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이 오지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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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뇽
작품등록일 :
2022.10.2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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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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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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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34

DUMMY

34.





꽤 장기간 질질 끌릴 것 같았던 힐로아의 힘에 의한 문제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되었다.


헤르초크급 가문이 세 군데나 개입한 탓이었다.


힘의 차이가 워낙 역력한 탓에 부모 쪽의 가문은 아예 손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거의 강제로 양육권 포기 각서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남은 것은 힐로아가 세 가문 중 어디에 의탁하느냐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헤르초크급 여아를 필요로 했다.


그 중에는 후계자의 약혼자가 없는 에티안 가문과 로그란 가문이 포함되었다.


다만 기존에 오가던 혼담이 있는지라, 에티안 가문이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긴 했다.


재하는 이런 머리 아픈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들끼리 해결하겠거니 넘기려 했지만, 어이없게도 그 한 켠에 끼어버렸다.




"이 아이가 그... 맞소?"


"그렇소."


"거참 신통방통하구려. 분명 그라프급인데 루힐의 그 고약한 힘에 현혹되지 않다니."


"아무래도 뛰어난 정신력을 특수성으로 타고난 것 아니겠나, 싶소. 아니면 아예 현혹의 힘에 대한 면역을 지니고 있다거나."


"호오... 그러고보니 이 아이, 헤르초크급도 아닌데 묘한 체향을 풍기는군. 어느 가문의 자손인지 의문이야."




그랬다.


재하가 어린 괴물의 시동으로 몇 년이나 버텼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 세 가문의 어르신들이 헨슨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붉은 눈동자 여섯 개가 흥미를 품고 반짝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체향이라니. 무슨 뜻이지.'




리안의 몸을 입은 이래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의문이 싹 텄다.


다만, 그것을 해결하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때마침 재하를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에티안 가문이 힐로아를 맡는 것이 낫겠다는 건 다들 납득하셨겠지? 루힐의 힘을 봉인하기 위한 술법 연구도 충분히 이루어진 데다, 현혹의 힘에 대한 저항력을 가진 시동까지 있지 않소. 응?"


"크흠... 그런 것쯤이야 우리 로그란 가문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어허. 그 말인 즉슨, 힐로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아니오? 그 아이는 지금 당장 보호자가 필요하건만."


"이보시오, 그렇게 자랑할 술법이 있다면 넓은 마음으로 공유해주지 그러시오? 우리 세리암 가문은 같은 헤르초크급 사람이라 해도 자존심 세우지 않고 순순히 가르침을 받을 용의가 있소만."


"허허, 날로 드시려는 심보가 아주 양상군자 뺨 치는구려."




허허롭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숨길 수 없었다.


세 어르신의 기 싸움을 겸한 말 싸움에 등이 터질 것 같은 새우는 재하였다.


뭘 하건 그들끼리 했으면 좋으련만, 남의 집에서 민폐를 제대로 끼쳤다.




"좋소. 이왕 이렇게 된 것, 힐로아를 불러 직접 선택하게 함은 어떠시오?"




지지부진하게 끌리던 일에 해결책을 내세운 것은 로그란 가문의 장로였다.


다른 두 가문은 조금 시큰둥했지만, 일단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힐로아는 다른 헤르초크급에 비해서 약간 아이다운 경향이 있다 했던가?'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른들의 평가에 의하면 그랬다.


어린 괴물이나 레흐, 니아신처럼 애어른이 아니라 철 없는 딤멜에 가깝지만, 그보다는 온순한 편이라고.




"힐로아에게도 자신의 거취를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암."


"이번 달에 생일이 지났어도 고작 일곱 살 짜리인데, 그 애가 뭘 안다고..."


"헤르초크급은 나이가 어리다 해서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오만."


"그 애는 그라프급의 피가 섞였으니 예외 아니오? 순혈은 아니지 않소."


"혼혈이라 해도 친부모가... 흠흠, 어쨌든 그 애의 피가 옅은 건 아니오."




로그란 가문의 가주가 혈통 이야기를 꺼내려다 재하를 슬쩍 보고는 말을 바꾸었다.


그걸 봤을 때 힐로아의 친부모에게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1학년 때 사교회장에서 얼핏 보기엔 그냥 평범한 그라프급이었는데.'




재하는 검지로 한쪽 뺨을 긁적이며 빠질 타이밍을 노렸다.


이 자리에 있어봐야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듣고 등이 터질 뿐, 이득이랄 게 없었다.


그리고 방 안의 분위기가 꼬일 것을 짐작한 것인지, 때마침 헨슨이 들어섰다.




"그럼 저희 아이와 볼 일은 끝내신 겁니까? 이만 내보내도 될런지요."


"아, 그래. 이런 자리는 애들에게 영 재미가 없지."


"다음에 또 보자꾸나."


"혹시 이직할 생각이 있다면 로그란 가문도 나쁘지 않단다. 마침 네 조부가 총괄 집사로 있지 않니."




어르신 한 분이 인자한 얼굴로 내민 명함은 헨슨이 사람 좋은 표정을 유지한 채 슬그머니 가로챘다.


