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기사는 2회차에도 세계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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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38
작품등록일 :
2022.10.0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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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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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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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3 - 유리병 속의 낭만

DUMMY

그것은 어느 한여름 밤의 기억.

꺼지지 않는 반딧불에 관한 이야기다.


***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모습을 감췄을 무렵.

사냥을 마무리한 우리는 가까운 마을로 귀환하던 차였다.


숲 한가운데서 갑작스럽게 비를 만났다.


“저기 동굴이 있어요···!”

“다들 이쪽입니다!”


저마다 후드나 망토를 뒤집어쓰고 진흙을 찰박이며 달렸다. 부연 시야가 흔들리며 동굴 입구가 점차 가까워졌다.


‘여긴······.’


문득 기억을 떠올리며 동굴을 올려다보았다.

암벽 아래로 들어가면 갑옷을 세차게 때리던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이후로는 차례차례 결승선을 통과했다.


“와··· 씨, 간만에 운동 좀 했네.”

“이 동굴 아는 사람 있어요? 이왕이면 비를 피할 만한 안전지대면 좋겠는데.”


다른 이들이 벽을 짚고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지도 창을 띄운 임수아가 나를 콕 집어 흘끔거린다.


푸른 빛이 드리운 얼굴은 물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까지 온통 비에 젖은 상태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머리칼을 떼어낸다.


“그쪽은 뭐 아는 거 없어요?”

“예?”

“알만한 사람이 그쪽뿐이라서요.”


기가 막히는 추리다.

어깨를 으쓱하며 공성현을 가리키면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왔다.


“저쪽은 왜요?”

“아뇨, 그냥. 그 부분에 대해선 공성현 씨가 저보다 훨씬 빠삭할 것 같아서요. 남의 역사나 들춰보는 시간 여행자 녀석이니까.”


공성현을 툭 치면 무릎반사처럼 대답이 돌아왔다.


“난 모르는 장소야.”

“당신은 왜 매사에 도움이 안 되냐?”


괜한 핀잔을 주며 젖은 머리를 흔들었다.

빗물이 흥건한 검날을 갈무리하고 먼저 동굴 안으로 향했다.


“안심하세요. 여긴 안전지대니까.”


이 장소는 이미 몬스터가 없어진 지 오래다.

당시에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리스폰이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특정 지점은 아예 길이 막혀있다.

튜토리얼이 시작되면 출발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벽이 닫히니까.


“누구 안 젖은 장작 있는 사람? 앞이 캄캄해서 횃불이 필요한데요.”


말해두지만, 내 ‘라이트 세이버’는 달빛을 담아 시퍼렇다. 얼굴을 비추면 공포 영화 조명이 따로 없다.


그런 장면을 연출하긴 싫었다.


“음··· 유헌 씨 ‘화염 대검’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아, 그러네요.”


오늘 밤은 특히나 그랬다.


***


이 동굴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저 아재 왜 혼자 궁상떨고 있어요? 또 야식 까먹을 생각 중?”

“냅둬. 오늘은 고기 많잖아.”


귓가로 날아든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고개를 들면 임수아가 까불대는 최요환을 억지로 앉히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모닥불 주위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헤헤··· 따뜻하다. 장작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죠?”

“예린 씨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밖은··· 그치려면 아직 멀었겠죠.”


임수아가 아득한 눈길로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온통 정적과 어둠뿐이었다.

세찬 폭우조차 소용없이, 암흑이 빗소리를 모조리 삼켜버렸다.


사위가 고요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더욱 심란해졌다.

자꾸만 그때가 떠올랐다.


“젖은 땔감으로 불을 피우기는 성가시니까. 이편이 낫겠지.”


공성현이 모닥불을 들쑤시던 불쏘시개를 내려놓았다. 입으로는 그리 말하면서 눈으로는 다른 소리를 지껄였다.


‘와서 앉지 않고 뭐 하냐’는 의미다.

하여간 저놈의 감시자는 시건방지지 않은 구석이 없다니까.


털썩.


보란 듯이 옆자리에서 앉아서 녀석에게 눈을 흘겼다.

이건 ‘신경 끄고 시선을 깔라’는 뜻이다.


“오, 잠깐만. 진짜 출출한데? 불 피운 김에 사냥한 고기나 구워 먹죠?”

