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은 왜 남북으로 갈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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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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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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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DUMMY

“우선 설명하면서 남중국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될 거라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유가 있는데 우선 자료 접근성의 문제에요. 남중국은 현재도 우리의 우방국이고 국방부나 외교부에서 전쟁과 관련해서 기밀해제한 문서들이 많아요. 대학이나 기관에서 자유롭게 열람해 분석할 수 있죠. 북한의 경우 로동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많은 문서가 확보되었고 전쟁 결정 과정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상세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북중국의 경우 아직도 관련된 자료는 많이 공개되어있지 않고 공산당의 프로파간다성 자료에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힘들죠. 그래서 그런 점을 좀 유념하기 바랍니다.


일단 한국전쟁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 전쟁이었다는 건 다들 아시죠. 스탈린이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죠. 김일성을 꼬드겼고 그가 남침을 강행했죠. 사실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 통일에 대한 야망은 품고 있었지만 능력이 될 수 있을지 여부에 확신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스탈린이 확실한 물밑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1950년 6월 25일 당시 분단선이었던 38선 전역에서 남침이 일어나게 된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스탈린이 왜 남침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공개된 자료들을 볼 때 중국 대륙에서의 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상태에서 동아시아에 제2의 전선을 만들어 서방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동유럽과 이란에서 공산화 작업에 박차를 가할 때 서구 세력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는 거죠.


모택동도 역시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인물입니다. 그의 의도도 역시 전선 분산이었다는 게 정설이죠. 한반도 적화를 통해 확고한 우군의 세력을 넓히려 하는 목적도 있었죠. 이런 분석도 있습니다. 만일에 장개석이 한반도 문제에 정신을 판다면 그 사이에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고히 하고 군대에 공백이 생기면 자신들도 역시 재침을 노릴 수 있다는 거죠.


다만 이 둘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북한군이 예상보다 훨씬 패주할 거라는 사실이었던 같습니다. 평양은 물론이고 압록강까지 밀려났으며 북중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북한이 오히려 황해도와 강원도 전체,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일부를 뺏긴 상태, 그러니까 세력이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휴전을 맺어 사실상 대패한 것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으니까요. 단지 정권만 무너지지 않았을 뿐.


일단 남북중국의 개입 전개과정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어쨌거나 6월 25일에 전쟁은 터졌고 이 소식을 들은 남북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과 모택동은 한반도의 상황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애초에 말했다시피 모택동은 김일성의 물주 중 하나였고 한반도 전체가 적화되면 후방에서 남중국을 견제할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개석은 반대로 한반도에 반공 국가가 존재해야 남중국 안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장개석은 전쟁이 터진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공 국가로서 귀국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전보를 보냅니다. 그리고 파병과 더불어 물자와 장비 공여를 준비합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한반도에 대규모를 전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는 겁니다. 우선 지금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남중국은 2,0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북중국과 맞닥뜨리고 있었습니다.


국지전은 수시로 일어났고 남북 중국 간 경계가 완전히 정립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접경 지대 촌락을 뺏거나 뺏기기도 했고 오늘날 남중국 사천성과 북중국 청해성 경계지대는 인구 밀도가 워낙 희박해 전투 없이 서로 고지를 점령하거나 점령당하기도 했죠. 양쪽 다 당연히도 엄청난 병력을 접경지역에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죠.


특히 남중국은 접경지대를 지키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만일에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파병한다면 그 전력 공백을 틈타 모택동이 재침공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파병을 반대하고 외교부는 정치적 목적에서 반드시 파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죠. 이 같은 정부 내 충돌은 무려 2주 간이나 이어졌습니다. 그 만큼 치열한 논쟁이었죠.


결론적으로 장개석은 군의 우려에도 파병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공주의 연대라는 명분도 있었고 유엔 상임이사국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해야한다고 봤죠. 그리고 마침 미국도 남중국의 파병을 희망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의 설립 근거가 되는 84호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는 참모진들의 회의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파병을 최종 결정합니다. 그러나 전쟁 기간동안 참전한 총 병력은 약 15,000명 정도로 국가 체급에 비해서는 상당히 적은 규모였습니다. 본인들도 전쟁 상태였으니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는 건 무리가 있었고 현실적으로 군부의 말을 듣고 타협을 한거죠. 결과론적이지만 그 덕분에 모택동이 노리는 남중국 내 전력 공백 상태도 막을 수 있었죠.


