까. 뜨끈한 수프나 약초차, 온정 어린 보살핌 같은 민간요법에 기댈 수밖에 없다.
‘온정 어린’ 보살핌 말이지.
“잔소리 좀 그만해라. 나 심약해서, 콜록, 자꾸 그러면 픽 죽어버린다.”
“뭐래. 네가 무슨 토끼나 개복치야? 외로우면 죽고 스트레스받으면 죽게?”
홍시현이 등을 돌린 채로 쏘아붙였다.
국자를 휘휘 젓더니 간을 보고 화력을 줄인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니 나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장담하는데 인간도 외롭거나 스트레스받으면 죽어. 내가 유령이었으니까 알아.”
몸이 영 찌뿌둥해서 돌아눕던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려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나갈게.”
불을 끈 홍시현이 앞치마를 휙 던지고 나간다.
"~~~."
현관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건 말건 나는 부엌 의자에 걸친 앞치마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취하는 독신남의 사유물을 저리 홀대하다니.
인스턴트 좋아하는 취사병의 뜻깊은 사명이 담긴 에이프런인데 말이지.
참고로 저건 별장에 이사 온 첫날 홍시현이 내게 선물해준 물건이다.
「로망이거든. 근사한 남자가 앞치마 두르고 프라이팬으로 달걀부침 뒤집는 거. 모 영화에서 나폴레옹 솔로가 그러는 장면이 나온단 말이야.」
집들이로 가재도구를 이것저것 들여준다 싶더니 그런 이유였다.
「이제 요리만 잘해지면 돼.」
그녀가 힘내라고 내 어깨를 도닥였다.
언제였더라?
분명 고백했다가 차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때 익숙한 면면이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저희 왔어요. 괜찮으세요, 유헌 씨?”
“듣자 하니 아재 오늘 내일 한다던데?”
“출출할까 봐 우리가 음식 좀 싸 왔어요.”
일행들이 저마다 짐을 하나씩 들어 보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부스럭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황송하네요. 다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시고.”
“비꼬는 건 됐으니 그냥 앉아 있어요.”
“크흠, 비꼬는 거 아닌데요. 예의 차린 건데. 그렇게 무뢰한으로 몰고 가시면 상처받습니다.”
이마에 물수건을 대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최요환이 눈앞에서 도시락을 이리저리 흔든다.
“이 아재 이거, 먹을 거 가져왔다고 좋아서 이러잖아요.”
“아, 하지 마. 그러다 쏟겠다.”
나는 손사래를 치다가 냄새를 맡고 킁킁거렸다.
“어? 이거 고기 냄새······.”
“봐요. 이런다니까.”
녀석이 키득거리며 도시락을 도로 가져간다.
잠시 후 부엌으로 몰려간 이들이 진수성찬을 차려왔다. 급하게 해오느라 가짓수는 적지만, 메뉴 하나하나가 일품이라 감탄이 나왔다.
살코기가 잔뜩 들어간 닭고기 수프.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에,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과 약초차까지.
게다가 양도 푸짐했다.
큰 접시에 빵과 고기, 수프가 그득 담겼다.
“저 혼자 이거 다 먹습니까···?”
“저희 거랑 시현 씨 몫은 따로 싸 왔는데. 근데 감기 옮잖아요. 나가줄 테니까 그쪽은 편하게 먹어요.”
임수아가 일행들의 등을 밀며 방에서 나간다.
“······.”
뭘까.
은근슬쩍 소외당하는 이 기분.
아무리 감기 균이 전염성 바이러스라도 그렇지.
혼밥이라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가, 가지 마세요 여러분. 저 죽을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유헌 씨. 맛있게 드시고 한숨 푹 주무시면 건강해질 거예요. 파이팅!”
문예린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해주었다.
명랑하니 보기야 좋다만, 그러고서 쌩 나가버리니 매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솔로는 서럽다니까.
“하아··· 어디 수프 후후 불어다 ‘아’하고 먹여줄 사람 없나.”
옛 유행가인 ‘외톨이’를 떠올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한 숟갈에 한 구절씩, 속으로 고독하게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다간 끊임없이 덧나······.
코를 훌쩍이다 방문 너머로 외쳤다.
“그래도 맛은 꿀맛이네요!”
“그럼요! 우리가 이제 그쪽보다 요리 잘해요!”
슬픈 일이다.
“그러니까 아재는 분발하라고!”