그러면서 재하의 어깨를 감싸고 일으켰다.




"이만 나가볼테니 이야기 잘 나누십시오."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내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소리를 차단한 모양이었다.


헨슨은 재하를 이끌고 거실 소파에 걸터앉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살다보니 저 세 가문의 장로님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는 날도 다 있구나."




한탄하는 말이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재하는 그저 애매하게 웃었다.


부엌에서 서성대던 양어머니가 한숨과 함께 다가왔다.




"언제 가신대? 설마 식사까지 하고가셔?"


"음... 만약 식사를 하실 것 같으면 내가 밖으로 모시고 나갈게."




슬슬 눈치가 좀 생긴 헨슨은 와이프가 가족 외의 사람들까지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 없음을 인지하고 알아서 대꾸했다.


좋은 혈통으로 좋은 것만 드시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이 집에서 식사를 해봐야 반찬 투정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손님이 셋이나 끼기엔, 식탁이 4인용이었다. 의자를 끌어와 옆에 붙이더라도 총 다섯 명이 한계.


차라리 밖에 있는 맛집에 데려가 술이나 좀 사드리고, 얼큰히 취하시면 그 핑계로 가문에 돌려보내드리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어르신들은 단란한 가족을 위한 식탁을 보고 대충 염치를 찾으신 듯, 알아서 외식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육회도 괜찮지. 에테르를 먹여 키운 소는 육질도 남다르거든. 거기에 술 한 잔 크으-."


"난 날고기는 안 먹네. 어디 야만적이게 익히지도 않은 날고기를."


"이래서 촌구석 샌님들하고는 상종을 말아야지. 육회는 그냥 날고기가 아니거늘. 입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을 몰라."


"뭐라? 촌구석? 이 야만인 노친네가 지금,"


"아, 촌이고 도시고 뭐고 간에, 싸우지 말고 뭐 먹을지나 결정하게. 난 구이집도 좋거든. 이 근방에 새우 구이집이 있지 않던가? 아니면 조개 구이도 괜찮고, 해산물이 안 땡기면 육지 고기도 나쁘지 않네. 진득하게 붙어서 먹을 거면 남부식 정찬도 나쁘지 않고."




뭘 먹을지 토론하며 현관 앞에 선 그들은 구두에 대충 발을 구겨 넣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헨슨, 자네는 같이 가서 한 잔 하지?"


"예, 어르신들. 모시겠습니다."




소란스러운 세 어르신과 헨슨이 빠져나가자, 집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방에 콕 박혀있던 실렌이 그제야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후, 무슨 일로 오셨던 거래?"


"뭐... 힐로아가 세 가문 중 한 곳에 의탁할 건가봐."




이 정도는 말 하지 않아도 소문이 날 것 같아, 숨길 필요없이 꺼낼 수 있었다.


실렌은 '힐로아?'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옆에 앉은 재하에게로 머리를 기울였다.




"킁킁. 이거 무슨 냄새지... 너 샴푸 바꿨어?"


"아니. 무슨 냄새 나?"


"응. 냄새 좋다. 샴푸가 아니면 바디워시를 바꾼 건가?"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그녀의 모습에, 재하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나며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싶어 소매를 들고 코를 가져다댔지만, 스스로의 냄새에 적응한 탓인지 따로 느껴지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말도 그렇고, 체향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원인을 꼽는다면 아마도 회중 시계 속에서 나온 그 구슬일까.'




그러고보면 그것을 만지고, 반지의 무의식 세계에 다녀온 이후로 에테르의 운용이 조금 유연해진 느낌이었다.


또, 그 이후로 회중 시계에 대해 느끼던 기묘한 애착이 사라진 점도 변화라고 한다면 변화일 터였다.


아마 리안의 본능이 시계 속에 들어있는 구슬을 감지한 게 아니었을까.


재하는 확신할 수 없는 생각을 묻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



힐로아의 거취 문제가 어떻게 논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론적으로 학교에 끼치던 기묘한 영향은 사그라들었다.


근거없이 그녀가 자신의 동아리에 들어오리라 믿던 E.O.E 동아리 아이들도 현실 파악을 제대로 했고.


재하는 입부 시험 준비로 정신없는 그들의 모습을 일별하고 자판기 앞에 섰다.


그간 알게 모르게 홀렸던 아이들이 제 정신을 찾으면서, 학교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다.


동아리 모집 기간에 항상 그랬듯, 폐부를 앞둔 동아리의 아이들은 소란스럽고 학생부는 골치 아파했다.


재하는 캔을 뽑아 손에 들고, 휴대폰 갤러리를 살폈다.


얼룩덜룩한 메모지에 적힌 'B13-7'라는 글자.


어제 저녁에 몰래 어른의 모습으로 시체가 발견되었던 곳 근처의 역에서 물품보관함을 찾아보았지만 이런 번호가 적힌 것은 없었다.


혹시 주소의 지번이나 우편 번호와 관련된 건가 싶어 검색해보아도 마찬가지로 소득이 없었다.


