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비무대회 15

신입생 비무대회 15
11시가 넘은 야심한 밤.
당연히 기숙사 바깥으로 외출하는 것은 금지된 시각이다. 이건 모든 월야학원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다.
더더욱이 다른 기숙사라면 특히나.
오늘같이 특별히 어떠한 비무대회라던가 학교 행사가 늦어져서 늦게 귀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기숙사에 가는 건 여전히 금지다.
백월 기숙사인 서소아가 적월, 그것도 중심부에 속하는 보건동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법에 속하는 일이었다.
걸리면?
뭘 말해!
벌점이지.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왕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뗀 순간이었다.
- 또각
멀리서 또각거리는 구둣굽소리가 들렸다.
기감이 뛰어난 왕윤과 서소아는 동시에 그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또각, 또각...
가까워져 온다.
월야학원에서 구두를 신고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이 시간까지 이 곳에서 구두를 신고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은...교수진들 뿐이다.
적월 교수진?
유독 백월 학생회장인 서소아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즉, 걸리면 끝장이다.
"망할.."
중얼거린 서소아가 눈을 꽉 감았다.
하 시발.
어떡하지.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눈 앞에 누가있는지도 까먹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안 걸릴 수 있을 지...
.......
.....음.
좀 에바기는 한데....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서소아는 꽉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리고, 들릴랑 말랑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무슨,"
왕윤이 제지하기도 전에, 서소아가 왕윤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
- 달칵
"음?"
당관진이 고개를 돌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조용한 양호동 복도 뿐.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인다.
이상하다...
방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중얼거린 당관진 교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류월'이라고 적힌 1인용 병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월월아~~~"
"아...노크 모르냐?"
몸에 붕대를 칭칭 두른 류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사촌오빠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구석에 대충 던진 당관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때?"
"뭐가."
"개처럼 발린 소감이!"
당관진이 해맑게 말했다.
도저히 30대라고는 보이지 않는 발랄함이었다.
"....좀 꺼지면 안될까?"
류월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웅 싫어. 재밌잖아."
씨알도 안 먹혔다.
"방금까지 류신이 지랄하다가 갔는데, 왜 너까지 와서 난리야."
오빠? 존댓말? 예의?
전부 깔끔하게 생략한 류월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살벌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우리 하나뿐인 사촌여동생이 나대다가 개처럼 발린 게 너무 웃겨서, 어? 동생아 그거 이번에 새로 개발한 극독 아니니?"
"응. 잘 아네."
류월이 조용히 꺼내든 약병을 살랑살랑 흔들며 생긋 웃었다.
"이걸로 쳐맞기 싫으면 할 말만 하고 꺼져."
"하. 언제봐도 독초같은 내 사촌동생."
매력쩔어.
당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킥킥댔다. 도저히 최연소 월야학원 교수이자 역대급 사천당가의 천재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네가 처참하게 개쳐발린...워워. 동생아 그거 내려놓고 얘기하자. 응?"
"하아....뭔데."
류월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영웅. 방금 조사 마쳤어."
"무슨 조사?"
"그냥~ 이런저런 조사~"
상하이의 사천당가와 류가는 온갖 정보를 많이 갖고있음과 동시에, 정보를 빠르고 다양하게 수집하는 걸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다.
심지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하오문과 맞먹을 정도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당관진의 손에 들린 서류철이 류월에게는 놀랄거리도 아니었다.
".....진짜 귀찮게 군다."
"전반적으로 별볼일 없는 정파 나부랭이 집안이지만...재밌는 게 하나있더라."
당관진의 눈빛이 차분해진다.
어느새 손에 들고 온 짙은 초록색 서류철을 류월에게 건내준 당관진이 얼른 열어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 부욱!
"좀 조심해서 열지..."
"이게 뭔ㄷ...뭐야."
서류철 안에 든 서류를 빠르게 훑어내리던 류월이 눈을 크게 떴다.
류월의 손 끝이 벌벌 떨리기 시작한다.
"순양극체. 나영웅 걔 순양극체 체질이야. 뭐...순양극체야...네가 더 알거고. 생긴대로 양기가 넘치는 아이더라."
".........."
"20살이 되기 전까지 극양의 기운을 받지 못하면 얼음이 되어서 산산히 부서져 죽을 운명인 네게 딱 맞지?"
어릴때부터 극한의 음기를 타고 태어났던 천마정령지체 체질의 류월이다.
극양의 사내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내심 류월은 자신이 좋아하는 왕윤이 양기가 넘치는 체질이 되기를 바랬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나영웅."
류월이 중얼거렸다.
서류에 박힌 영웅의 증명사진을 한참 쳐다보던 류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답지 않게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류월의 복잡한 감정을 눈치챈 당관진이 무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왕윤은 '혈왕마골'. 즉, 마공에 강한 체질이지...극양의 체질은 아니야."
"........"
"살고싶으면 걔 잡아."
"......."
"동생아. 나영웅을 사랑하라는 게 아니야. 급한 것도 아니고. 네가 20살이 되기 전까지 나영웅의 양기만 쏙 빼먹고 다시 왕윤을 쫓아다녀도 돼. 일단은 네가 살고봐야지 않겠니?"
"......"
"뭐, 그 양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은...네가 더 잘 알거고."
임신하는 것.
양기를 가장 충분히, 그리고 완벽히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류신."
"응?"
"류신 그 새끼도 이거 알아?"
"응."
당관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근데 왜 네가 말해줘."
류월의 목소리는 표독스러웠지만, 평소답지 않게 덜덜 떨렸다.
방금 자신을 주먹으로 쓰러트린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라니. 그게 내 유일한 살 길이라니....! 이런 소식을 심지어 친오빠가 아닌 사촌오빠에게 듣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째깍째깍.
시계침 소리를 제외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할 말을 고르던 당관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을해서 뭐하나.
"신이가 나한테 미뤘어."
"..........."
"자기는 일찍 독맞고 죽기 싫대. 웃기지? 독왕지체 주제에 독맞고 죽기 싫다니...어지간히 걔도 여동생한테 이런 소식 알려주기 싫었나봐."
"....개새끼."
류월이 읆조렸다.
그 대상이 자신에게 이딴 소식을 사촌오빠가 전하도록 미룬 친오빠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잉태해야 살 수 있는 자신의 운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관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이불에 고개를 박고 우는 류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