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은 왜 남북으로 갈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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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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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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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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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중국은 어떻게 생존했는가

DUMMY

원래 이맘때는 하늘이 높아지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이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폭우에다 늦더위, 태풍까지 대한민국 전역을 덮쳤다. 수증기가 공기 중에 가득 차면서 열을 잔뜩 올려놓으니 이런 날씨에는 오히려 말이 땀을 흘리느라 살이 쭉 빠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복지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강의실이다. 거기에 재미있는 수업까지 디저트로 나온다면 금상첨화지 않겠는가? 대동강을 낀 평야의 습기낀 공기는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하지만 수업의 열기는 학생을 즐겁게 만든다.


“잘 지냈죠? 새롭게 수업을 시작해보죠. 얘기한 대로 한국전쟁 부분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 전에 오늘 먼저 얘기할 내용은 중국내전 과정에서 중화민국, 즉 남중국이 어떻게 체제 붕괴 위기에서 생존하고 대륙의 절반이나마 건져낼 수 있었는지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는데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첫 번째로는 군 행정 개혁입니다. 중일전쟁 말기인 1944년과 2차 내전이 막 시작되던 1946년에 2차례 실행했죠. 이는 웨드마이어 당시 참모장과 조지 마셜의 제안으로 실행된 것입니다. 징병 및 동원 체계를 개선하고 병참의 효율을 높이는 걸 골자로 했죠. 여기 그래프에 나와있듯이 이 행정 개혁은 나름 성과를 거뒀습니다.


다만 이 개혁은 규모나 시스템을 분석해 봤을 때 방어 목적의 군 운용에 있어서는 효율적이지 몰라도 대규모 공세를 위한 군 운용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죠. 이는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 간 전면전 재발을 바라지 않던 미국 행정부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정말로 그 평가대로 장개석이 무리하게 대공세를 할 때 보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국민당군이 공세 역량을 상실해버렸고 공산당에게 역공의 기회를 줬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계속되는 패주를 극복하고 영토 재수복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계는 있었을지언정 행정 체계 개선이 크게 한몫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는 군사적 능력의 보존과 전술의 유연화입니다. 언급했듯이 1946년 대규모 공세를 가할 당시 후방에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을 어느 정도 마련해놨습니다. 수도 남경은 물론이고 중경, 무한 등 주요 도시에 방어 병력을 주둔시켜놨죠. 이를 통해 회하 부근에서 공산군의 공세를 막고 재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전력 보존을 위해 후퇴를 과감하게 실행했던 공산군의 전술을 국민당이 재공세를 할때 그대로 써먹죠. 강소성 소주, 하남성 남양, 섬서성 서안에서 전력 보존을 위해 과감하게 후퇴했다가 공산군이 방심한 틈을 타 다시 격멸해 해당 지역을 수복한 사례가 대표적이죠.


세 번째로는 두 번째와 연관이 큰데 1949년 2월의 황하 철수 작전입니다. 산동성 제남과 하남성 정주 근처까지 밀려난 국민당군이 황하 이남으로 병력을 철수해야 했는데 공산군의 진격 속도를 최대한 늦춰야 했죠. 항공기와 해군의 도움으로 공산군의 도하를 막고 산동성 제녕까지 철수하는데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공산군의 도하를 막지는 못했지만 국민당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 추후 재수복 작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경제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 원조가 그것이지요. 사실 중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중화민국 정부는 경제 안정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초기에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자체로는 당시 중화민국의 경제를 살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일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경제 기반 시설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전면전이 재개되면서 전비 지출이 증가했고 이는 중앙정부에 부담을 줬기 때문이지요. 물가도 치솟았죠.


대신 동유럽에 이어 이란까지 공산화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사태를 마냥 지켜볼 수는 없었던 미국의 해리 트루먼 행정부가 내전 초기부터 대대적인 차관을 제공해줍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차관을 이용해 당시 행정원장을 지냈던 송자문과 경제 관료들이 우선적으로 강소성과 광동성 등 내전 기간동안 후방 지역이었던 중부와 남부 지역의 경제 정상화에 주력하면서 이 지역의 민심, 특히 경제권을 쥔 자본가들의 국민당 지지가 이탈되는 걸 방지했습니다. 인플레이션 자체는 막지를 못했어도 1차대전 직후 독일 같은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죠.


