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믿음의 물약

“생각지도 못한 변수인 것 같습니다."
믿음의 물약의 성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문제는 약효가 지나치게 강해서 믿음이 거의 신앙수준으로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복용자가 숭배하는 이들의 집단적 광기의 표적이 되어 심각한 스토킹에 시달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디오도르가 한숨을 푹 쉬면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차라리 매혹의 물약을 사용할 걸 그랬나봅니다. 신전에서 절 찬양하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네요. 특히 대신관 그 미친놈이 아주 앞장서서 교주 노릇을··· 후우. 이러다가 제가 히엠스 교를 무너뜨릴 새로운 신으로 등극할 것 같은 지경입니다."
"뭐 일단은 이게 다 히엠스 여신 본인을 위한 거니까, 끝나고 어떻게든 잘 수습하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여신께서 힘을 되찾으면 당장 저부터 처단하실 것 같은데요."
상큼했던 크리스티안의 얼굴도 반 쯤 썩어가고 있었다.
“저는 난데없이 신성 기사단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 13 기사단을 만들테니 단장이 되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편 아닙니까?"
"후후··· 과연 그럴까요? 열 두 기사단의 단장 전원이 13기사단에 들어오겠다고 아우성인데도요? 신성 기사단의 주인은 오덴버그의 왕 뿐이잖아요. 이러다가 반역자로 몰려 참수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고요."
본의 아니게 오덴버그의 군권과 신권을 거머쥐게 된 크리스티안과 디오도르의 안색이 매우 불편해보였다. 반면 알렌의 얼굴은 얄미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나는 별로 달라진 거 없었는데."
"믿을만한 구석이 없으면 약도 딱히 소용이 없는건가 보네."
"사실 뭐, 믿을 만한 걸 믿어야죠, 에휴. 약조차도 발효되길 거부하는 저 사기꾼 새··· 크흠! 아무튼 복용자에 따라 약효가 달라진다니 놀라운 사실입니다. 기록해두고 더 연구해봐야겠네요."
피곤해서 그런지 둘 다 묘하게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알렌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디오도르가 화제를 전환했다.
“뭐 그래요, 부작용은 그렇다고 칩시다. 다들 알아낸 건 없었나요? 참고로 저는 이 개고생 끝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답니다, 하하하."
허탈하게 웃는 디오도르를 보며 크리스티안도 쓴웃음을 지었다.
“마찬가집니다. 낮에는 하루종일 온갖 훈련에 끌려다니고, 저녁에는 맥주와 스카치를 배럴 째로 퍼 마셨습니다. 조사고 뭐고 간에 이대로라면 어떻게든 단명할 거예요."
디오도르와 크리스티안이 동시에 알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항상 잔잔했던 두 사람의 눈동자에 어쩐지 형형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뭐라도 내놓지 않으면 물어뜯길 것 같은 분위기랄까. 알렌이 기세에 눌려 조금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나, 나도 딱히 없었어··· 흠. 그러고보니, 조금 이상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
“별 건 아니고 또 그 괴담같은 거야. 하얀 밤에 가족의 모습을 한 악령을 만나면 그대로 끌려간다고 하더군. 실제로 사라진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흠, 악령이 성채 안쪽에도 출몰하는 모양이지요?"
"일단은 실체가 없으니까 어디든 나타날 수는 있는 것 같더라고."
디오도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괴담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데요. 뭔가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까요?"
"글쎄. 이런 종류의 괴담이 워낙 많아서 말야. 오덴버그에서는 아이들이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더군. 그래서 사실 이게 그저 괴담일 뿐인지, 아니면 정말 있었던 일이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어."
가만히 듣고있던 크리스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겁을 줄 목적이었다면 왜 하필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넣었을까? 이건 마치···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밖으로 꾀어 내려는 의도같잖아. 그 상자를 묻는 주문같은 것도 그렇고 말야, 어쩐지 영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흠. 그럼 내일 소니아의 선생님한테 다시 한 번 물어볼께.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야."
디오도르가 문득 생각난듯 알렌에게 물었다.
“선생님이라면, 그때 마을 광장에서 봤던 그 여자분을 말하는거지요? 갈색 긴머리를 하나로 묶었던.”
“응. 왜요? 관심 있으신가?”
알렌이 또 방정맞게 깝치며 히죽 웃어댔다.
“그럴리가요. 잘 해봤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죽음에 대해 굉장히 초연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뭔가 독특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독특함이 매력으로 와 닿았나?”
알렌이 음흉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미소를 짓자, 그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계속 헛소리나 지껄일거면 오늘은 이만 해산하죠. 분발합시다. 내일 치 약도 여기 있으니까 받아 두시고요.”
주말을 앞둔 그날 오후부터 오덴버그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휩쌓였다.
일년 내내 추운 오덴버그에도 사계절은 있었다. ‘겨울’이란 일 년 중 가장 추운 세 달을 말한다. 자작나무 숲의 축제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 가장 큰 행사였다.
닭다리를 뜯으며 설명을 듣던 알렌이 대뜸 선생에게 물었다.
“근데 왜 하필 자작나무죠?”
“오덴버그의 자작나무에는 작은 요정님들의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선생은 마치 동화책을 읽듯 동심을 한껏 자극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게 개소리냐는 듯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렌을 보며 그녀가 마침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장난같지만 정말이예요! 그래서 마법약의 재료로 자주 사용된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 자작나무들은 잎들을 모두 떨구고 동면에 들어가지요. 오덴버그에서는 이를 자작나무의 요정들이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여기곤해요."
그러고보니 디오도르가 찾던 마법약 재료 중 하나가 이 자작나무의 진액이었지. 이곳 북부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종이라고 했던가.
