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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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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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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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꽃 - 6장 뱃놀이

DUMMY

<맥, 황가의 계보>






1부 황실의 꽃





6장. 뱃놀이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하였고 살갗을 스치는 미풍은 선선하였다. 주인을 잃은 한적한 궁 안에 조성된 화원은 고즈넉한 풍취가 있었다. 정오를 조금 지난가을 햇살은 다사하게 내리쪼였고, 고요한 연당의 옥빛 물 사이를 유유히 노니는 금빛 잉어는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후였다.


연향은 나룻배에 올라앉은 채 햇살 아래 한없이 푸르러 보이는 연잎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시진이 넘게 노를 잡고 씨름하고 있는 아무개의 노고를 애써 외면하려는 양.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데도 배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그가 나룻배를 타자고 하였을 적만 하여도 연향은 다음 날 자신이 문자 그대로 정말로 배를 타고만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다.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인지라 손등을 꼬집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참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더 견디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와 같은 몸치는 처음 보았다. 치맛단을 휘어잡고 뛰는 저보다도 달음박질이 느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노를 잡는 어설픈 모양새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연향은 그를 탓할 마음이 없었다. 팔각정에서 보았을 때는 언행 모두가 그린 듯 아름다워 신화 속의 천인처럼 근사하면서도 어딘지 아득하게만 느껴졌었는데, 겪을수록 허술한 구석이 많은 사내라 도리어 정이 갔다. 못하는 일에 매달려 어설픈 몸짓으로 무던히 애를 쓰는 모양새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우스워 가끔 체신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아무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근래에 연향이 얻은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 웃지 마십시오. 보기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무렴. 그대의 노고가 큰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한 자리에서 조금도 아니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배의 일부가 필시 바위 사이에 끼였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공연히 애를 쓰게 하여 내가 외려 미안하구나.”


물속에 놓고 저어야 하는 노를 허공에 대고 열심히 젓는 모양새를 버젓이 보아놓고서도 연향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볕이 한창 뜨거울 때인데 굳이 연지 가운데로 가서 무엇 하겠느냐? 마침 배 위로 나뭇가지가 무성하여 앉은 자리에 그늘이 지는 것이 외려 운치가 있으니 나는 예 있는 것이 더 좋다.”


연향은 방긋 웃으며 수파를 꺼내어 땀이 밴 아무개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닿아오는 손길에 그의 몸이 조금 굳는 듯도 하였으나 그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연향은 어른스럽게 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상하게 감싸오다가도 어느 순간 어린아이처럼 서툰 모습을 보이는 아무개가 점점 더 좋아졌다.


“이대로 있기 민망하니 비파라도 뜯어야겠습니다.”


겸연쩍은 마음에 승명은 나룻배 한편에 놓아두었던 비파를 끌어왔다. 배가 망가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연향이 오기 전에 시위를 불러 노를 젓는 법을 배워둔 승명이었다. 양손을 같은 방향으로 속도를 맞추어 저어야 한다고 한탄하듯 알려주던 시위는 결국 말로는 아니 되겠다 싶었는지 승명에게서 노를 받아 몇 번이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들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하는 것을 그라고 어찌하겠는가.


승명은 어릴 적부터 힘으로 하는 일에 도통 소질도 흥미도 없었다. 서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악기를 타는 것은 온종일도 할 수 있었으나, 활을 잡거나 검을 쥐면 일각도 견디기 힘들었다.


궁도는 몸을 닦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부황의 엄한 훈계가 아니었다면 사장(활터) 근처는 얼씬도 아니하였으리라. 연무장으로 나가 무예를 익혀야 할 때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였다. 승마도 궁술도 검술도 그렇게 십여 년을 배워 간신히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아니할 만큼의 실력을 쌓았다.


그러한 그가 고작 몇 번의 시범과 몇 마디 말로 노를 젓는 법을 익힐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연향 역시 자신이 하는 짓이 어설퍼서 웃음이 났으리라. 그러나 착한 연향은 그의 서투름을 비난하지도 놀리지도 아니하였다. 어리지만 사려 깊고 다정한 아이였다.


노를 붙들고 한 시진 넘게 진을 빼서 정신이 다 혼미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손에 익혀온 비파를 잡으니 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승명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맞춰 천천히 줄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첫소리는 아주 맑았다. 울림이 깨끗한 가락이 고요한 연당 위로 흘렀다. 좁은 소리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넓은 소리는 연지의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소리가 일어나고 스러지며 그의 손길을 따라 높고 낮은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팔각정에서 슬을 연주할 때에는 슬프고 애처로운 느낌이 강했는데, 비파의 곡조는 그저 맑고 즐거웠다. 그녀의 마음속에 깃든 설렘을 담아낸 것 같은 가락이었다. 연향은 홀린 듯이 소리에 심취하였다. 그의 곡조는 귀 기울여 듣고 싶게 만드는 깊은 멋이 있었다.


“그대는 확실히 금이나 비파를 잡는 것이 노를 잡는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이래서 사람은 어울리는 일을 하여야 하나 보다. 못하는 일을 억지로 권한 것 같아 연향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이토록 악에 능통한 그대를 벗으로 가까이 두셨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필시 악을 즐기시겠구나.”


