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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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작품등록일 :
2023.01.2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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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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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혼 07

'나는 이것이 준비 없이 시작되었음을, 그러나 끝은 예정되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노라.' -3급 집행관 하희지의 비망록 中




DUMMY

훈제굴이 마침내 포크에 관통당하자 흥진은 작은 쾌감을 느꼈다.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우물. 물컹한 식감 대신 곡물과 고기의 식감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흥진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구상에서 곡물 생산과 축산 가공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오라사에 있는 세계 최대 굴 양식장에서 들어오는 훈제굴은 유라시아 동북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거의 유일한 식량자원이 되었다. 비릿한 입안을 맥주로 헹궈내며 흥진은 오라사의 굴 양식장을 떠올렸다. 정확히 십 년 전, 흥진은 오라사의 굴 양식장에 있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던 양식장에서의 추억. 난 그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잡념을 애써 떨치며 그는 다시 지하 클럽, 유련의 앞으로 돌아왔다. 곁눈질로 주인 뒤 찬장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를 흘끔 쳐다 본 흥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인간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의 전말을 모릅니다. 다만 그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의뢰랄까 부탁을 여기서 받았죠. 제프리는 의뢰인의 이름입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암담시에 존재하는 세 집단 얘기를 해보죠. 가장 먼저 연합군 유라시아 사령부. 그들은 가장 강력한 힘이 있지만 암담시 내전에 진절머리가 나서 이젠 이곳에 대한 개입을 극도로 싫어하죠. 그럼 연합군이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암담 시청은? 저 금발의 멍청한 시장이야 군수 물자나 어떻게 좀 더 빼돌려 볼까 하는 것에만 혈안이죠. 마지막으로 연합군이 인정하지 않는 통일한국정부는? 암담시 재건에 가장 진심인 이 집단은 웃기게도 암담시의 공식 시정조차 어디서 굴러온 백인 시장에게 빼앗기고는 어린애처럼 악다구니나 쓰고 있죠. 그래봐야 연합군이 인정하지 않으니 여기 지하 클럽을 관리하는 조직폭력배들과 다를 것도 없어요. 이름만 정부다 뭐다 경찰국, 혼신조사국, 물자관리국이다 뭐다 설치고 다녀봐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공권력이죠.”

흥진의 말투는 점점 시니컬하게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웬 정치 얘기인가 싶죠? 하하하.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집단이 하나 더 있죠. 이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싶은 집단. 하지만 연합군이 있기 전부터 이 땅에서 시스템을 만들어 왔던 인간들.”

“성황당···얘긴가요? 정무일 팀장의 불법 법관 경력과 이번 용일산 타워 점거를 소재로 버무리기엔 좋은 얘기이긴 한데, 솔직히 진부한 음모론을 듣고 있는 기분이군요. 성황이 다시 일어나서 연합군을 물리치고 성법의 나라를 재건한다는 얘기는···”

“맞아요. 재미도 없는 철 지난 음모론이죠. 우리가 일하는 곳이지만 우리 정부야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려는 곳 아닙니까. 이번 살인사건을 명분으로 성황이 있는 타워를 압수수색해서 이슈몰이라도 해보려는 것 아니냐는게 대부분 사람들 생각일 테니까요. 뭐 일이 잘만 풀리면 연합군에 콩고물이라도 좀 떨어질지도 모르고.”

유련의 표정이 점차 따분해졌다. 성황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은 이십여 년간 한반도를 떠돌며 사람들의 여흥거리로 소비되는 괴담 취급을 받았다. 유련은 흥진이 말을 빙빙 돌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어느새 바 앞에 다시 선 주인이 테이블을 톡톡 두 번 쳐서 둘의 주의를 끌었다.

“영 재수가 없을 것 같은데. 미키다. 이쪽으로 오는데?”

“제길, 평소엔 보이지도 않더니 이럴 땐 잘도 나타나는군.”

흥진이 푸념 한 마디와 함께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외투를 열어젖힌 그가 외투자락을 방패 삼아 그 안에 꽂혀 있던 총을 유련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일련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찰나의 순간이었다. 유련 쪽으로 등을 보이며 그녀를 가리고 선 흥진이 사내를 맞이했을 때는 이미 유련의 허벅지에 올려진 총은 그녀의 품에 들어온 후였다. 그가 굳이 마술사처럼 자신에게 총을 건네 준 이유를 유련은 알 순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그에 호응하여 자신의 품에 총을 갈무리했다.

“진! 이게 무슨 일이야? 진이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다니!”

흥진의 앞에 선 미키란 이름의 사내는 과한 손짓을 허공에 뿌려대며 소리를 질렀다. 짧게 깎은 그의 붉은 머리는 자주색으로 길게 자란 양 구레나룻과 어우러져 있었고 귓볼을 깨물고 있는 세 개의 손가락 모양 귀걸이나 조개껍질을 엮어 만든 목걸이 등의 장신구들은 기괴한 인상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드는 한 가지는 그의 눈동자 색이었다. 흰자위보다 더욱 하얗게 표백된 그의 동공은 눈구멍이라는 원래 의미가 민망해질 정도로 짙은 하얀 색이었다.