선생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건 일년 중 가장 큰 축제랍니다. 밤마다 자작나무 숲을 밤마다 알록달록한 마법등불로 밝히고, 마지막 날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불꽃놀이를 하지요. 잠에 들 채비를 하는 요정들을 배웅하는 거예요. 둘 다 엄청 예쁘니까 꼭 보러가셔야 해요."
"선생님은 축제를 엄청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알렌이 안면가득 미소가 가득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응, 아뇨? 저는 이제 매년 봐서 별로 관심이 없는데요. 맛있는 술안주를 많이 팔아서 좋긴 하지만요."
"아, 그렇습니까. 너무 즐거운 표정으로 설명을 하고 계셔서···."
"앗, 제가 그랬나요? 사실 지금 예리엘씨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얌전하게 말을 잘 들었던 적이 없거든요. 마치 이 순간이 꿈만 같아요."
선생이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켰다. 어느 샌가 알렌의 온 몸에 낯선 꼬맹이들이 착착 감겨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 동네 꼬마들이 그를 사방에서 에워싼 채 바글대고 있었다. 마치 병아리 떼의 한가운데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느낌이랄까.
'이건 혹시 약효때문인건가?'
그 순간, 선생이 알렌의 가녀린 손목을 덥썩 움켜잡았다.
"예리엘 씨. 혹시 같이 일하실 생각 없으세요?"
"네?"
"저, 예리엘 씨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리 힘을 합쳐 아이들을 올바른 미래로 인도해 보아요."
"이렇게··· 갑자기요?"
"한 치 앞조차 내다보기 힘든 이 거친 세상에서 우리가 자라나는 새싹들의 등대가 되어주는 거지요. 돈이 모자라다면 그냥 제 월급도 다 드릴께요. 저, 예리엘 씨를 갖기 위해선 뭐든 하겠어요!"
그녀가 갑자기 맨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알렌은 당황했다. 이거 누가보면 영락없는 프로포즈 각이잖아. 눈동자가 살짝 맛이 간 것을 보니 선생도 믿음의 물약에 현혹당한 모양이었다.
알렌은 문득 오늘따라 소니아가 유난히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그를 독차지하겠다고 다른 꼬마들을 밀쳐대며 난리를 쳤을텐데.
“소니아, 오늘 기분이 좋아보인다? 축제 때 뭐 재밌는거 해?”
알렌이 끈적하게 엉겨붙는 선생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니아가 생긋생긋 웃으면서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알렌이 허리를 숙이자 그녀가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아빠랑 불꽃놀이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엉? 아빠?”
“응, 불꽃놀이도 보고, 밤시장도 구경할거예요.”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상상의 친구같은 건가? 아니면 혹시 소니아의 엄마가 벌써부터 새 아빠를···. 일단 뭐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그래. 재밌겠구나.”
“이건 비밀이예요, 비밀.”
소니아가 집게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며 쉬이- 하고 소리를 냈다.
부모님들이 하나 둘씩 광장에 나타나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들은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는 바람에 난데없는 곤욕을 치뤄야만 했다. 알렌은 마음이 뜨끔했다. 이게 다 믿음의 물약 때문일테니까.
"아 맞다, 근데 언니는 축제 때 뭐해요?”
요 당돌한 꼬맹이는 몇 번이나 내가 사제님이라고 설명을 해도 끝까지 지 좋을대로 언니라고 불러 제꼈다. 알렌은 이제 자포자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언니는 축제 때 배터지게 먹고 마실거야. 나쁜 사람도 잡아야지. 언니 친구들이랑 내기를 했거든. 제일 먼저 잡는 사람에게 100만 골드를 걸었어. 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똥줄 빠지도록 뛰어 다닐거란다.”
“와, 멋지다! 나도 같이 해도 되요?”
“위험해서 안돼.”
소니아의 미간이 금방이라도 칭얼 댈 기세로 세차게 구겨졌다. 이잉··· 그녀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지옥의 바이크에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돼! 제발 울지마, 내 고막! 때마침 저 멀리서 소니아의 엄마가 두리번거리며 딸을 찾는 모습이 보이길래 알렌은 재빨리 그녀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엇? 저기 엄마다!"
“히잉··· 응? 엄마아!"
그녀는 엄마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나갔다. 후우··· 알렌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니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니아, 그럼 축제 때 보자! 엄마랑 아빠랑 재밌게 잘 놀렴.”
뛰어가던 소니아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알렌에게 달려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한테도 비밀.”
소니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쪼르르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엥?”
남겨진 알렌의 머리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뭔가 이상한데. 어쩐지 영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엄마한테도 비밀이라니. 이거··· 혹시 납치범같은거 아냐? 어떤 몹쓸 새끼가 아빠라고 개수작을 부리면서 소니아를 유혹하고 있는 거라면···.
쓸데없는 걱정인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벌떡 일어나 소니아와 엄마에게로 뛰어갔다.
“어, 언니? 왜 왔어요?”
“깜박한게 있어서. 잠깐 팔 좀 내밀어볼래?”
알렌이 소니아의 가느다란 팔목에 추적팔찌를 묶어 놓았다.
“선물이야. 이거, 축제 기간동안 빼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이렇게 해놓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즉시 소니아를 찾을 수 있겠지. 그의 뻔뻔한 거짓말에 소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아, 진짜?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소녀를 보며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뭐,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니까. 결국 우리 모두의 소원은 안전하고 별 탈 없는 순탄한 삶 아니겠는가.
멀리서 선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알렌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도 이렇게 끝인가. 별 소득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딱 예감이 그렇단 말야. 곧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리고 불행히도 그 예감은 곧바로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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