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겨울과 죽음의 신

훈련으로 주말을 정신없이 보내고, 드디어 히엠스 신전 방문허가가 났다.
신전은 성채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보석 광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입구는 돌로 대충 깎아 만든 것처럼 투박해보였는데, 동굴 안쪽에 위치한 신전 정문을 열자마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와우, 이건 뭐 미쳤네."
알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치 신전 전체가 얼음을 깎아 만든 하나의 거대한 조각상같았기 때문이었다. 얼어붙은 강처럼 매끄러운 바닥. 투명한 기둥들 속으로 비치는 수많은 기포들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천장은 은빛과 짙은 푸른 빛을 내는 광물이 뒤섞여 마치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정말 굉장하군. 이건 전부 문스톤이잖아. 규모도 규모지만, 이 정도로 투명하게 가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드래곤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신전 곳곳을 훑었다. 고양이와 생선가게를 투어하는 느낌이랄까. 알렌은 이 상황에서 약간의 스릴마저 느꼈다. 안내하던 사제는 그들의 대가리들 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으니 그저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네, 잘 보셨습니다. 고대인들의 기술이 대단하지요?"
"···고대인들?"
"네, 이 신전은 오덴버그 왕국 이전부터 계속 이 자리에 있었고, 그걸 초대 왕이 발견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하여 히엠스 여신이 오덴버그의 수호신으로 추대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덴버그에서는 신전의 건축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겠군."
"아쉽지만 그렇습니다. 오덴버그의 세공기술은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뛰어나지만, 이건 구현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니까요. 오죽하면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는 평가조차 나오고 있답니다."
사샤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던 그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의 섬세함에 과감한 규모.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의 기술. 이건 의심할 나위조차 없었다.
'드워프로군. 그것도 멸종되었다고 여겨지던 드베르크 일족.'
드워프들은 훌륭한 대장장이로 알려져있다. 그 중 드베르크 족은 한때 보석 세공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냥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그들의 세공품을 묘사할 수가 없었다. 드베르크의 보석이 어둠 속에서 수천 갈래로 쪼개진 자잘한 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는 광경은 환상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이었으니까.
어느 날, 드베르크 족은 드래곤의 습격을 받아 멸망했다.
위대한 블루 드래곤, 아리아드네. 그녀는 드베르크의 보석에 병적으로 집착했는데, 급기야는 일족을 통째로 납치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브래스 한 방에 마을이 증발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그녀의 레이어로 끌려갔다. 드베르크 족은 최후의 한 명이 생을 마칠 때까지 드래곤의 노예로서 처참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천박한 할망구. 예술품의 미학이나 가치도 모르면서 욕심만 그득했었지.'
그러나 누구도 감히 항의 할 수 없었다. 같은 동족들조차도 가장 강력한 드래곤인 그녀를 두려워했으니까. 사샤는 아리아드네를 생각하면 아주 이가 갈렸다. 그녀는 블랙 드래곤의 말살에 앞장 섰던 바로 그 장본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생존자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군."
여태껏 드베르크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졌다.
"혼자 뭘 중얼거리고 있어요? 사리사욕에 눈이 돌아간 건 알겠지만, 인간적으로 신전은 털지 맙시다."
알렌은 기둥에 새겨진 정교한 동백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샤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들은 얼음 궁전처럼 화려한 복도를 지나 높은 아치문 앞에 섰다. 양쪽 문으로 히엠스 여신의 전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손에는 거대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알렌이 사제에게 물었다.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때문에 히엠스 여신은 겨울과 죽음의 신임과 동시에 공정함의 신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사제가 거대한 아치문을 밀자, 완전히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완연한 어둠이 새카만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었다. 사제가 먼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걸어가더니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손짓했다.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 끝에 제단이 있답니다.”
"···바닥이 있긴해요? 진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알렌이 확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제복이 하필 칠흙같은 검정이라 마치 사신에게 황천길을 인도받는 듯 불길한 느낌이랄까.
쿵- 그들의 등 뒤로 신전문이 굳게 닫혔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들어오던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홀 양쪽으로 수많은 촛불들이 어둠에 묻힌 채로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오직 어둠뿐이었다. 어디서부터가 천장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닥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만약 촛불마저 없었더라면 나와 어둠의 경계조차 인지하지 못했겠지.
‘아, 이 어둠.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다.’
알렌은 문득 자신이 죽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둠의 바다에 전신을 맡긴 채로 정처없이 표류했던 기억. 그 잔잔한 물결, 포근함. 그때도 생각했었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어둠일까.
그래. 이 공간은 죽음의 모방이로구나.
그는 죽음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히엠스의 공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자가 히엠스의 사제나 대신관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홀의 끝,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물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그 역시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서 어둠과 뚜렷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왠지 묘한 분위기인데요."
"······."
디오도르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의 표정도 어쩐지 편치 않아 보였다. 이 불편함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들이 마침내 홀 끝에 다다랐다. 흐르는 공기마저 멈춘 듯 적막한 공간. 남자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제가 히엠스의 대신관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는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코와 입을 제외한 전신이 검은 천자락 아래 가려져 있었다. 자다 깬 것처럼 나른하고 느릿느릿한 말투.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은 것 같은데. 대신관이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 성물을 가지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침묵의 관장자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침묵의 관장자요?”
“네. 여신이 들고 계신 성검입니다만··· 아, 지금 바로 가져오도록 하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가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가리고 있어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공간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니, 뭐가 보이질 않는데, 대체 어떻게 걸어다니는 거지? 역시 히엠스의 대신관이라 어둠과 친숙한 모양이···
- 쾅!
“아이고, 어두워서 뭐가 보이질 않네. 여러분, 잠시만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 우당탕거리면서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신관이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하하, 딱히 쓸 데가 없어서 서랍 안쪽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모양입니다. 자, 여기 받으시지요.”
