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귀신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소녀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다들 본 적이 없었으니까. 디오도르를 비롯한 치유사와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온갖 마법을 시전해보았다.
“치유가 듣지 않습니다. 어딜 다쳐서 기절한게 아닌가 본데요?"
“축복으로도 상쇄가 안되는걸 보면, 저주도 아니야. 도대체 뭐가 원인인지 알 수가 없군."
- 인테르 프레타티오
온갖 마법의 빛들이 불꽃놀이마냥 그 근방을 오색찬란하게 물들였다.
그들이 소니아를 깨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알렌은 주위의 기척에 집중했다. 추적마법의 사슬은 아직도 마법진의 건너편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추적 대상이 움직이는 모양인지, 사슬표면의 빛이 파르르 떨리며 사방으로 부서졌다.
'게다가 이거 꽤 팽팽한걸.'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잡아야 해. 이놈이 바로 시전자다.
순간 알렌은 마법진 한 쪽에서 마력 한 가닥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감지했다.
‘뭐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의 검이 번쩍 빛나며 허공을 갈랐다.
- 서걱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재빠른 일격.
디오도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산들바람이 스치며 지나갔다. 그의 시야로 수 백가닥으로 부서진 마나줄기들이 허공에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최고급 망토자락과 함께.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알렌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뭐? 아, 마법진과 소니아가 마나줄기로 이어져 있더라고. 서두르다보니 그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의 검을 다시 검집에 철컥 꽃아 넣었다.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저렇게 당당한 걸 보니, 일부러 그랬네 저거. 왜 또 지랄이냐며 항의하려던 디오도르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지금 마나를 베어냈다고 했었나?’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소리지?
이 엄청난 사실을 자연스럽게 넘길 뻔 했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나라는 것은 추상적인 힘이다. 이걸 물리적으로 베어내는 건 이론적으로 불가능 할 터.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요?”
디오도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떨렸다.
“안되는거였나? 그냥 썰리던데?”
알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경악 반 감동 반으로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이 바보놈은 방금 자기가 무심코 한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 온 몸에 전율이 퍼져 나간다.
이건 마치 혁명과도 같았다. 끊임없이 전복되는 상식과 논리. 요즘 디오도르는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연구소재가 풍성했던 적이 있던가.’
예외 현상의 연속적인 발견. 자극적인 논제의 향연. 기존 학설들을 다채롭게 박살내고 있는 그 무질서의 정점이 바로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래, 이건 지적 재산의 노다지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연구재료라고! 디오도르의 눈이 노골적인 탐욕으로 번뜩거렸다.
“선생, 날 바라보는 눈깔이 참으로 불손하군.”
알렌이 매우 거북한 표정으로 검을 다시 철컥 빼들었다.
“앗? 아하하, 잠시 딴 생각을 해버렸네요."
시커먼 속내를 들켜버린 디오도르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뭐, 막아주신 덕분에 마법은 일단 미완성입니다만... 발동은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매개체였던 소니아를 분리했는데도?”
“네. 이미 진행이 시작된 상태였으니까요. 다만 미완성이니,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는 시전자조차도 예상할 수 없을 겁니다."
다행히 소니아의 몸은 투명화를 멈추었다. 쿵- 쿵- 땅 속에서 낮게 울리던 박동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실타래처럼 뭉친 마나의 가닥들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마법진은 도형과 기호, 문자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건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형상을 이루는 듯 하다가 무너져내리고, 연결되는 듯 하면 곧 산산히 흩어져버린다.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발동된다는 거지? 회로 자체가 성립이 안되면 마나가 특정한 힘으로 변환될 수 없는 거잖아. 이게 정말 마법진이 맞긴 한건가?”
“흠··· 일단 인간이 만든 것 같진 않구나.”
상황을 지켜보던 사샤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이건 좀 더 근원적인 힘이다. 심지어 드래곤의 힘과도 흡사한 면이 보이거든. 발동이 되면 더 많은 것이 드러날테지. 일단 기다려보자꾸나."
마법진 한가운데로 마나가 뭉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특정한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근처의 공간이 마치 깨진 것처럼 어긋난 상태로 천천히 일그러졌다.
마나의 줄기들이 빠르고 느리게, 또는 높고 낮게 파도쳤다. 마치 마법진의 위의 모든 시간들이 제각각 흘러가는 것 같달까.
- 지이이이이
귀를 찢는 듯한 노이즈와 함께 그 거대한 마법진이 한 순간에 꺼지듯 사라졌다. 허공을 꽉 메웠던 회색빛 안개도 어느 샌가 걷혀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올린 알렌의 눈동자 위에 새파란 하늘이 비쳤다.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디오도르가 그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시야에서 지워졌을 뿐, 마법진은 아직도 저기에 있어요.”
“어··· 근데, 내가 지금 환상을 보는건가? 저기 사람이 있는데?”
디오도르는 그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사거리 한 가운데 서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쓰러질 듯 앞 뒤로 휘청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낯선 이의 등장에 모두가 경계태세를 취했다. 크리스티안이 방패를 세워들고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십니까?!”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며 메아리쳤다.
“대답 부탁드립니다. 누구신지요?”
"······."
대답도, 미동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던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헝클어진 머리. 흙이 잔뜩 묻어 지저분한 얼굴. 멍한 눈빛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왜··· 왜 제가 여기에 있습니까?”
