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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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공
작품등록일 :
2022.11.05 01:27
최근연재일 :
2022.12.16 21:31
연재수 :
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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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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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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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6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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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분이면 충분하다(2)

DUMMY

골을 넣은 28번은 요란한, 혹은 격렬한 세레모니 같은 것 없이 차분하게 그냥 뒤로 복귀했다.

물론 자기 진영으로 복귀하면서 공중볼을 따낸 엔리코와, 세컨드 볼을 따내 자신에게 연결해준 귀도에게 박수와 엄지를 들어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데뷔골을 넣은 녀석에게 달려가 마구 축하를 해주려던 선수들이, 정작 그 골을 넣은 선수가 너무도 담담하게, 마치 별 것 아니었다는 것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들이 조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엔리코 역시 뒤에서 달려가 민우의 뒷통수를 때리며 격하게 축하를 해주려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민우의 아주 작은 세레모니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저 양 손을 조금 들고, 검지를 세워 하늘을 보는 민우.


‘아, 저 녀석. 그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지.’


다른 팀원들도 민우의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상대가 센터서클에 공을 가지고 오기까지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 기립박수.

결국 민우는 그 팬들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반대편 터치라인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마르코는 다른 선수, 스태프들이 아주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그냥 박수를 치며 방금 전 그 골 장면에서 느낀 어떤 기시감에 대해 잠깐 떠올렸다.


‘이상하네. 왜 꼭 전에 저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지?’


그런 엉뚱한, 하지만 정말로 그랬던 이상한 느낌을 뒤로 하고, 일단은 선수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격려했다.



시즌 홈 첫 경기라 모두 관중석 한 자리를 받아 경기를 관전하고 있던 베네치아의 유스 선수들.

그중에서도 민우와 경기를 뛰어본 선수들은 저마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히 저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진심으로 박수를 쳐줬다.

크리스티안은 자신과 민우가 맨날 서로 욕을 하고 싸우는 것 같아도 결국 오데르조에 있었던 그 나날 속에서 진심으로 축구를 잘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던 것은 자신과 민우 단 둘 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발심에 같이 대들고 싸우기는 했지만, 그도 속으로는 민우가 정말로 자신의 앞날까지 바꾼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민우가 오데르조에 오지 않았었다면······.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어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저었다.


“망할 놈. 딱 기다려. 내년에는 나도 거기로 간다.”




오데르조에 머물고 있는 실비아는 오늘 아들이 1군 벤치에는 앉아 있을 거라기에 그저 화면에 잠깐이라도 잡힐 지도 모르는 아들의 얼굴만 보고자 축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민우가 화면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경기에 나오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조마조마했던 것도 잠시.

아예 아들이 멋진 골까지 넣어버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다 황급히 진열장으로 가 액자 하나를 가져와 다시 TV 앞에 앉았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세레모니.


“쟤도 참. 첫 골인데 저게 뭐야.”


그렇게 핀잔 아닌 핀잔을 하는데 민우의 마지막 세레모니를 보았다. 하늘의 누군가를 기리는 민우.

그게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는 실비아가 옆에 놓은 액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 보고 있는 거 맞죠?”


먼저 간 남편이 떠오른 실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렸다.

그 와중에 갑자기 마구 울려대는 전화기.

실비아의 지인들이 일제히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실비아는 감사 답신을 보내려면 또 한참 걸리겠다며 투덜거렸지만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tv에 집중하는 실비아.

해설자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계속 15세 소년이 엄청난 골을 만들었다며, 캉, 캉, 캉 이런 소리를 아주 연달아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가 다시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그 해설자의 ‘캉’ 소리가 더 빠르고 커졌다.

민우가 공을 가지고 측면을 내달리며 순식간에 두 명을 제쳐낸 것이었다.

그 때 뒤에서 들어오는 미드필더의 거친 백태클.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두 세 바퀴를 구르는 민우.


“No!”


실비아는 그렇게 외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제발, 제발. 입을 틀어막고 그렇게 상황을 지켜보는 실비아.