“앗, 그럼 저한테 좋은 게 있어요. 여기 서바이벌 생존 요리책이······.”

“예린 씨··· 그거 요리 스킬 올려주는 스킬책은 맞는 거죠?”

“으으음, 이거 유헌 씨가 추천해 주신 책인데요···.”


또다시 내게 관심이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아주 태연자약하게 싱긋 웃었다.


“네, 맞습니다. 그거 무지하게 유용한 책이거든요.”

“헹, 스튜 원툴 기사가 하는 말이라 못 믿겠는데. 그래도 내용은 함 보죠?”

“어디, 어디······.”


다들 문예린의 어깨에 들러붙어 책을 나눠본다.


팔락,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냈다. 일행들은 ‘이거 먹자, 저거 먹자’ 하며 재료를 꺼낸답시고 난리였다.


딱 한 명.

남들 관심사에 끼지 않는 녀석만 이상행동을 보였다. 이쯤 되면 그 이름을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뭐하냐?”


대신 별생각 없이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닫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동요를 감추는 데 서툰 모양이다.


“지형. 내가 모르는 장소인데 익숙하군. 내 추측이 옳다면······.”


천장을 살피던 예리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녀석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자체가 고역이라 익어가는 요리만 구경했다.


“비슷한 곳을 ‘겪은’ 적이 있어. 그 동굴은 당신도 가본 적이 있을 텐데.”

“공짜로 그만 쳐다봐라, 사람 얼굴 뚫린다. 아님 돈을 내든가.”

“타인의 트라우마를 멋대로 들여다볼 때는 아무렇지 않았으면서.”


정곡이다.

역시 나는 이 자식이 싫다.

그런 의미로 아니꼬움을 담아 웃어주었다.


“남 일이잖냐. 남남, 이 자식아. 내 일이랑 같냐?”


녀석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화를 냈다.

나야 웃는 얼굴로 욕하는 데 도가 텄지만, 일행들도 그걸 간파할 만큼 나를 알았다.


“둘이 갑자기 왜 싸워요? 그쪽은 무슨 동굴 멀미하는 것도 아니고.”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되셨는데요···. 혹시 또 감기인가요?”

“아뇨, 쌩쌩합니다. 그냥 비 맞아서 그래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고 모닥불로 손을 뻗었다. 노릇노릇 잘 익은 만화 고기를 집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깃세 안 냈는데.


“아니, 왜 남의 고기를 막 가져가고 그래요? 자기 걸로 구우라고, 자기 거!”


알고 보니 최요환 몫이었다.


“음, 참나. 네 거 내 거가 어딨냐? 먹는 사람이 임자지. 사냥도 다 같이 했잖아. 파티는 일심동체.”

“와··· 진짜 기적의 논리네, 저거.”


탄식하는 최요환을 보니 절로 실소가 터졌다.

결국 심통 난 녀석에게 내 몫의 날고기를 넘겨주었다.


“됐으니까 고기나 구워라, 이 세상 물정 모르는 행복한 녀석아.”

“뭐요? 방금 욕한 거 같은데?”

“아니, 안 했어. 우리 분위기 으스스한데 무용담 얘기나 할까요?”

“므요음으으? (무용담이요?)”


문예린이 땡그래진 눈으로 반문한다.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리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다만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해서 중간에 임수아가 나섰다.


“한여름 밤, 이름 모를 동굴, 비 오는 날. 그러면 보통 괴담 얘기하자고 하지 않아요?”

“음, 그러게. 공포 특집이 대세지 않나?”


하하, 요즘 젊은이들이란.

이럴 때만 눈치가 없다니까.


“오늘 처음 밝히는 거지만 전 무서운 이야기 싫어합니다. 겁도 많고요. 괴담의 ‘괴’자만 꺼내도 뛰쳐나가서 집에 갈 겁니다.”


듣던 이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기를 입에 넣던 문예린마저 배신당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흠흠, 헛기침하며 엄숙하게 팔짱을 꼈다.


“농담입니다. 하지만 전 집에 가는 길을 알죠. 비 맞는 것도 썩 나쁘진 않고요.”

“······그쪽이 이상한 헛소리 할 때마다 진심으로 걱정돼요. 그쪽 멘탈이.”