49년에 이르면 한때 강소성 인근까지 공산당이 진출하면서 잠시 상해 일대에 혼란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극복을 하긴 합니다. 막대한 전비 지출로 인한 재정 적자와 전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성공을 거둔 건 기적에 가깝다고 평가되는데 당시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공 요인은 ‘중국경제사’를 수강하면 알 수 있으니 여기서 거론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강의계획서에 나와있는 송자문의 회고록에서 이 부분이 나와있으니 참고하시면 되요.


물론 이 성과라는게 말 그대로 현상유지 혹은 악화되는 속도를 최대한 늦췄다는 정도지 경제를 급격하게 발전시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남중국의 본격적인 경제 개발은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경제부흥계획을 수립한 1951년부터입니다.


여기서 경제와 관련해서 얘기가 또 새나가는 것 같은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날 상황과 관련된 얘기를 하나 할게요. 이렇게 중국내전 시기 막대한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에 크게 데인 남중국은 1951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과정에서 완제품보다는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육성 위주의 정책을 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으로부터 빌린 부채가 많은데 물가 안정은 또 필수적인 상황에서 또다시 부채와 통화를 늘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건 피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자본이 많이 필요한 중공업은 이 당시만 해도 국가 차원에서 크게 육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자금 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래서 중공업 육성은 나중에야 시작됩니다. 그 결과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르고 남중국이 주요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계속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그것도 하청 업체들이 남중국 경제의 근간을 차지했죠. 그리고 이 중소기업들이 오늘날 남중국의 하청 대기업들로 변모하죠. 그리고 그게 남중국 경제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교수는 ppt 슬라이드를 한 장 넘겼다. 일종의 인포그래픽이었다. 칸 별로 주요 선진국들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미국, 남중국, 일본부터 시작해서 유럽연합 회원국, 한국, 멕시코까지. 각 국가들의 이름 옆에는 누구나 들어봤을만한 기업들의 로고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여기 자료를 보세요. 이것은 올해 발표된 ‘글로벌 500대 브랜드 보고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를 평가한거죠. 순위에 오른 기업들의 목록을 국가 별로 정리했는데 남중국 기업들을 한번 보세요.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남중국의 기업들 중 이 목록에 오른 브랜드 수가 국가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적습니다.


물론 얼핏 보면 CSMC(Chin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라든가, 알리바바, 샤오미, HTC, 레노버, 중국은행, 지리자동차처럼 우리들이 다 들어본 유명 기업들은 다 있어요. 그런데 그 브랜드 가치 측면에서 세계인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남중국의 기업 수가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 생각보다 꽤 적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체급에도 불구하고요. 미국에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까지. 그리고 심지어 한국 기업들과 비교될 수준이죠.


다음 슬라이드를 봐요. 남중국 대기업들의 매출 순위들입니다. 매출액이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아까전 자료에 없는 기업들이 굉장히 많죠? 그리고 이 기업들 이름 대부분 처음 들어보셨죠? 왜냐면 이 대기업들이 일반인들에게 잘 안 알려진 하청 대기업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 브랜드 가치 순위에는 올랐죠.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이고 우리도 잘 아는 기업인 CSMC도 사실은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일종의 하청 대기업입니다. 파운드리라 하죠. 이것은 분단 직후 경제 복구를 모색하던 남중국 정부가 돌파구로 대규모 중공업 투자보다는 중소기업이 하청 위주로 성장할 수 있게 지원하면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성공 요인이 되었어도 지금은 선진국답지 않은 저임금 구조에 시달리는 원인이 된거죠.


이렇게 수업 첫시간에도 계속 얘기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거 역사가 계속 흘러내려온 결과물입니다. 단순한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과거 사람들이 살아가고 행동하고 생각해온 것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 이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중국의 분단사를 잊고 넘어가도 되는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요소인 이유죠.


자, 한국전쟁 얘기를 해야죠.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마침 역사적 사실 이외에 여러분들이 관심 있어 할 부분도 소개하려고요. 그래야 수업이 더욱 재미가 있겠지요.”


김혁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슬라이드를 다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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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남중국은 어떻게 생존했는가 +2 22.11.30 92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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