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광산마을의 비극

이렇게 오덴버그 왕의 알현이 끝났다. 첫 만남의 순간에 느꼈던 긴장감이 모두 풀려버리자 어쩐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크리스티안이 알렌을 돌아보았다.
“저녁시간 전까지 뭐할거야?”
“흠··· 글쎄. 마을이나 돌아볼까.”
“나는 이만 자러간다.”
사샤가 먼저 성큼성큼 손을 흔들며 걸어가버렸다. 그의 눈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용은 원래 잠이 많은 생물인데, 아무래도 며칠동안 노숙을 하는 바람에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크리스티안이 디오도르에게도 물었다.
“선생님은 뭘 하실 예정인가요?”
“저는 오덴버그의 약초상점들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만들어보고 싶은 약물이 있었는데, 재료가 추운 극지방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이라 도통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어떤 약물을···?”
디오도르는 대답하는 대신 매우 수상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완성되면 알려드리죠, 후훗.”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져버렸다. 알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 또 자기 내면세계처럼 뒤틀린 괴상한 걸 만들어내려고, 쯧쯧. 엘프 중엔 왜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은지···.”
크리스티안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기도 엘프면서 뭐래 이 미친놈이.
알렌은 그의 동공에 선연하게 투영된 내면의 소리를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건방진 새끼. 그는 크리스티안의 등을 퍽 치고 먼저 성큼성큼 언덕을 내려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성채를 내려오는 길 좌우로는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다음 주말에 열릴 자작나무 숲의 축제 준비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가게들은 자작나무 가지와 알록달록한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었고, 축제 음식들이 익어가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알렌과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한 번씩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홀릴 듯 매혹적인 외모의 댄싱문 엘프, 그리고 왕자미 넘치는 크리스티안까지. 이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광경 자체가 보는 이들에겐 시각적 축제였다.
“이것 봐. 찐빵이다.”
알렌은 시선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또 끝내주는 관광을 하는 중이었다. 온갖 가게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현지인들과 다양한 소통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모, 이거 진짜 보석 맞아요? 깨물어봐도 되요?”
“어머나, 예쁜 아가씨가 큰일날 짓을! 이빨이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오덴버그는 광산이 많아서 보석이 흔하답니다. 이쪽은 하급 보석이라 알맹이가 커도 가격이 비싸지 않아요.”
“아니, 이게 하급이라고요?”
알렌이 적어도 자기 주먹만한 크기의 붉은 보석을 들어올렸다. 보석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반짝반짝 신비로운 빛을 냈다.
“예쁘죠? 여러 개 세트로 해서 자작나무에 걸어놓는 거예요.”
“이걸요?!”
가게 주인의 말에 알렌이 또 한 번 놀랐다. 이게 고작 나무에 거는 거는 장식품이었다고? 그는 디오도르에게서 갈취한 용돈을 탈탈 털어 보석을 세트로 구입했다.
‘이건 무조건 돈이 된다.’
“아가씨한테는 이런 목걸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악세사리는 괜찮아요.”
저렇게 작은 건 팔아도 이윤이 남지 않을테니까.
가게 주인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건 돈 때문이 아니었다.
'여태껏 저 목걸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손님이 없었어. 이건 그냥 영혼의 한 쌍 수준이잖아. 도대체 왜 관심이 없지? 어린 손님이라 혹시 돈이 부족한걸까.'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혹시 돈이 부족한거라면 그냥 드려도 될까요? 내가 아쉬워서 그래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그때 크리스티안이 한숨을 푹 쉬더니 외투 앞섶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닙니다. 제가 계산하지요. 얼맙니까?”
어머나··· 가게주인이 그 멋진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지랄한다. 알렌은 진저리가 났지만, 일단은 기사단장님께서 마음 편히 돈을 쓰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와우 멋지다, 우리 단장님. 브라보!”
“제발 좀 닥쳐.”
크리스티안이 이를 악물며 나지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행한 어린 소녀가 원하는 작은 목걸이하나 못 사주는 찌질한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달까. 결론적으로는 시커먼 남정네에게 악세사리를 선물한 꼴이라 본능적으로 역겨움같은 걸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호.”
알렌은 또 기가 막히게 이 혐오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때부터 그는 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온갖 지랄을 해대기 시작했다.
“와, 그럼 이 쿠키가 특산품이예요?”
“그래요. 버터쿠키에 잼을 발라 만드는데, 북부에서만 자라는 과일들을 쓰지요.”
“흠 흥미롭군. 단장님, 예리엘 이거 먹어보고 싶은뎅.”
“아까 다른 것도 사줬잖아. 이제 제발 좀 그만···.”
“너무하네. 이거 얼마 비싸지도 않고, 그냥 맛만 조금 보고 싶었던 건데.”
발랄하던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커다란 눈동자에 올망올망 그늘이 진다. 실망한 척 가련하게 고개를 숙이는 알렌을 보며 당황한 직원이 그를 달랬다.
“저기, 맛만 보는 거면 괜찮아요 내가 몇 개 챙겨 줄 테니까. 울지 말고.”
크리스티안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이렇게 한순간이었다. 가증스런 알렌의 연기를 보며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구쳤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우스워지는게 누구겠는가? 그는 어쩔 수 없이 또 지갑을 열었다.
“나 이제 형이랑 같이 안 다닐꺼야.”