“무용담 하자니까요? 무용담.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 곳곳에서 한숨을 쉰다. 결국에는 임수아까지 못 말린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우리끼리만 아는 암묵적인 신호.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소리다.


다행이었다.

나야 비운의 과거를 새로 쓰는 데는 선수니까.


“실은 말이죠. 이 동굴은 제가 초심자 때 우연히 들어왔던 던전입니다. 저기 저 방에서 트롤 부대를 혼자 상대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냐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상, 진실 혹은 거짓이었습니다.”

“오, 뭐야. 진실? 아님 거짓?”

“뉴비 때부터 머리 엄청 잘 쓰셨네요···.”


관객 호응도 물론 바라던 대로다.


“초창기부터 영웅의 자질이 충만했다고 해두죠.”

“······신유헌.”


이제 공성현만 동굴에서 쫓아내면 된다.

산성비로 추정되는 액체가 가차 없이 두피를 공격하는 위험한 바깥으로.


“질문 안 받는다. 됐고, 비 그쳤는지나 확인하러 가보죠?”


나 정도 되면 혼자서도 악몽을 이겨낼 수 있다.


***


편리한 버릇이다.


타인의 고민은 솔선수범으로 해결해 줄 것.

내 문제는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않을 것.


자타의 희생과 동반하는 죄책감을 감수할 것.

혼자서 외롭게 모두 끌어안을 것.


그것이 영웅이 사는 방식이다.


***


비는 말끔히 그쳤다.

폭우가 들이닥쳤던 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제가 빌었거든요. 빨리 좀 그쳐달라고. 어쩌면 시스템 관리자 놈이······.”


[SYSTEM: 데이터가 검열 삭제되었습니다.]


“뭐라고요?”

“······검열 빡세다고요.”

“뭔 소린지 1도 모르겠다.”

“모르면 됐다.”


바스락거리며 풀숲을 헤쳐 나갔다.

미리 지도를 봐둔 덕에 지름길을 택했다.

정해진 인도(人道) 말고도 길이 있냐고?


당연하지.

노련한 플레이어는 무릇 오픈 월드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기를 택하는 법이다.


다만 불평은 피하지 못했다.


“편한 길 뻔히 놔두고 꼭 이리로 가야 해요?”

“수아 씨도 아까 지도 보셨잖아요. 이 길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애써 일행들을 달래며 선두로 걸었다.

최요환은 고양이 풀을 꺾었다가 문예린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생명을 소중히 하세요. 식물도 아픔을 느낀다구요!”

“아니 뭐, 또 자라겠죠. 아닌가?”


맨 뒤에서 둘이서만 투닥투닥.

아주 달짝지근하게 연애질을 해댄다.


혀를 차며 우거진 수풀로 발길을 내디딘 그때였다.


위이이잉······!


풀 사이에서 날벌레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 누군가가 등에 부딪혔다.


임수아였다.


“진짜. 놀랐잖아요. 그렇게 갑자기 멈추면―.”

“음, 죄송합니다. 저도 놀라서 그만···.”


짜증을 내던 임수아가 일순 조용해졌다.

반응이 의아해 뒤돌아본 나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온 밤하늘을 수놓은 반딧불이 정령.

불빛 하나하나가 모여 은하수와 같은 장관을 이루었다.


“와······.”


문예린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꾸밈없는 목소리가 내 감정 또한 고스란히 대변해 주었다.


“한 번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두가 넋 놓고 시선을 빼앗긴 순간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본 적은 없었는데.”


반딧불이의 출현은 나도 처음이었다.

시작 마을 주변이라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숲을 탐험하자고 한 장본인이 나였다.

끽해야 한두 자릿수 레밸대 사냥터에서 희귀 업적을 달성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귀 업적 달성하게 해드릴 테니까 다들 저만 따라오세요.」


표적은 한밤중에만 등장하는 이벤트 몬스터였다.

그렇다면 이 또한 시간 한정 이벤트일까?


“그쪽··· 혹시 알고 이리로 오자고 한 거예요?”

“아뇨. 몰랐습니다, 저도.”


임수아가 말을 걸며 다가왔다.

금속 부츠로 감싸인 무릎이 다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가는 잎새가 목 안쪽에서 살랑이는 것 같다.


