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악령의 춤이 부르는 것

“그러고보니 저녁이 다 된 것 같은데, 해가 아직 중천이네.”
알렌은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태양을 쳐다보았다. 어느샌가 눈은 다시 멈추었지만, 악령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메아리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거슬릴 정도로 가까워졌다가 다시 희미하게 멀어졌다. 크리스티안도 인상을 찌푸렸다.
“형 말이 맞아. 뭔가 이상해.”
앞서 걷던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뭉쳐 한 무리의 악령들에게 던졌다. 날아간 눈덩이는 악령들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여 눈 속에 파묻혔다. 그 자리에 있던 악령들은 잠시 고장난 인형들처럼 지직대며 깜박거리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반격도 없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군. 확실히 기분 나쁜 것들이긴 해. 근데 생각했던 것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은 것 같···.”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뿔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은 모두 동시에 귀를 틀어 막았다. 오덴버그 성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두두두둥- 하는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뭐야?!”
그들은 어안이벙벙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수 천 마리의 마물 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오덴버그의 장벽으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 너머로 보이는 저 거대한 실루엣.
- 쿠웅
알렌이 눈을 비비며 다시 그 광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눈이 잘못됐나···. 방금 저 산이 통째로 움직인 것 같았는데."
“저거··· 스노우 골렘같은데요? 아니, 사이즈가 왜 이렇게 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스노우 골렘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설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집채만한 눈덩이들이 몸에서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쿵, 쿵- 쏟아져내렸다.
멀리서 마물들의 끔찍한 표효가 들려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마물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거지? 분명 마왕이 봉인되면서 차원의 경계 또한 막혔을 터.
- 고오오오
순간 성 위로 번쩍 하고 하얀 빛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빙결 속성 공격의 수식, 만 개의 징벌. 마법이 완성되어 발동되자, 하늘에서 검의 형상을 한 얼음들이 비처럼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얼음검들은 수직으로 떨어져 그대로 날카롭게 지면 위로 꽃혔다.
- 핑, 피핑, 핑!
낙하한 얼음들은 마치 잘 벼려진 강철처럼 마물들의 심장을 꿰뚫고 몸을 쪼갰다. 마물들은 괴로운 듯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하얗던 설원이 순식간에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핑- 떨어진 얼음검 하나가 그들 가까이에 있던 바위에 꽃혀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파편이 유리조각처럼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디오도르가 곧바로 방어마법을 펼쳐 그것들을 튕겨냈다.
“엄청난 위력이군요. 하지만 광역마법이라고는 해도 마물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저 정도 규모의 마법을 계속 소환하는 것도 쉽지 않을테고요.”
그의 예상대로 만 개의 징벌은 두 번 정도 더 소환된 후에 멈추었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오덴버그의 수호 기사단이 진군하여 부채꼴로 도열했다. 짙은 보라색의 휘장이 사방에서 흩날렸다. 신성력이 실린 무기들이 투명하게 빛나며 우웅-하고 위협적인 파동음을 냈다.
말을 탄 기사단장들이 앞장 서서 신호를 보내자 첫 열의 기사들이 차례차례 방패를 앞으로 세우며 정렬했다. 마치 은빛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신호. 기사단은 열 두 갈래로 쪼개져, 그대로 마물의 군단을 향해 돌진했다. 곧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도와야하지 않을까?”
크리스티안은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불편했다. 우리 기사단장님께서 정의감에 차올라 검을 빼들자, 알렌이 팔을 올려 그를 막았다.
“아니. 내버려 둬. 저긴 기사단이 충분히 정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지만 뭐 어쩌겠어. 우리가 해치워야 할 놈도 저렇게 깜찍한 사이즈면 좋겠다만."
알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얗고 거대한 스노우골렘의 주먹이 오덴버그의 장벽을 내려쳤다.
- 꽝!
장벽 한 쪽이 과자처럼 와르르 부서졌다. 그래도 내부를 꽤 단단하게 쌓아올린 모양인지 아직까지는 표면의 돌벽들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노우 골렘이 연달아 벽을 내려치자 손상되는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었다.
알렌은 까마득하게 거대한 골렘을 올려다보았다.