천만다행으로 민우는 구른 후에 그냥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태클을 한 선수에게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실비아는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그대로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도, 방송을 통해 보이는, 분명히 못된 말을 쏟아내고 있을 아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천연덕스런 아줌마 말투로, 그것도 한국어로 ‘아이고~, 아이고~’ 하며 탄식을 내뱉은 실비아는 괜히 저러다 자신이 가정교육을 잘못 시켰다는 말을 들을 까봐 엉뚱한 걱정까지 들었다.




“씨발 태클도 똥같이 못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민우의 거친 말에 격분하는 상대 선수. 키는 민우보다 컸지만 민우는 전혀 쫄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기세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민우를 말리기 위해 일단 귀도와 엔리코가 달려와 둘 사이를 막으려했다.


“어린놈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상대 미드필더. 그러나 민우 역시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어린놈 못 막아서 그런 등신 같은 태클을 하냐! 그냥 축구 그만 둬! 병신아!”


심판이 휘슬을 삑삑거리면서 싸움을 말리려했다.

관중석에서는 엄청난 야유가 쏟아져 나온다. 민우는 심판이 오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허리를 숙여 발목쯤을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계속 민우에게 욕을 퍼붓는 상대.

심판은 자신이 와도 멈추지 않는 상대에게 곧바로 옐로카드를 주었다.


왜! 왜! 라고 더 격분하며 따지는 상대를 보고 심판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상대편이 그를 잡고 심판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와중에 태클을 한 미드필더는 뒤에서 바위 같은 것이 쿵, 하고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슬그머니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덩치와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는 잔카를로였다.


“제대로 태클 한 번 해줄까? 어?”


그들 쪽에서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심판은 역시 한 번 더 휘슬을 불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중에 엔리코가 민우에게 말했다.


“이봐, 로베르토. 화가 난 건 알겠는데 너 다짜고짜 말이 너무 좀······.”

“그래야 만만하게 안 보니까요.”

“뭐?”

“안 그랬으면 오늘 뿐만 아니라 계속 이런 태클을 날릴 걸요?”

“음······.”


엔리코는 그렇게 말하는 민우의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냉정한 표정과 눈빛.


“그럼 일부러 그렇게 험한 말을 했던 거야?”

“당연하죠.”

“야, 그래도 너 얕잡아 보이지 않겠다고······.”

“보복 태클은 안 해요. 난 그런 거 안 합니다.”

“아, 그래.”


괜히 멋쩍은 엔리코. 그러면서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게 진짜 15살 짜리가 맞는 건지. 내 속도 이미 꿰뚫어 보는 것 같잖아.’


그런데 민우가 슬그머니 엔리코에게 몸을 밀착시킨 후 조용하게 말했다.


“잔카를로 뒤로 가요.”

“뭐?”

“싸우는 척 하다가 살짝 뒤로 빠져서 잔카를로 뒤로 가라고요. 잔카를로가 저쪽 수비 가운데서 수비 진형을 부술 테니까. 괜히 끝까지 싸우지 말고, 중간에 슬쩍 뒤로 빠졌다가 다시 가요. 내가 공을 찰 때 딱 빠지면 될 겁니다. 오른발로 올릴게요.”

“잘나신 플레이메이커님이 지시하면 나는 따라야겠지.”


픽, 하고 웃으며 엔리코는 민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은 후에 박스 쪽으로 갔다.


베네치아의 프리킥 찬스.

민우가 준비하는 것을 보고 관중들, 그리고 상대 선수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민우의 첫 슛을 보고 왼발잡이라고 생각했던 수비진은 일단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킥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대비하려고 했다.

실제로 민우도 일단은 공 앞에서 왼발로 찰 것처럼 몸의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어 킥을 차도 좋다는 신호인 심판의 휘슬. 민우는 천천히 공을 향해 가다가 일순간 토끼처럼 폴짝폴짝 옆으로 뛰어서 공 앞에서의 자신의 몸이 있는 방향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빠른 스텝을 밟은 후에 오른발로 킥을 찼다.

날카롭게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궤적.


민우가 공을 차는 순간 잔카를로가 특유의 힘으로 수비들을 골문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상대의 견제에 맞서 몸싸움을 하던 엔리코는 민우가 말한대로, 민우가 공을 차기 직전 재빨리 달려 잔카를로의 후방으로 갔다.