파병과 장비 공여를 준비하는 과정은 좀 더 오래 걸렸고 일부는 미국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8월 3일에 부산항에 남중국군이 도착하면서 활동이 시작되었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기도 하고 서울 수복 작전에도 참가합니다. 중국 내전에서 구른 정예병력 위주여서 활약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남한 내 중국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도 한몫 했다죠.


한편 서울 수복 후 북진하게 되자 장개석은 이런 고려를 합니다. 압록강-두만강까지 완벽하게 한반도 통일에 성공할 경우 남중국군이 한국을 후방 기지 삼아 동북 3성, 즉 북중국의 뒷면을 공격하고 중국 통일도 수행한다는 거죠. 여기에 관해서 장개석이 이승만과 논의하기도 했는데 이승만은 꽤 부정적이었습니다. 남중국군의 활약과 반공 연대는 전적으로 고마우나 통일 한국이 향후 또다시 침략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건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미국도 역시 이 제안에 매우 부정적이었죠. 장개석이 결국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긴 했지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변함없습니다.


그 의견을 철회하든 말든 모택동은 이런 장개석의 생각을 예상하고 있었고 설령 그런 생각이 없었다 해도 유명한 말이죠. 순망치한 논리에서 북한을 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50년 10월 소위 중공군을 한반도에 투입시킵니다. 사실 남한군이 38선을 넘은 시점에서 예정된 일이긴 했습니다.


우선 유엔군이 중공군과 충돌한건 10월 25일 신의주, 정확히는 오늘날 의주광역시와 용천시 부근인데 이때 이 지역의 유엔군 주축은 미군이었고 남중국군은 청천강 인근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중국군과 북중국군이 처음 격돌하게 된 때는 11월 27일이라고 합니다. 평안남도 덕천시 부근이었죠. 급작스러운 기습이었고 남중국군뿐만 아니라 남한군과 미군도 피해를 크게 입고 후퇴했는데 보고를 전달받은 장개석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죠. 불과 몇 년전 중국내전 중기에 패주에 가까운 후퇴를 했던 경험이 다시 떠올라서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급작스런 개입에 유엔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그 정점이 그 유명한 장진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정확히 얘기하면 미국과 남중국 연합군이 북중국군, 즉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안전한 후퇴를 벌여야 한 것인데 여기서 특히 한반도에서 치르는 양 중국 간의 대리전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죠. 남중국군인지 북중국군인지 구별이 어려운 때도 있어서 아군간 오사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장진호 전투 이후 1.4 후퇴를 거치면서 37도선까지 내려간 유엔군과 국군이 1951년 중순 38선까지 얼추 회복하고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같은 해 가을에 잘 알겠죠. ‘맹조의 발톱’이란 작전 아래 39도선까지 전선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합니다.


이 대규모 군사적 성공 이후 평양까지 다시 진출했다가 다시 공산군에게 탈환당하고 그 이후에는 고지전으로 2년 가까이 일관하다 휴전을 맺게 되죠. 양중국군이 격돌한 대표적인 곳은 화살머리고지, 크리스마스고지, 두무산 전투 등이 있습니다.”


교수가 설명을 하는 사이 학생들은 해당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 표기된 스크린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황해도 곡산군, 함경남도 문천시 등등. 학생 1명이 ‘어 저기 내가 태어난 곳인데’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작가의말

두무산(杜霧山): 황해도 곡산군에 있는 산으로 하도면과 이령면의 경계선에 위치해있다. 높이는 118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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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번외: 티베트의 독립 +2 22.12.11 84 2 9쪽
11 11. 북중국의 전쟁 개입 미화 +2 22.12.05 89 3 9쪽
» 10. 양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2 22.12.03 100 3 9쪽
9 9. 두 영화 +2 22.12.01 82 3 7쪽
8 8. 남중국은 어떻게 생존했는가 +2 22.11.30 91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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