- 꺄르르
악령들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메아리쳤다. 핵인 마석을 파괴하지 못하면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이건 스노우 골렘. 눈이 무한대로 제공되는 상황에서 시간을 길게 끌수록 불리한 싸움이 되겠지.
알렌은 시야에 신성력을 집중하여 골렘에 흐르는 마나의 기운을 읽기 시작했다. 두껍게 쌓인 눈덩이 아래로 흐르는 기운을 읽는다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어? 뭔가 이상한데?’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골렘에서 거대한 마나의 기운과 함께 난데없이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골렘 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기감을 확장하여 다시 한 번 에너지를 읽어들인 알렌은 더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신성력이 대기에 넘치도록 충만해있다. 어째서지?
“혹시···.”
이 신성력이 악령들로부터 분출되고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느껴지던 신성력이 한순간에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가 그것의 존재를 감지했다는 사실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지만, 덕분에 마나의 기운을 읽는 작업은 한층 더 수월해졌다. 그래, 일단은 당장 눈 앞의 불부터 꺼보자. 마석이 위치한 곳은 하필 눈이 가장 두텁게 쌓인 몸통의 한가운데였다.
‘마법으로 껍데기를 부수고, 수복되기 전에 핵을 파괴하야겠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샤 아저씨, 몸통이요. 눈벽이 꽤 두꺼운데 괜찮을까요?”
“녹여야지 뭐. 머리카락 타지않게 조심해라.”
말을 마친 그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마치 허공에 스며들 듯 사라져버렸다. 알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 너는 나랑 같이 골렘의 주위를 끌다가 핵이 드러나는 순간 파괴할 수 있도록 보조해 줘.”
“알겠어.”
“양호선생은 흠··· 지켜보다가 이건 망하겠다 싶은 부분에서 적당히 도와주쇼.”
“좋습니다.”
알렌은 합! 하고 한 번 기합을 넣더니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그럼 가보자고!”
깜찍한 포니테일과 털망토를 휘날리며 달리는 꼬라지가 잔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비주얼이랄까. 디오도르는 왠지 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심정이 되어 어린 제자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대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즉시 가문의 비기를 시전했다.
- 영광의 전장
그를 중심으로 푸른 물결처럼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그들과 골렘이 서 있는 지면을 덮었다. 오직 로즈우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아군의 사기를 높히고 전장에 갇힌 적의 체력을 빠르게 소모시키는 비전이다.
알렌이 검날을 손 끝으로 한 번 훑자, 하얀 불길이 감기며 일렁거렸다. 백색의 화염. 먼저 시선을 끌어야 한다.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을 골렘의 발에다가 냅다 꽃았다.
- 펑!
어?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몸뚱이가 허공에 붕 떠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눈사태가 일어난 것 처럼 사방이 온통 눈 투성이에 지독한 수중기가 구름처럼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아니, 형! 미쳤어?!”
저 멀리서 달려오던 크리스티안이 떨어지는 알렌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그 뜨거운 걸 다짜고짜 얼음 속에 쑤셔 박으면 어떡해?!”
“아니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공격한 부위가 폭발한 모양인지, 검이 아주 반토막이 나 있었다.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검을 해먹었군. 투덜거리던 알렌은 문득 자신이 크리스티안에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매우 거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이 모습에 너무 익숙해지지 마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네 넓은 가슴팍에 수줍게 기대어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순간 크리스티안은 문득 우락부락 근육질의 거대한 빨간머리 남자를 안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팔의 힘이 탁 풀렸다. 그 바람에 알렌은 처참하게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으악!”
“아 진짜 제발 혐오스러운 것 좀 떠올리게 하지마. 좋은 것만 생각해도 각박한 세상에.”
“그렇다고 던질 필요까진 없잖아, 이 여자에 미친 새끼야!”
수증기가 걷히자 까마득한 하늘 위로 보이는 골렘의 새하얀 면상이 똑바로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눈 코 입이 없는데도 어쩐지 빡침이 가득해보인다. 아무래도 시선 하나는 제대로 끈 모양이었다.
골렘의 발이 반 절 정도 날아가고 다리의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그것이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상체가 불안할 정도로 크게 앞 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알렌과 크리스티안은 미친듯이 달렸다.
