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기사단장과의 대련

알렌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심술궂게 되묻자 단장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나쁘게 받아들이진 말게! 알다시피 성기사가 워낙 드물지 않소? 오덴버그 성기사단 외에 대련을 해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말이오.”
“그건 그렇네요.”
“검사는 검으로 대화하는 법이요. 검을 섞다보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테고, 한편으로는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있을테지. 자네는 소녀이지만 또한 한 명의 검사가 아니오?”
그의 발언은 알렌에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댄싱문 엘프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진짜 정체성이 오랜만에 재조명을 받은 느낌이랄까. 타인에 의해 오랜만에 검사로써 호명된 이 순간, 알렌은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이건 거절할 수가 없다. 아니, 거절해서는 안된다. 알렌이 씨익 웃으며 크리스티안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 판 붙어보시죠.”
단장도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생각하셨소."
"참고로 저는 지는 싸움을 싫어합니다.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바라던 바요."
넓은 공터. 제 7기사단 단원들의 수련장 한 가운데 알렌과 7단장 브랜든이 서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크리스티안과 나머지 단원들이 빙 둘러싼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단장이 알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어린 사제님께 선공을 양보하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알렌의 온 몸에 신성력이 타오르듯 화르르 휘감겼다. 이마에는 노틸루카의 왕관이 떠올랐다. 단장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의 기운을 가늠해보았다.
“호오, 신성력의 성질이 조금 다르군. 종교가 달라서 그런건가?"
“단장님,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알렌의 검이 세차게 허공을 가르며 선제공격을 펼쳤다.
“무신론자입니다!”
검에 묵직하게 감긴 신성력이 우웅- 하는 파동음을 냈다. 상대방의 역량을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대한 다양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공격부터 시작해보자. 그의 검이 허공을 저미듯 빠르고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 챙, 채챙! 챙, 채채채챙!!
단장은 사방에서 뻗쳐오는 칼날을 큰 움직임 한 번 없이 모두 매끄럽게 받아쳐냈다. 견고하고 묵직한 방어였다. 두툼한 검신 뒤로 반 쯤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사제님께서는 참으로 재밌는 분이시오. 농담 할 여유가 있으신 걸 보니. 그럼 이쪽에서도 사양하지 않고 반격하겠소.”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 챙!
순간 알렌의 온 몸이 감각적인 본능에 의존해 반응했다. 묵직한 진동이 양 팔로 찌릿찌릿하게 전해져온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날카롭고 육중한 검. 정작 신성력은 별로 실리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순수한 근력의 힘인 것이다.
‘후우. 묵직하군.'
칼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단장과 눈이 마주치자 일단 여유있는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번 공격을 쳐내자, 조금 텀을 두고 다시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연속기였다.
- 챙, 채-앵 채챙!
하나 하나가 철근을 내려치는 것처럼 묵직하고 예리하다. 알렌은 신성력을 더 끌어 올렸다. 어차피 순수한 체력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승부수는 스피드와 압도적인 신성력.
'이거 어쩐지 똑같은 걸 반복해서 깨닫는 느낌이 드는군.'
몸이 바뀐 이후로는 매 전투마다 갈팡질팡의 연속이었다. 방향을 잃었달까. 그는 일단 받아 쳐내는 힘을 최소화하기 위해 검의 각도를 계산해서 공격을 흘려 쳐냈다. 막아내는 와중에도 마음이 초조했다. 이건 그저 버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빠르고 가벼운 검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란 말야, 젠장!'
공격할 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모두 무의미하다. 그는 마물을 상대할 때처럼 동일 지점을 여러 번 타격하여 힘을 실어보려 했으나, 귀신처럼 눈치 챈 단장이 곧바로 신성력을 끌어올려 방어했다. 철벽남도 이런 철벽남이 없었다.
"사제님, 처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것이오? 이젠 공격도 좀 해보시지?"
"아오, 시벌!"
약이 잔뜩 오른 알렌은 이를 악물었다. 동작이 조금 거칠어지자 부딪치는 칼날에서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신성력을 끌어 올리면 상대방에서도 동일하게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슬슬 힘이 딸리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단장은 단장대로 감탄중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노련한 전사와 칼을 섞는 느낌이었다. 검을 맞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공격을 예측하여 반응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나이가 아직 어린데 대단하군.'
번개처럼 공격을 쳐낸 댄싱문 엘프가 쌍욕을 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따라붙고 있었다. 어린 사제의 욕설이 제법 찰지고 걸쭉했다. 챙, 채챙- 챙-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들으니 구성진 비트감마저 느껴진달까.
알렌의 똥줄은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반격을 못하면 끝장이다. 이대로 밀리고 말 것인가.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아니, 죽어도 질 순 없다. 변수는 오직 하나. 신성력으로 냅다 갈기는 수 밖에.
보랏빛으로 출렁거리던 신성력이 점차 금빛으로 변하면서 꿀처럼 뚝뚝 흘러내릴 듯이 짙어졌다. 단장의 표정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와, 내 평생 이 정도 스케일로 신성력을 남용할 수 있는 이는 처음 보았소.”
“제가 이래뵈도 댄싱문 엘프랍니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아오! 젠장, 팔 더럽게 후달리네. 빠르게 승부를 보도록 하지죠.”