바닥을 긁는 듯 낮고 거친 목소리. 크리스티안은 어쩐지 조금 황당스러웠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그가 뭐라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문득, 주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자네가 어떻게···.”
기사단원들이 잘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그런 표정이랄까. 알렌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중 한 명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귀,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저게 정말 귀신이었다고? 그런데 여기서 더 황당했던 것은, 귀신으로 지목된 당사자도 덩달아 놀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
지켜보던 알렌이 조금 답답했던 모양인지, 당신이 바로 그 귀신이라며 친절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바로 당신이라고. 네? 네! 귀신이요, 귀신!"
참으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귀신이었다. 옆에 서 있던 크리스티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상황이 영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크흑!"
갑자기 머리를 부여 잡으며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 알렌이 흠칫 놀라며 손을 뻗자,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디오도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과, 광산에서 제가··· 제가 습격을···."
남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무언가를 애써 기억해내려는 것 같았다.
"··· 마물에게 습격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제서야 기억이 납니다. 동료들··· 동료들이 전부 산 채로 씹어 먹혔습니다. 눈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데··· 흐흑,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도 그럼 그때 죽었던 겁니끼?"
"네에···. 저는 마물에 붙잡혀 사, 산 채로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 허억!"
순간, 죽는 순간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남자의 표정이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부릅 떠진 두 눈동자에 끔찍한 공포가 어렸다. 그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 쉬었다. 과호흡이 온 모양이었다.
“헉! 허억···.”
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온 몸이 발작이라도 하듯 크게 흔들렸다. 걱정은 되었지만, 감히 아무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니까. 알렌이 바로 옆에 서 있던 기사에게 소근소근 물었다.
“근데, 아는 사람이예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참 혼란스럽군요. 외모나 목소리가 소니아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하니까요."
“엥? 소니아의 아버지요?! 돌아가셨다던?!"
알렌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기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그가 죽은 것은 100 퍼센트 확실합니다. 저도 현장에서 그 시신을 수습했으니까요. 그래서 대체 저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마법일까요?"
디오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법 중에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는 주문이 있긴 하지만, 죽은 이를 되살리는 마법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현상. 죽음은 그만큼 강력하고 절대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치유마법을 공중에 띄워 남자에게로 날렸다. 초록빛의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크게 흔들리던 남자의 몸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잠시 후, 그가 지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잠깐 호흡곤란이 왔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오늘이 몇일이죠?"
“···축제 첫날이라네.”
그를 가장 먼저 알아 보았던 기사가 대답했다. 남자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아아···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다니···. 저, 아내는 잘 있겠지요? 제 딸··· 소니아는요? 돌아올 때 상점에서 제일 큰 인형을 사다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아, 소니아는 지금···.”
기사가 말끝을 흐렸다. 알렌은 조금 망설이다가 슬며시 한 쪽으로 비켜섰다. 남자의 눈동자에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소니아가 비쳤다. 순간 그의 다리가 무너질 듯 휘청했다.
“소니아!!”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었다. 그가 쏜살같이 소니아에게로 돌진했다. 남자는 그대로 디오도르에게서 그녀를 빼앗으려다가, 혹시라도 다치게 할까봐 겁이 난 모양이었다. 거칠게 뻗었던 두 손이 다시 무력하게 축 늘어졌다.
“아··· 소니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 애가···왜, 왜 이렇지요?!”
소니아는 죽은 듯이 미동조차 없었다. 힘 없이 툭 떨어진 그녀의 팔이 반쯤 투명해져 있었다. 아아··· 안돼···. 남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딸을 살피는 그의 핏발서린 두 눈에 절박함이 가득해졌다.
“제발, 제 딸을 살려주세요!”
그는 그대로 소니아의 위로 쓰러져 절규하듯 간청했다. 다른 기사 한명이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진정하시게. 우리도 지금 방법을 찾고있는 중이니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시 짙은 안개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디오도르와 몇몇 기사들이 붙어 다시 소니아에게 치유마법을 걸어보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인원은 무기와 방어구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마법진이 다시 발동하려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마나가 다시 빠르게 모여들고 있으니까요."
순간 안개 속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하얀 것들이 무리를 지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젠장···!”
모두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악령.
악령은 마물을 부른다. 즉 오덴버그가 곧 공격당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불길하다. 이번에는 뭔가 평소와 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마물이 쳐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기사단은 즉시 비상태세에 돌입했다.
“각 기사단에 신호를 보내 출전을 준비한다.”
“마을과 광산에 경고의 사이렌을 울려라."
마법사들이 각자 마법으로 전갈을 띄워 날리고, 기사 몇 명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먼저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기사 한 명이 디오도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우선 아이와 부상자를 데리고 기사단으로 대피하시죠. 전투가 치열해지면 성벽 안쪽까지 피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게 낫겠군요. 이런 상황에서는 치유에 집중하기도 힘들 것 같으니까."
디오도르가 나머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일단 소니아를 깨우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술식 해독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제가 늦게 합류한다고 해도, 기사단에도 치유사가 있으니 충분히 보조를 받을 수 있을···."
그는 문득 알렌이 안개 저편의 무엇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알렌? 뭐해요?"
"··· 쉬이."
알렌은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술에 집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들은 비로소 그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쩔그렁··· 지이익-, 쩔그렁··· 지이익-
쇳조각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바닥에 질질 끌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들은 굳은 얼굴로 안개의 저편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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