이런 걸 낯간지러운 감정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북받치는 설움인가?


난 지금 괴로운 건가?


“처음에 왔을 때는 낮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낮보다 밤이 덜 무섭네요, 여긴.”

“뭔 소리예요, 그게?”

“저 트롤한테 죽을 뻔했다고요, 그때.”


제 앞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눈앞에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전 그걸 전부 봤어요.

엎드린 채로.


다른 생존자들처럼 비겁하게 죽은 체하며.


고백하지 못한 진실이 목구멍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와 반대로 꽉 쥐었던 주먹은 스르르 풀려버렸다.


인간의 몸뚱이란 솔직하다.

안도하면 힘이 빠져서 다리가 꺾일 것 같다.

눈시울이 뜨겁고 자조적인 웃음이 난다.


나를 구했다.

자신을 살렸기에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없이 되풀이한 다짐으로 긴장을 떨쳐냈다.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전 태생이 나약한 겁쟁이거든요. 트롤 부대, 그거 그냥······.”


영웅이 아닌 신유헌의 승전은 늘 그랬다.


“얼떨결에 살아남았던 겁니다. 전 운도 별로고. 실력도 형편없었고. 그냥··· 명줄만 튼튼했던 것 같으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으니 후련했다.


“그러니까 제 허언에 속았다고 하지 마세요. 창피합니다.”

“뭘요. 그럴 줄 알았어요.”


어깨를 툭 치는 주먹이 싫지 않다.

그 이상 캐묻지 않는 습관도 고마웠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격변 후 세대라도 싸움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니까.


누구라도 처음에는 나약하다.

미약하게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허술하고, 덜떨어지고, 모자라고.

한없이 부족한 채로 괴물과 맞선다.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강해지기를 택한 플레이어이므로.


“오, 이거 기념품으로 팔아도 되겠는데? 거기 커플, 이거 봐요―!”

“커, 커플? 아니, 그보다 정령을 팔겠다니···!”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산통을 깨고 들어왔다.

임수아와 쓴웃음을 교환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엇으로 그리 소란인가 했더니.

최요환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유리병이 범인이었다.


“물약 담는 통 아냐. 쓰레기로 뭐하냐?”

“뭐긴 뭐겠어요? 한번 보라고, 내 작품을!”


녀석이 제 유리병을 자랑처럼 보여주었다.


손안에 쏙 들어갈 크기의 작은 병.

그 안에 아직 덜 여문 반딧불이 정령이 들었다.


내가 비밀 친구와 한눈 판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도적다운 손놀림으로 슬쩍한 모양이다.


“대체 뭘 하나 했더니···.”


고 작은 것이 영롱한 빛을 내뿜으니.

그야말로 급조한 수제 랜턴으로 손색이 없다.


“이거 정령 학대다. 압수.”

“아, 갖고 싶으면 자기 걸로 하라고요!”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유리병을 뺏어 들었다.

막상 손에 넣고 보니 예쁘긴 예쁘다.

수집가의 물욕을 당길 정도는 된다.


“갖고 싶긴 뭐가 갖고 싶어. 불쌍하니까 풀어주자는 거지. 암만 굶주린 낚시꾼이라도 잡은 고기가 새끼면 방생하는 법이거든.”


코르크를 뽑아내고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반딧불이가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른다.


“다음엔 잡히지 마라.”


흩날리는 빛의 궤적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툴툴거리는 최요환에게 유리병을 돌려주려다 순간 멈칫했다.


‘이거······.’


유리병 안에 빛 가루가 남았다.

입자가 어찌나 가벼운지 그 안에서 둥둥 떠다닌다. 꼭 반딧불이가 잔상을 남긴 것만 같다.


좋은 일 하니 희귀 아이템이 절로 생겼다.


“이거 나 주라.”

“아, 예. 아재 마음대로 하세요. 나도 똑같은 거 만들 테니까.”

“어, 고맙다.”


코르크 마개를 끼우고 입을 싹 닦았다.

쓱쓱 문질러 광을 낸 유리병을 임수아에게 내밀었다.


“이거 랜턴 대용으로 가지세요.”

“그쪽은··· 최요환이랑 나이 차가 몇인데······.”