“근무 태만으로 잘린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군. 아니면 그냥 손님으로 온 건가?”

“우리 조사국 대원 나으리. 여전히 화가 많아요. 헤헤헤. 내가 안 보이는 것이 곧 클럽의 평화 아니겠어?”

“그래? 그럼 평화를 위해 좀 꺼져 주시지, 수호자 나으리.”

“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야. 나보다 먼저 꺼져버린 수호자들이 있지 뭐야! 도대체 뭔 짓들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아? 근데 이 레이디는 내게 소개 안 시켜줄 텐가?”

바로 자신의 뒤에서 ‘레이디 소개’라는 말이 들려오자 삼발이 의자 발걸이에 얹어져 있던 그녀의 발이 슬며시 바닥을 디뎠다. 돌아서서 말을 나눌지 주저한 시간은 잠깐이었고, 곧 그녀는 미키를 향해 등을 돌리며 일어섰다. 유련은 미키의 하얀 동공을 보며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흥진이 그녀의 어깨를 팔로 휘감으며 재빨리 먼저 말했다.

“친구야. 혼자 저녁 먹는 것도 지겨워서 데리고 왔지.”

미키의 하얀 동공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의 고개가 의문부호처럼 살짝 기울어지자 흥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징그럽게 구는군. 유련아, 보여드려.”

방금 대화에서 언급된 ‘근무 태만’이 어떤 일에 대한 태만인지를 유련은 알 수 없었지만 흥진이 이렇게 어색한 표정으로 연기를 하는데 의심하지 않는 건 충분히 근무 태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잠깐 스쳤다. 보여드리라는 게 뭔지는 몰랐지만 보여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유련은 품에 넣어 둔 흥진의 총을 꺼내 보였다. 문지기 앞에서 흥진이 총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왼손으로 총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흥진이 그녀의 본명을 먼저 밝혔기 때문에 유련은 주저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유련이라고 부르세요.”

“성물소지자시군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미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과한 손짓을 남발하던 미키는 어느새 차분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흥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짓고 있는 자신의 미소가 여유롭게 보이길 바랐지만 그의 심정과는 별개로 그의 광대는 부자연스럽게 경직돼 있었다. 유련은 자신의 한쪽 어깨를 움켜잡고 있는 흥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그때 미키의 왼쪽 귀걸이가 초록색 불빛으로 깜빡였다.

“제가 일이 있어서 더 환담을 나누기가 어렵겠네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미키는 유련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흥진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무슨 일이죠?”

“클럽 경비원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녀석들인데 가끔 클럽 안에 허가 없이 들어온 사람들을 내쫓기도 하죠.”

유련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잠시 살펴보다 그에게 건넸다.

“이게 일종의 징표인가 보군요.”

“뭐, 그런 셈이죠.”

권총을 다시 품에 갈무리하며 흥진은 대충 얼버무렸다. 인간이라면 성물을 보여주며 억지를 부릴 수 있겠지만 미키는 저 징그러운 백색 동공으로 클럽에 허가된 신상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였다. 평소 흥진의 미키에 대한 평가가 ‘고장난 휴머노이드’이긴 했지만 의심 인물을 확인도 안 하고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수호자들이 사라졌다는 미키의 말을 곱씹던 흥진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미키!”

“음? 제프리!”

정수리가 훤히 벗어진 퉁퉁한 살집의 사내가 미키를 다급하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흥진이 그를 불러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다급한 얼굴이었다. 제프리는 흥진을 그대로 지나치며 미키가 사라진 댄스홀 방향으로 헐레벌떡 달려가 버렸다. 평소엔 보고 싶어도 얼굴 보기가 어려운 미키의 등장이나 세상이 무너져도 침착할 위인인 제프리의 당황스러운 뜀박질은 흥진이 예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흥진이 가장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강력한 진동이 클럽 전체를 흔든 것이 시작이었다.

열락에 휩싸인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멈춰 섰다.

쿠쾅쾅! 쾅쾅!

댄스홀 위를 삼 분의 일 정도 가리고 있는 2층 테라스의 외벽이 폭발과 함께 터져나갔고 거의 동시에 입출구로 이어지는 로비 쪽에서도 폭발이 이어졌다. 클럽을 가득 채우던 음악 소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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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5 23.07.31 19 1 12쪽
104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4 23.07.30 17 1 11쪽
103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3 23.07.28 15 1 9쪽
102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2 23.07.26 1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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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6 23.07.16 18 1 12쪽
95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5 23.07.14 19 1 10쪽
94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4 23.07.12 18 1 9쪽
93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3 23.07.10 20 1 10쪽
92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2 23.07.09 19 1 11쪽
91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1 23.07.07 17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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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4 23.07.03 20 2 12쪽
88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3 23.07.02 21 2 11쪽
87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2 23.06.30 19 2 10쪽
86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1 23.06.28 24 2 10쪽
85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0 23.06.26 2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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