“예. 듣는 것도, 연주하는 것도 기꺼워하십니다. 금과 비파, 피리까지 다루시지 못하는 것이 없지요.”


“나를 안내하여 주었던 여관이 영빈각 현판의 글씨도 황태자 전하께서 새로 쓰셨다 하더구나.”


“보시니 어떠하더이까.”


“서체가 물 흐르듯 유려하고 단아하여 한참을 눈여겨보게 되더구나.”


“그렇습니까.”


“어찌 그대가 흐뭇해 보이는가?”


“벗이니까요. 태자 전하께서는 그림도 잘 그리십니다. 황후궁에는 전하께서 몇 해 전에 모후의 탄연을 기념하여 병풍에 그린 산수화가 전시되어 있다 합니다.”


“그도 황태자 전하께 들었느냐.”


“궐 안 모두가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일화인데 여관이 그러한 이야기는 아니 하더이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아니하였지만 노를 젓는 일로 인하여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서 그의 심사를 달래어주고자 아무렇게나 꺼내본 이야기에 아무개가 이렇게 희색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무심하던 얼굴이 황태자의 글씨를 칭찬하자마자 확연히 밝아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개는 아무래도 황태자를 몹시도 흠모하는 모양이었다. 그와 황태자와의 교유관계가 무척이나 돈독한 듯 보여 연향은 조금 시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혼담이 오가는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싶어서 일어난 시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연향은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아무개를 통하여 황태자에 대하여 아는 바가 늘어난다면 그를 대면하는 자리가 조금 더 편해질 터였다. 그러므로 연향으로서도 이 화두를 꺼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대는 전하와 아주 가까워 보이는데, 전하께서는 어떠한 분이시냐? 내 두 분 공주님은 뵈었으나 아직 황태자 전하를 뵌 적이 없어 궁금하구나. 문명 공주께서는 음전하시고 단아하신 분이었고, 혜명 공주께서는 다감하시고 쾌활하신 분이었다. 전하께서는 어느 공주님을 닮았는가?”


“윗분들에게 예의 바르고 품행이 단정하신 점은 첫째 공주와 가깝고, 아랫사람에게는 관후하여 주위에 따르는 이들이 많은 점은 둘째 공주와 비슷하기도 하나이다. 허나 황실 내관들의 말에 따르면 언행이 반듯하고 희비가 명확하지 않은 차분한 성정은 폐하를 탁하였다 하고, 후덕하고 자상한 성품은 황후 마마를 닮았다 하더이다.”



“자애로우시고 침착하셔서 주위에 그대처럼 전하를 흠모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냐?”


“뿐만 아니라 예와 악에 능하고 학문 또한 뛰어나 서연을 맡은 관료들의 칭송도 자자하다 합니다.”


“여러 분야에 두루 통할 만큼 재주가 많으실뿐더러 성품 또한 어질고 온화하시니 도무지 흠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완벽하신 분이라는 소리가 아니냐.”


틀린 구석이 없는 소리였고 타고나기를 겸손한 성정도 아니었으나 차마 본인의 입으로 그렇다 맞장구치기는 민망하였다. 승명이 답을 주저하는 사이에 연향이 뜻밖의 평가를 입에 담았다.


“내 보기에 황태자 전하께서는 조금, 아니 많이 밉상이시구나.”


승명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밉상이라 하였다.”


그러나 연향의 입에서는 재차 같은 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밉상이라니, 그러한 평은 난생처음이었다.


“현주께서 하고픈 말을 고르지 아니하는 성정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와 같이 불경한 언사를 어찌 그리도 태연히 하신다는 말입니까. 혹여 금일의 언사가 태자 전하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몸이 태자 전하와 친분이 있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염두에 아니 두십니까?”


“하여 아무개는 내가 전하께 밉상이라 하였다고 이를 참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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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황실의 꽃 - 14장 번왕비 소선경의 고뇌 +1 22.11.14 31 1 12쪽
13 황실의 꽃 - 13장 번왕 대수협 22.11.13 20 1 9쪽
12 황실의 꽃 - 12장 번왕 대수협 22.11.12 22 1 10쪽
11 황실의 꽃 - 11장 흐르는 물처럼 22.11.11 26 1 12쪽
10 황실의 꽃 - 10장 국혼선포 22.11.10 22 1 9쪽
9 황실의 꽃 - 9장 회자정리 거자필반 +1 22.11.09 25 2 14쪽
8 황실의 꽃 - 8장 그림에 깃든 마음 +3 22.11.08 30 3 12쪽
7 황실의 꽃 - 7장 고백 아닌 고백 22.11.07 28 2 11쪽
» 황실의 꽃 - 6장 뱃놀이 22.11.06 36 1 10쪽
5 황실의 꽃 - 5장 영수전의 석교 위에서 22.11.05 42 1 15쪽
4 황실의 꽃 - 4장 황태자 승명 22.11.04 47 2 10쪽
3 황실의 꽃 - 3장 팔각정에서의 만남 22.11.03 61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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