이쪽에서 잔소리가 나오니 저쪽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최요환 씨, 자꾸 그러면 저 진짜 실망할 거예요.”

“아니 아니, 농담이거든요? 나도 풀어주려고 했었다고.”


피식거리며 유리병에 줄을 매달았다.


“이런 것도 추억이니까요. 기념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시죠.”

“에휴, 정말······.”


막무가내로 우긴 끝에 랜턴을 떠넘기는 데 성공했다. 임수아의 허리춤에서 달랑이는 유리병이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공성현을 방해할 여유가 생겼다.


“뭘 그렇게 열심히 감상하냐? 그만 가자. 여기서 노숙할 거 아니잖아.”


녀석은 우리가 정신 사납게 굴든 말든 밤 구경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조차 새벽이 다가오면 무색해지는 모양이었다.


“가지.”


곁을 지나쳐 가는 발길이 무심했다.

그 어떤 미련도 망설임도 들지 않는다는 듯이.

역시 이 녀석은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순간’에 매료되었던 주제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멈추지도 않겠지만, 뭐··· 인간 입장에서 그걸 알 턱이 있겠냐?”


우린 그저 체감할 뿐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흐르는 것이고, 눈앞이 정지한다면 멈춘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정의한 시간이다.


“······.”


공성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생략한 뒷말을 아는 것처럼, 불필요한 대답 따윈 하지 않는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녀석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내 버릇에 익숙해졌을 터다.


“우린 운명 파괴자 동지잖아. 난 오늘 과거를 바꿨다고.”


유리병 속의 낭만을 선물했다.

꺼지지 않는 불빛은 그러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산물이다.


“악몽을 좋은 꿈으로.”


아마도 영원히 멈춰있을 순간.

어떤 장소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스스로 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쌓이기도 한다.


오랜 악몽은 아래서부터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내 시작을 궁금해하지 마라.”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전했다.

그러고 나면 발걸음이 가벼웠다.

맨 앞자리는 내 역할이었다.


뒤돌아서 일행들이 무사히 따라오는지 살피는 것도.


“다들 안 갈 겁니까?”


언제나 내 몫이었다.

만면 가득히 실실대고 있으면 사위에서 풀이 흔들렸다. 우리는 전원 가운데서 합류했다.


웃는 나를 보고 임수아도 따라 웃었다.


“가요. 어쨌든 오늘은 밤길이 어둡지 않아서 좋네요.”


벌써 저 멀리 여관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작가의말

[SYSTEM: 영상 기록 재생을 종료합니다.]

[SYSTEM: 해당 데이터를 즐겨찾기에 추가합니다.]

[분류: Momentos]


*Momentos: 기념품, 추억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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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3 - 유리병 속의 낭만 24.07.16 35 0 18쪽
269 외전2 - 32화의 두근두근 유이세 비하인드! 24.06.23 32 1 5쪽
268 외전 1 – 자나 깨나 감기 조심 23.10.07 47 0 19쪽
267 264. EPILOGUE. 당신이 모르는 공백 (3) 23.09.22 49 0 16쪽
266 263. EPILOGUE: 당신이 모르는 공백 (2) 23.09.22 3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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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261. TRUE END: 신을 구원한 영웅 (3) 23.09.12 56 1 12쪽
263 260. TRUE END: 신을 구원한 영웅 (2) 23.09.12 44 0 12쪽
262 259. TRUE END: 신을 구원한 영웅 (1) 23.09.10 37 0 16쪽
261 258. NORMAL END: 영원의 계승자 23.09.08 36 0 13쪽
260 257. BAD END: 신에게 바치는 레퀴엠 23.09.07 44 1 11쪽
259 256. Chapter 61. 데이터 검열 삭제 (2) 23.09.06 51 1 13쪽
258 255. Chapter 61. 데이터 검열 삭제 (1) 23.09.05 4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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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247. Chapter 59. 결전의 고성 (7) 23.08.29 36 0 13쪽
249 246. Chapter 59. 결전의 고성 (6) 23.08.29 37 0 12쪽
248 245. Chapter 59. 결전의 고성 (5) 23.08.28 34 0 16쪽
247 244. Chapter 59. 결전의 고성 (4) 23.08.27 39 0 13쪽
246 243. Chapter 59. 결전의 고성 (3) 23.08.26 3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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