지갑도 영혼도 모두 탈탈 털려버린 크리스티안이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렌은 만족스런 얼굴로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의 양 손에는 온갖 상점들에서 사들인 먹거리며 기념품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들은 언덕이 끝나는 길목에 놓인 벤치에 잠시 앉아 구운 소세지 꼬치를 꺼내 먹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데, 마늘향과 어울어져 제법 맛이 괜찮았다.
오독오독 소세지를 뜯어먹는 그들의 앞에 긴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관이 여러 개 인걸 보니 뭔가 큰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통곡하며 뒤를 따르는 마을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알렌이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마을 노인 한 명에게 물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광산이 또 마물에 습격당했다고 하더군. 이번 달만 벌써 두 번째야.”
“마물이 광산을요?”
“그렇다네. 습격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어. 광부들이 사지로 내몰리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래도 이번에는 신성 기사단이 곧바로 출동한 덕분에 시체라도 건졌지, 지난 번에는 손가락 몇 개가 남아있는 전부였다네.”
“흐음.”
말을 하던 노인의 눈이 잠깐 그들이 먹던 소세지에 머물렀다. 어, 손가락···. 어쩐지 입맛이 똑 떨어졌다.
“자네들도 조심하게. 장벽 안쪽으로는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광산을 타고 마을 안쪽까지 들어올지도 모르는 거니까."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해서 그들은 기사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장례 행렬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자 검은 관들과 마을사람들의 행렬이 더 스산해보였다.
흐느끼는 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다보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장례 행렬은 큰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였다. 기사단으로 가는 방향은 그대로 쭉 직진이라, 그들은 잠시 멈추어서 행렬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알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원의 경계가 더 불안정해지면 아예 몰살당할 수도 있어. 인간이 살아가기엔 참으로 척박한 환경 아닌가? 이 정도면 하루하루가 거의 생존일 수준인데···."
크리스티안의 시선은 아직도 멀어지는 행렬 끝에 머물러있었다.
“양날의 검인 모양이야. 항상 마물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지만, 경계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하자원이 풍부하다고 하더군."
“그게 추위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있는 건가?"
“그럴수도 있겠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오덴버그는 사실 아렐리아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거든. 수입원의 90프로 이상을 광산업에서 벌어들인다고 해. 아마 광부 한 명의 평균 연봉이 내 기사단장 연봉보다 더 많을껄?"
크리스티안의 설명에 알렌의 귀가 쫑긋해졌다.
"흠흠, 오덴버그 왕에게 이민을 신청해볼까?"
"지금도 춥다고 난리면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하하. 형이 저체온증이나 폐렴같은 어처구니없는 걸로 또 단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난 정말 슬플 것 같아. 이번 생에는 장수해야지, 화이팅."
"목소리는 다정한데 내용이 참 신랄하구나. 상냥하게 처맞고싶냐?"
그때 알렌은 한 소녀가 교차로 한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조그만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뭘 하는거지.’
그녀의 옆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걸 묻으려는 모양이었다. 키우던 강아지라도 죽었나. 땅이 딱딱하게 얼어있어서 구멍을 파는 것이 조금 힘들어 보였다.
“꼬마야, 도와줄까?”
소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새빨갛게 불어터진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알렌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흙구덩이를 파내는 일에 몰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건 혼자서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뭘 하는건데?”
알렌이 그녀의 옆에 같이 털썩 쪼그려 앉자, 소녀가 대답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엥? 알렌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것 참 안됐구나, 어··· 혹시 그 상자에 들어있는게 아빠니?"
그녀는 알렌을 잠시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니요. 이건 친구가 알려준 주문이예요. 죽은 사람이 쓰던 물건 하나랑 그 이름이 쓰인 종이, 그리고 꽃이나 과자를 상자에 넣어 사거리에 묻으면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대요.”
“아, 그래?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은 모양구나."
“돌아올 때 가게에서 제일 큰 인형을 사오겠다고 약속했거든요."
“······.”
“근데, 꿈 속에서 아빠를 만나면 말할꺼예요. 인형은 필요없으니까 그냥 빨리 집에 오라고. 자기 전에 같이 읽었던 동화책도 아직 그대로 있어요. 아빠가 빨리 와서 마저 읽어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궁금해서 잠도 안오는데···."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어려 아직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살짝 열린 상자 틈으로 잔뜩 우겨넣은 과자 조각들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 채,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죽음의 무게. 알렌과 크리스티안 모두 마음이 숙연해졌다.
교차로 근처로 수 백개의 작은 흙더미들이 보였다.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이곳에 묻혀 있었다.
그들은 오덴버그에 머무는 동안 그냥 제 7신성 기사단 숙소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단장 브랜든이 먼저 제안을 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그는 알렌에 완전히 꽃혀버린 것 같았다.
“주군께 어린 사제님이 검사라 대답하셨던 걸 기억하오. 사실이오?"
“네,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얼굴없는 형제단의 간부들을 해치웠다지?”
“어··· 그렇기는 하죠. 사실 그건 협공이라 혼자 해치웠다고 하기에는 조금···.”
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되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흠흠, 이게 실례되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사제님. 한 번 겨뤄 볼 수 있겠소?”
“엥? 단장님, 실례되는 부탁을 왜 하세요? 지금 저처럼 연약한 소녀랑 한 판 떠보시겠다는 말씀이신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