“넌 칼질만 거들었잖아.”
“유헌 씨! 큰소리 내시면 목 더 아파요!”
“아, 예.”
조용히 식사를 재개했다.
문득 생각이 나서 창을 열고 메시지를 썼다.
[같은 집에 있는데 메시지를 보내다니 이상하네요.]
띠링.
알림음이 울리며 금방 답장이 왔다.
[생각해보니 메시지나 통신하면 되는데 왜 소리를 질러? 탱커 아재 바보 아니에요?]
[아픈 사람이잖아. 냅둬.]
“아니······.”
쇄도하는 메시지를 허망하게 읽어내리다 창을 껐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서야 돌아왔다.
“뭡니까? 그 방독면은?”
침대를 둘러싼 방독면 무리를 의아하게 둘러보았다. 임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 건 특수 효과 붙은 가면이에요.”
“아니, 그거나 그거나······.”
“헤헤, 이게 항균 효과가 있어서 감기 균도 99% 막아준대요.”
“자자, 누워있으라고요. 우리가 다 알아서 간병호, 아니 병간호해줄 테니까.”
최요환이 호스를 덜렁거리며 내 어깨를 내리누른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외양이다.
순하거나 뾰족하거나.
인상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어째 집안에 강도라도 들이닥친 모양새다.
불편해서 쉽사리 진정이 되질 않는다.
“조영하 교관이 빌려준 거예요. 엄청 비싼 거라는데 흔쾌히 대여해 주더라고요.”
“아, 예. 제가 격리실 환자인 걸 잊고 있었네요.”
“고깝게 듣지 마요. 차에 쓰인 약초도 다 그 사람 온실에서 조달한 거예요.”
임수아가 침대 발치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어째선지 홍시현과 그녀만 흑색 가면이다.
꼭 가면무도회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
꿈.
꿈이라.
한순간에 의식이 날아가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느샌가 변화한 주위는 놀이공원.
훌쩍 올라탄 나폴레옹의 백마는 알고 보면 회전목마였다. 장난감 말은 잘 가다가도 불시에 훅 떨어졌다.
방에 돌아오면 모든 소음이 느리게 들렸다.
“아재― 못― 움직여서― 심심하겠네―.”
“그러게요― 누워서라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사방에서 오가는 눈길이 섬뜩해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전 됐습니다. 여러분끼리 노세요. 제가 지금 열이 38도라서··· 이상한 환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꾸물거리며 흐려졌다.
공기가 후덥지근해 땀이 나고 목이 말랐다.
“놀이공원······.”
“응―? 뭐라고요―?”
인형 탈을 쓴 마스코트가 얼굴을 쑥 들이민다.
그사이 다른 동물들은 저들끼리 뛰노느라 바쁘다.
서로 손잡고 방안에서 원을 그리듯 돈다.
“감기는 싫어―. 에취, 에취―.”
“이불 없이 그냥 자도 안 돼요―.”
“사우나에 땀 뻘뻘 힘들어―.”
신명 나는 돌림노래가 귓가에 반복해서 맴돈다.
선율이 묘하게 익숙한데.
설마 이걸 자장가라고 불러주는 건 아니겠지?
“······.”
전부 감기 때문이다.
병세가 깊어져서 헛것을 보는 것이다.
열이 나고 아파서 제정신이······.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그들이 내게 뛰어왔다.
“일어나세요, 유헌 씨!”
“그쪽도 같이 놀아요.”
“근데 검사 아재는 왜 안 온 거야?”
“알 게 뭐야. 이렇게 재밌는데.”
그들이 양 사방에서 내 어깨를 흔들어댄다.
어떻게든 나를 관람차로 끌고 갈 셈이다.
이왕 왔으니 높은 곳에 올라가 서울 구경이나 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격변 터진 지가 언젠데 서울 타령이야?
“아, 그만. 쿨럭··· 그만 좀 하라고요.”
귀를 틀어막고 사지를 버둥거렸다.
급한 대로 없는 사람이라도 부르며 구조를 요청했다.
“으으으··· 공성현 씨, 이 캐릭터들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안 와요! 안 와!”
“그 사람은 놀이공원에 별로 관심이 없나 보죠.”
동물 마스코트들이 사나운 형상으로 낄낄거린다.
그들은 이제 나를 숫제 끌어내릴 작정이었다.
영차, 어기영차.
추임새까지 맞춰 가며 아주 열심이다.