어쩐지 영 못미더웠다. 알렌은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로 검을 쳐다 보았다. 이게 정말 성물이 맞긴 한건가?
검 끝이 땅에 살짝 끌리면서 스르릉- 소리를 냈다.. 어두워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길이도 길고, 두께감도 꽤 있는 편이었다. 알렌은 뭔가 변화가 있을까 싶어 검에 슬쩍 신성력을 흘려 보았다. 짙은 보라색 신성력이 검의 중심을 타고 흐르더니 검신에 새겨진 홈들에 혈관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호오, 멋진데? 검에 주문을 각인한 모양이네요. 신성력을 흘리면 발동되는 건가?"
“고대의 언어인 것으로 보이는데, 저희도 아직 해석을 하진 못했습니다.”
“특별한 기능같은 게 있나요?”
“글쎄 말입니다. 저희도 제례용으로만 몇 번 사용했던 것 뿐이라서···.”
대신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매가리없이 웃었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명색이 성물인데 너무 무관심한거 아냐?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에 차오른 빛이 깜박깜박하더니 그대로 꺼져버렸다. 알렌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대신관에게 물었다.
“어··· 이거 꺼졌는데요?”
“아,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이런 적이 없는데. 잠시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검을 다시 받아든 대신관은 신성력을 살짝 불어 넣었다가, 손 끝으로 검날을 튕겨보기도 하고, 급기야는 바닥에 검 끝을 쿵쿵 찍어대기 시작했다.
“으악! 그렇게 하면 날이 다 상하잖아요!”
알렌이 기겁을 하며 말리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망가진 물건들은 이러면 가끔 고쳐지던데···.”
대신관은 있던 믿음마저 짓밟아버리는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건 성물이 아닌 것 같다고. 모두가 그를 불신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걸 성물이라고 가져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
인류는 어처구니없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후우··· 생각만으로도 골치아픈 상황이었다. 차라리 단장이나 왕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으려나. 알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대신관님. 잘 알겠습니다. 일단 가져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보겠···"
순간, 홀 좌우로 늘어서 있던 수많은 초들이 일제히 꺼졌다. 신전은 어둠에 휩쌓였다. 이건 또 뭐가 문제인 것일까. 이곳은 대신관을 포함해서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게 없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다칠 수도 있으니 움직이지 마세요."
"아얏! 방금 내 머리 친 거 누구야?!"
"어, 제가 그런 것 같은데요. 미안합니다."
디오도르가 멋적게 사과했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하던 분위기가 한결 더 음침해졌다. 알렌이 신성력으로 빛을 소환해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주문이 발동되지 않았다. 그때 사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모두 조용히해라. 이건 우연한 일이 아니야. 완전한 어둠이 왔다.”
완전한 어둠?
- 그그극
대신관이 서 있는 방향에서 뭔가를 거칠게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기절이라도 한걸까?
“저··· 대신관님, 괜찮으신가요?”
“······.”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들이 걸어 들어왔던 길은 어둠에 묻혀 영영 지워져버린 것 같았다.
그때 검은 허공에서 대신관의 형태가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밤바다 속에 잠겨 있던 몸이 수면 위로 천천히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뭔가 조치를 취한 것일까?
- 그그극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대신관의 목이 괴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으니까. 축 늘어진 그의 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직 입술 뿐이었다. 벙긋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공기가 빠지는 이상한 소리만 들려왔다.
그때 사샤가 대신관의 대가리를 덥썩 움켜잡더니, 그의 목 위에 똑바로 얹어 놓았다. 그제서야 그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다오 도와줘
그의 입술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도와 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그의 목을 조르는 것 처럼 다시 꺼어어억-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샤가 대신관의 양쪽 싸대기를 한 대씩 철썩 철썩 갈겼다.
“똑바로 말씀하시게. 당신은 히엠스 여신인가?”
- 그···렇다.
“뭘 도와달라는거지?”
- 끄으으으
입술이 계속 필사적으로 움직이는데 목구멍이 막혀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방해를 하는건가. 사샤가 또 싸대기를 때릴 기세여서 알렌이 황급히 먼저 나섰다.
“좋아. 대답할 수 없다면 그 부분은 우리가 직접 알아 보도록 하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겠다. 가기 전에 한 가지만 알려줘. 이게 진짜 성물이 맞는건가? 맞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 돼."
대신관의 목구멍 속에서 끌어오르듯 들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알렌을 향해 돌아갔다. 천 뒤로 가려진 눈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대신관의 고개가 앞 뒤로 툭툭 떨어졌다. 조금 과격했지만, 아무래도 긍정의 표시인 것 같았다.
순간 대신관의 몸이 공중에서 허물어졌다. 동시에 완전한 어둠 또한 사라졌다. 다시 희미한 촛불의 바다가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이 미약한 빛조차 눈부시도록 밝게 느껴졌다.
허공에 감돌던 숨막히는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지자, 알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신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기괴하게 등장하는 거야?”
"적어도 이게 성물이 맞다는 건 확인해줬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디오도르가 축 늘어져있는 대신관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신관님. 대신관님, 괜찮으십니까?”
그가 신음하며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아아··· 제가 또 쓰러졌었나요? 죄송합니다. 삼 일 밤을 꼬박 새웠거든요.”
그가 가냘픈 목소리로 사과했다. 방금 일어났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목···은 괜찮으시죠?”
알렌이 직각으로 꺾여있던 그의 목을 떠올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신관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뺨이 얼얼하네요. 어? 이게 왜 이렇게 부었지?”
순간 모두의 시선이 딴청을 피우는 사샤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대신관의 몸에 신이 강림했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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