이 정도로 응축된 신성력을 컨트롤하는 것은 아무래도 심하게 무리가 간다.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 끝내야 해.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단장 쪽에서 먼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알렌의 보랏빛 눈동자 한 가운데 금빛 불꽃같은 것이 화르르 피어올라 춤을 추었다. 그들이 서 있던 공간이 검게 닫혔다. 전투에 속하지 않은 것들은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
‘두 번은 없다.’
순간 단장의 몸이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그의 동작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을 내지르는 순간 근육의 팽창과 이완, 그리고 검 끝이 향하는 방향까지. 아무리 완벽한 동작이라도 빈틈은 반드시 존재한다.
- 도살
알렌의 일격은 고요에서 또 다시 고요로 이어졌다. 찰나가 증발하듯 지나고 보이는 것은 오직 결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단장의 몸이 수련장 바닥으로 자유낙하하고 있었다.
- 턱!
순간 누군가가 그의 육중한 몸을 가뿐히 받아냈다. 단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받아든 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엇? 주군!”
오덴버그의 왕이었다.
“7단장, 훈련이 부족했나보군. 더욱 더 정진하도록.”
그가 씨익 웃으며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왕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알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검법은 놀랍도록 흥미롭군. 그 동안 수련을 하면서 수많은 벽에 부딪쳐 왔었지. 오늘 그 많은 벽들이 한꺼번에 깨져나간 느낌이야. 내 이토록 간결하고, 명확한 검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알렌은 멋적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감사합니···.”
“문제는 그 검법이 그대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왕이 단호한 표정으로 알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최소한의 움직임, 적재 적소의 신성력 사용.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힘과 치명타. 자네처럼 신성력이 넘쳐나는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들일세. 왜 이것들에 그토록 집착하지? 오히려 그대의 움직임을 옥죄고 있지 않은가.”
“어··· 그러니까.”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이전 생의 육체에서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라고 해야할까.
“물론 어떤 검법을 쓰건 그건 사용자의 자유지. 모든 것은 그대의 결정에 달렸다.”
“검법에 딱히 집착하는 건 아닙니다만, 개선방향을 찾는 중입니다.”
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는듯 싶더니 알렌에게 물었다.
“흠··· 그대는 마치 덩치 큰 사내처럼 싸우더군. 스승의 체격이 큰 편인가?”
알렌은 괜히 마음이 뜨끔해졌다. 과연 날카로웠다.
“어··· 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검법의 기본은 따라가도 되겠지만, 그대의 신체를 고려하여 동작이나 보법은 조금 손 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 문제는 무게야. 그대는 이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육체와 마나의 조합이 이끌어내는 공격의 강도겠죠.”
“동의하네. 안타깝게도 자네에겐 육체도 마나도 없지만 말야.”
우리의 왕께서는 사람을 야무지게 말로 후드려패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셨다.
“무게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넨 그 범주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알렌의 반항적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근육의 폭발력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속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 물론 심도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운용된 한 줄기 신성력에도 무게가 실릴 수 있는 법이야. 검술에서 무게라는 것은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개념이라네.”
“어··· 그렇죠.”
“이 말인 즉, 이 영역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의지에 달렸다는 소리다. 그대가 무게를 근력과 그것을 보조하는 마나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이 그대의 무게겠지. 하지만 그대에겐 그 둘 모두 부재해. 그럼 그대의 검에 무게를 싣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왠지 머릿속이 띵해졌다. 혹시 지금까지 나는 내 스스로가 만든 한계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개똥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아니, 무슨 철학자세요?
“개념이고 나발이고 당연히 힘은 근육이죠.”
알렌이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게는 강맹한 근육의 정교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노랩니다. 근육말입니다, 근육! 육체가 생산해 낼 수 있는 본질적인 힘, 모든 생명에 깃든 근본적인 에너지. 이 모든 것이 근육에 응축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그건 동의하는 바이네.”
“폐하께서도 그렇기 때문에 매일 육체를 단력하고 근육을 키우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저 잘 찢어진 복근과 대퇴근을 보세요. 삼각근에서 전완근으로 떨어지는 유려한 굴곡. 발달된 근육의 움직임이 이끌어 내는 아름다운 검의 춤을! 조화를 말입니다!”
알렌은 그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으면서 삿대질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적나라하게 평가당한 왕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게는 쥐뿔도 없는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 뭐요? 무게는 정의하기에 달렸다고? 앙?! 이런 말이 대체 어딨습니까? 이건 가진 자의 기만일 뿐이란 말입니다!”
“거··· 미안하게 되었네.”
왕은 알렌의 기세에 눌려 바로 사과했다.
흥분하니까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망할 소녀의 육체는 뇌와 눈물샘이 아주 끈끈하게 연결된 모양이었다. 뭐만 하면 눈물부터 줄줄.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본의 아니게 어린 소녀를 울린 왕이 당황해서 그를 달랬다. 기사단원들이 왕이랑 거리낌없는 사이였던 모양인지 경멸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대, 여보게. 알고있지, 알고 있어! 힘은 근력이지. 그래서 우리도 육체의 단련을 아주 중요시하고 있고. 하지만 그대에겐 그것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야. 그래서 내가 신성력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하는게 아닌가! 그러니 제발 좀 눈물을 멈추시게.”
“활용도를 높인다고요?”
“이건 원래 신성 기사단에서만 공유되는 훈련법이네. 하지만 그대와 공유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지.”
알렌이 눈물을 뚝 그치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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