“큭, 젠장······!”
손길을 피해 침대 헤드로 기어 올랐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에는 양 발목이 붙들려 질질 끌려갔다.
놀이공원 안쪽.
휘황찬란한 불빛이 회전하는 테마파크로.
“안 돼, 여러분 저 좀······!”
멀어지는 일행들에게 팔을 뻗었다.
그들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논의 중이었다.
“조영하 교관이 약초잎 하나 잘못 줬대요.”
“네? 그게 무슨···.”
“몰라요. 무슨 환각초가 섞여 들어갔다고······.”
“어? 그럼 아재―.”
순간 픽 꺼지듯 의식이 암전되었다.
***
“그만, 롤러코스터는 이제 그만······.”
잠꼬대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주위를 살피면 방안이 온통 조용했다.
방문객들은 벌써 돌아간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무슨 꿈자리가 이렇게 뒤숭숭하냐.”
기묘한 꿈이었다.
자유 이용권 끊은 김에 2차, 3차까지 끌려다녔으니.
반복되는 회전목마 배경음이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삐리리··· 삐리리리··· 하는 그거.
하여간 지독한 마스코트들.
놈들은 나를 물고 늘어지며 기구나 먹거리를 권했다.
꿈과 희망을 듬뿍 맛보기 전까지는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나.
덕분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발가락 하나 까딱일 기운도 남지 않은 상태다.
이대로면 내일 약속은 기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홍시도 집에 갔나?
궁금해져서 빼꼼 열린 문틈을 힐끔거렸다.
아쉽게도 내 짐작이 맞았다.
부엌이 텅 비었고 싱크대도 말끔했다.
“······.”
외롭네.
머리를 다시 베개에 뉘었다.
어느샌가 뺨 언저리에 수건이 흘려내려 있었다.
그걸 주워다 축이려 했으나 대야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귀찮으니 됐나.
탁자에 수건을 던져놓고 눈을 감아버렸다.
이마에 팔을 올리니 차가운 맨살이 닿아 훨씬 나았다.
“으음······.”
습기를 머금은 감각이 둔해질 즈음이었다.
안면에 싸한 기운이 퍼져서 실눈을 떴다.
그 순간 거무스름한 물체가 휙 사라졌다.
“······?”
잠결에 포착한 형체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다.
살랑이는 모양새가 인형 탈 꼬리와 비슷하기는 했다.
새카만 털로 뒤덮여서 걸을 때마다 씰룩이는 꼬리.
디x니 마스코트 중에 저 정도로 꼬리가 긴 녀석이 있던가?
스치듯 의문이 들었으나 곧 만사가 성가셔졌다.
상념을 지우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간 열이 내렸는지 기분이 한결 편안했다.
이번 꿈은 어두운 객석이었다.
앞자리 동물들이 속속들이 나를 돌아본다.
“벌써 지친 건 아니겠죠, 아재?”
“아직 더 놀아야죠.”
“헤헤, 저희가 한 분 더 불러왔는데.”
“저기 올라가서 열어 봐.”
그들이 하나 되어 무대를 가리킨다.
조명이 밝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마술 쇼를 위한 상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거······.”
상자에는 구멍 세 개가 뚫려 있었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래.
비행사가 왕자에게 그려주었던 상자처럼.
그렇다면 이 안에 든 동물은······.
퍼더더덕―
상자를 열자 까마귀가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놀라서 물러나면 새들이 깃털을 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까악, 까악···
불길한 울음소리가 창밖으로 멀어진다.
그제야 나는 상자에 든 동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보아 뱀?”
어린애가 낙서로 그린 듯한 종이 뱀이었다.
물감으로 색칠한 비늘이 칙칙한 데다, 무얼 삼켰는지 등허리가 불룩 솟았다.
그때 녀석이 콩알 눈을 떴다.
나를 무섭게 꼬나보더니,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든다.
쐐애애액······!
“―헉.”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났다.
목에 흥건한 식은땀을 닦아내며 시계를 확인했다.
7시.
창밖이 화사하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하아··· 정말.”
휴식을 취하는 내내 이상한 꿈만 연달아 꾸었다.
그래도 하루를 통째로 희생한 덕인지, 지독하던 감기 기운이 말끔히 가셨다.
흐음.
이 정도면 약속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를 벗어났다.
부엌에 들어서면 냉장고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우리가 아침도 챙겨놨어.」
홍시현의 글씨체였다.