재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달리 쓰일만한 곳을 생각해보았지만, 기껏해야 대형마트에 있는 물품 보관함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일단 오늘 저녁에는 그쪽으로 한 번 가보지 뭐.'




딴 생각을 하느라 발 닫는 곳으로 무작정 걸은 그는 어느새 동아리 부실 앞에 닿아 있었다.


이왕 온 김에 쉬다 갈 겸 문을 열자, 평소의 어수선한 풍경과 후배 두엇이 보였다.




"어, 부회장님. 웬일이세요?"


"잠깐 쉬었다 가려고."


"평소에는 E.O.E 동아리 회장님이랑 다니시더니 ..."


"오늘 입부 시험 준비한다고 좀 바쁘대서."


"오, 벌써요? 좀 더 늦게 하셔야 저희가 부원 모집할 때 유리할텐데요."


"그러게 말이다."




갈 곳이 없어지면 부원 후보가 알아서 굴러들어올 것을 알기에, 후배들은 그야말로 나태의 극치를 보였다.


홍보지 몇 장 붙여놓고 별 다른 과정 없이 부실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매년 부원 걱정 없던 동아리라, 재하도 따로 닦달하지 않았다.


그는 부실에 굴러다니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후배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의미를 알아들은 후배가 귀찮은 듯 어기적거리며 담요 한 장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재하는 편안한 자세로 휴대폰을 살폈다.


반지가 예지를 보여주고, 스스로 어른의 모습을 오갈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는 해야할 일을 어느 정도 계획해둔 상태였다.




'이 다음 일은 메모지에 적힌 게 뭔지 알아야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텐데.'




고민에 잠겨 미간을 좁힌 그는, 부실의 문이 다시 열리는 것도 인지하지 못 했다.


사진을 띄워놓고 멀티 윈도우 기능으로 검색을 하는 사이, 살금살금 걸어온 그림자가 두 손을 뻗었다.




"웍!"


"!"




귓가에서 들려온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 재하가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붙잡은 손이 검지만 뻗은 채 뺨을 콕 찔렀다.




"짠. 예쁜 짓."


"하..."




그제야 놀라움을 지운 재하가 한숨을 쉬며 어깨에 닿은 손을 떼어냈다.




"회장,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한심한 듯 물으며 바닥을 향해 뻗은 손이 에테르를 줄기 형상으로 뽑아내어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그의 뒤에 있던 동아리 회장이 실실 웃으며 빈 의자를 찾아 재하의 앞으로 끌어왔다.




"번호 같은 거 보고 있던데 웬 거야?"


"글쎄. 나도 잘 몰라."




회장은 재하의 심란한 대꾸에 고개를 갸웃하며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를 앞으로 하여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채, 아슬아슬하게 기울여 의자 다리 두 개로 버티며 위태로움을 즐기던 그는 턱을 문지르며 '흠'하고 비음을 흘렸다.


그 낌새가 왜인지 무언가를 아는 것 같아, 재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혹시 이게 뭔지 알아?"


"음... 대충 비슷한 번호를 보긴 했지."


"뭔데?"




회장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재하와 휴대폰을 보다가, 이내 선심 쓰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바엘른 환상의 섬에 있는 물품 보관함을 구역 별로 나누는데, 시작하는 기호가 전부 B거든. 거기에 적혀있던 게 아닌가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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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33 +1 22.12.09 32 2 12쪽
32 E32 +1 22.12.08 35 3 13쪽
31 E31 +1 22.12.07 35 3 11쪽
30 E30 +1 22.12.04 37 3 14쪽
29 E29 +1 22.12.03 35 3 12쪽
28 E28 +1 22.12.02 39 2 11쪽
27 E27 +1 22.12.01 40 2 12쪽
26 E26 +1 22.11.30 36 2 16쪽
25 E25 +1 22.11.29 37 2 11쪽
24 E24 +1 22.11.28 43 3 13쪽
23 E23 +2 22.11.26 50 5 12쪽
22 E22 +2 22.11.25 46 5 11쪽
21 E21 +2 22.11.24 48 5 11쪽
20 E20 +1 22.11.23 52 4 12쪽
19 E19 +2 22.11.22 64 6 12쪽
18 E18 +1 22.11.21 66 3 11쪽
17 E17 +1 22.11.19 68 5 12쪽
16 E16 +1 22.11.18 69 8 13쪽
15 E15 +1 22.11.17 73 5 12쪽
14 E14 +1 22.11.16 80 7 12쪽
13 E13 +1 22.11.15 85 7 12쪽
12 E12 +1 22.11.14 87 6 13쪽
11 E11 +1 22.11.12 84 8 12쪽
10 E10 +2 22.11.11 87 8 12쪽
9 E9 +2 22.11.10 91 9 13쪽
8 E8 +2 22.11.09 90 9 12쪽
7 E7 +2 22.11.08 98 10 12쪽
6 E6 +2 22.11.07 118 9 14쪽
5 E5 +1 22.11.05 132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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