과연 잔카를로의 전진 때문에 대형이 무너져 어수선해진 그곳. 바로 그곳에 엔리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민우가 보낸 공은 그곳으로 정확하게 날아왔다.

골키퍼와 엔리코 사이. 그러나 엔리코에게 당연하게 조금 더 가까운 쪽으로 날아오는 공.

엔리코는 두 세 걸음의 스텝을 밟은 후 힘차게 뛰어 올랐다.


이런 공을 보내준다고?

그래. 이런 건 못 넣으면 내 잘못이지.


2경기 동안 아직 득점은 없는 엔리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렇게도 꿈꿔왔던 그의 커리어 첫 세리에 A골의 기회가 왔다.


키퍼와 동시에 공으로 달려 점프하는 엔리코. 그러나 엔리코의 헤딩이 더 빨랐다. 골키퍼는 팔을 쭉 뻗어 펀칭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패.

엔리코는 공의 방향을 아주 살짝 틀며, 동시에 강하게 내리 찍듯 헤딩을 했다.


그 과정이 우습게도 슬로우 모션처럼 그의 눈에 천천히 보였다. 땅을 한 번 찍은 공은 그것을 막으려 발을 뻗었지만, 건드리지 못하고 허우적댄 수비수를 통과한 후에 골문으로 들어갔다.

골이었다.


골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번쩍 양 팔을 들며 환호하는 엔리코.

자신에게도 이 골은 바로 이번 시즌 첫 골이자, 또한 감격스러운 세리에A 데뷔골이기도 했다.


양팔을 든 채 하늘을 보며 관중석 쪽으로 천천히 달려가는 엔리코를 향해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 얼싸 안았다.


“오오! 노인네! 축하해!”


그렇게 말한 선수는 바로 그와 함께 세 시즌을 파트너로 뛰었던 전방 공격수, 체코 출신의 알렌시였다.

그는 이미 지난 경기에서 골 맛을 봤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뛰었던 적이 있기에 그것이 빅리그 데뷔 골은 아니었다.

역시 나이가 든 후에 베네치아로 오게 된 그는 엔리코가 얼마나 이 세리에 A무대를 꿈꿔왔는지, 그리고 지난 시즌 승격이 확정되자 얼마나 기뻐했는지 잘 알았다.


“같이 늙은 처지에 누구보고 노인네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엔리코. 자신을 끌어안은 선수들 틈으로 저만치 천천히 다가오는 민우가 보였다.


선수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진영으로 복귀하면서 엔리코는 엄지를 척, 하고 내미는 민우를 보고 달려가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아프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민우를 향해 그저 엔리코는 고맙다, 딱 이 말만 했다. 그리고 목을 휘어감은 팔을 가볍게 흔들어 자신의 마음을 전한 뒤에, 민우와 함께 복귀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환호해주는 관중들에게 박수로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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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통제와 불신(2) 22.12.05 339 4 17쪽
29 통제와 불신(1) 22.12.02 374 5 15쪽
28 첫 인사 22.12.02 352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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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prodigio (2) +1 22.11.29 376 6 13쪽
25 prodigio (1) 22.11.28 395 7 14쪽
» 10분이면 충분하다(2) 22.11.26 417 6 12쪽
23 10분이면 충분하다 (1) +1 22.11.25 417 8 13쪽
22 축구, 그리고 사람 +1 22.11.24 469 4 14쪽
21 계약. 그리고 Spurs No. 7 Son(2) +1 22.11.23 509 6 12쪽
20 계약. 그리고 Spurs No. 7 Son(1) 22.11.22 552 3 15쪽
19 새로운 꿈 22.11.21 499 4 15쪽
18 10대 10 (3) 22.11.19 502 6 16쪽
17 10대 10 (2) 22.11.18 511 4 15쪽
16 10대 10 (1) 22.11.16 550 6 15쪽
15 미래의 라이벌 (3) +1 22.11.15 583 7 17쪽
14 미래의 라이벌(2) 22.11.13 585 6 13쪽
13 미래의 라이벌(1) 22.11.12 63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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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고의 속도 (2) 22.11.09 686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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