“나 참······.”
덕분에 새날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늦지 않게 외출에 나섰다.
“······그래서 말이야. 다 같이 특급 쉐프 요리에 버금가는 가정식을 먹었다고. 그런데도 당신은 코빼기도 안 보인 게 말이 되냐?”
레스토랑 앞에는 공성현과 나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늦어져서 홍시현과 텔레포트를 타고 온다고 했다.
“어? 듣고 있냐? 어디 변명이 있으면 해봐라.”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찌르면 녀석이 입을 열었다.
“바빴어.”
“던전 세 받아먹는 놈이 바쁘긴 얼어 죽을. 당신은 동료가 성소에 입원해서 다 죽어가도 모를 새끼야.”
“······.”
녀석의 낯짝에 일순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서렸다.
늘 그랬듯 '이 새끼, 저 새끼' 친근하게 불러서 불만이겠지.
그러던 녀석의 표정이 순간 오묘해졌다.
“중간에 잠깐 들르긴 했어.”
“뭐? 언제?”
당황해서 물었지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연히 전방만 응시할 뿐이다.
머잖아 정면에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오, 아재들 저깄네.”
최요환을 필두로 일행들이 다가왔다.
임수아가 딱 질색이라는 얼굴로 사정을 밝힌다.
“미안해요. 최요환 기다리느라 늦어서.”
“헤헤··· 아이템 처분이 좀 오래 걸려서요···.”
문예린도 머리를 헝클이며 미안한 티를 냈다.
그에 질세라 최요환도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한다.
“원성이 자자하니까 오늘은 내가 쏘는 걸로 하죠. 콜?”
저럴 때면 차마 질책도 못 하겠다.
“콜. 쏘는 김에 맥주까지.”
“우와. 점심부터 아주 미쳤네요?”
최요환이 기겁해서 눈을 위아래로 흘긴다.
그야 젊은이 기준에선 상식 밖이겠지.
“낙원에서 봤잖아. 나 정도면 양반이야. 그리고 오늘은 지상력 기준으로도 휴일이라고.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모르냐?”
“아니··· 요새 그런 걸 누가 신경 써요?”
희희낙락 떠드는 일행들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문득 입구에 달린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올드맨 인 원더랜드’
글자 위에 조각된 금속 장식이 특이했다.
놀이공원 단면도를 재현한 그림인데, 바람이 불면 관람차를 닮은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아갔다.
끼릭··· 끼릭···
낡은 향취를 불러일으키는 소리.
불현듯 계절이 실감 났다.
이맘때면 문예린이 담요를 꺼내고, 환절기에 약한 이들은 나처럼 감기에 걸리고······.
“그거 압니까? 격변 전에 만화책 마니아들 사이에서 돌던 얘긴데,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대요.”
농담을 던지자 일행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콜록’ 하고 기침을 터뜨렸다.
“뭐야, 검사 아재도 감기 걸렸어요?”
“······.”
입을 가린 공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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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헌: 애초에 말이야, 시스템 관리자 선에서 감기를 삭제한다든가. 백신을 무료 배포한다든가··· 그런 건 안 되는 거냐?
인도자: 그럴 필요가 없지. 여태껏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감기로 사망한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으니까.
신유헌: 아니, 죽을병이야 아니더라도··· (한숨) 걸리면 힘들잖아? 가까운 사람한테 옮기기도 하고.
인도자: (냉소) 그게 본 의도니까. 시스템에서는 감기를 대표적인 전염병 실험군으로 설정했다. 적절한 백신이 부재할 경우, 바이러스가 어떤 식으로 확산하고 어떤 단계로 변이하는지 그 추이를 기록하지.
신유헌: 아··· 그럼 이것도 후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거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이주하면 단순 감기도 슈퍼 울트라 돌연변이화 해서 독감보다 지독해질까 봐. 그래서 게임 판타지 세계에서 실험하는 거잖아?
[SYSTEM: 데이터 검열 삭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도자: 잘 알고 있군. 이해했는데 왜 묻는 거지?
신유헌: 어차피 우린 망했으니까. 그럴 바에야 감기 없애고 지금 잘 살자 싶어서.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도자: ······.
인도자: 네게 시스템 권한을 인도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SYSTEM: 음성 기록 재생을 종료합니다.]
- 작가의말
[SYSTEM: 음성 기록 재생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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