“이런 식의 공격은 위험해. 저게 성 바로 옆에서 무너져버리기라도 해봐. 눈더미에 파묻혀서 한꺼번에 몰살당할 판이야."
“동감이다. 일단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해보자고.”
이렇게 대화를 하는 와중에 문득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골렘의 발이 그들을 짓밟아버릴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젠장.”
알렌이 치유 매크로를 걸며 부러진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검 끝에 응축된 보랏빛 신성력이 동그랗게 맺혔다.
- 도살검, 분쇄.
수직으로 쏘아 올려진 신성력이 골렘의 발바닥에서 발등을 관통하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골렘의 바닥이 지면에 닿자 뻥 뚫린 눈터널 위로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전투 중에 뜬금 없지만 어쩐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크리스티안이 추억에 잠긴 듯 촉촉한 멜로 눈깔을 하고 알렌을 돌아보았다.
“우리 어렸을 때 책에서 봤잖아. 이글루가 바로 이런 느낌일까?"
“타이밍 맞춰 뚫으려면 집중해야 하니까, 제발 웃기지 좀 말아줘라.”
알렌이 이를 악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성이 난 골렘은 쾅쾅 더 세게 발을 굴렀다. 그때마다 알렌은 분쇄를 사용하여 골렘의 발바닥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영광의 전장의 발동 효과인지 공격이 아주 쑥쑥 잘 먹혀 들어갔다.
다리 하나는 반토막나고 다른 발바닥은 아주 구멍투성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저 성가신 개미들이 죽지 않아서 짜증이 많이 난 모양이었다. 골렘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들어올려 둘을 뻥 걷어차버렸다.
“형, 내 앞으로 와!”
발에 차이기 직전, 크리스티안이 알렌을 중간에 끼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방패에서 푸른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일곱 개의 날개가 뻗어나와 그들의 몸 전체를 감쌌다.
- 뻐엉
부딪치는 순간의 충격은 방패가 흡수했으나, 그들은 마치 공처럼 데굴데굴 허공을 날았다. 알렌은 저녁으로 먹었던 샌드위치가 식도를 타고 세차게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우웁, 토할 것 같아."
"지금?! 안돼!"
크리스티안이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알렌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와, 이 인정머리 없는 새끼. 그 순간, 무언가가 지면으로부터 쑥 솟아올라 날아가는 그들의 몸을 받아냈다. 그 바람에 등에 살짝 충격이 가해지자 알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우웨에엑-"
“······."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돌려 그 역겨운 장면을 외면했다. 알렌은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토하고, 토하고, 또 토했다. 태어나 멀미 한 번 해본 적 없었던 그에게 이는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뱃속의 모든 것을 게워낸 그가 파리한 안색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통째로 후들거렸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골렘보다 멀미가 더 무서울 줄이야."
크리스티안의 얼굴도 창백해져있었다. 저게 만약 날아가는 와중에 터졌으면··· 후우,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을 받아낸 것은 나무덩굴이였다. 단단한 줄기가 그들의 몸을 휘감아 안전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을 지켜보던 디오도르가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초록잎 무성한 겨우살이 덩굴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덩굴에 감겨있는 그들의 몸도 덩달아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지면에서 디오도르의 안경알 두 개가 번쩍 빛나는 것이 보였다.
“이거 왜 이래? 양호선생! 뭐하는거야?”
“두 분, 조금만 참아봐요! 계획이 다 있으니까!”
이제는 하늘이 지면보다 더 가까울 지경이었다. 덩굴이 성장을 멈추더니 붉은 열매를 팡팡 터뜨리기 시작했다. 머리 바로 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있었다. 달랑거리는 발 밑으로는 오덴버그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 쿵···쿵··· 쿠쿵···.
정말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알렌은 어쩔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망했구나, 젠장···. 저 멀리서 스노우 골렘이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새하얀 설원같은 그것의 얼굴에는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마침내 네 놈들을 죽일 수 있게 되었구나. 감정의 변화를 이토록 섬세하게 표출하는 몬스터는 살다살다 처음 봤다.
'디오도르, 이 새끼.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이건 뭐 골렘에게 우릴 갖다 바치는 형국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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