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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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작품등록일 :
2023.01.2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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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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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4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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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넋풀이 02

'나는 이것이 준비 없이 시작되었음을, 그러나 끝은 예정되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노라.' -3급 집행관 하희지의 비망록 中




DUMMY

김창수는 여덟 살 때부터 나무꾼인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탔다. 산은 그의 고향이자 집이었다. 벌채 구역으로 지정된 산 중턱의 숲속 오두막에서 창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말수가 없는 아버지 밑에서 창수는 열 살이 되었을 때도 인간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와 상호교류하는 유일한 존재는 산이었다. 아니, 아버지 자체도 창수에게 있어 산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산이 홀로 창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창수의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생필품을 사러 암담시로 가는 날은 창수가 인류문명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그런 날마저 없었다면 창수는 산속의 아이로 자라나 아버지를 이어 평생 나무꾼이 되었을 것이다.

비정한 운명이 창수를 산속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창수가 열여섯 살이었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쓰러졌다. 장작더미에 방수 시트를 새로 갈고 있던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심장마비였다. 산 이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창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창수는 쓰러진 아버지를 업고 오두막을 나섰다. 무작정 나선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창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이틀을 꼬박 걸어 암담시 서북 방면의 외곽 검문소에 아버지를 업고 도착했다. 평소였다면 헐거운 검문소 방비에 창수는 무리 없이 암담시에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창수에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 마침 시외 순찰을 마치고 온 시청 경비단 산하 유격대원들이 검문소에 있었던 것이다. 창수는 유격대원들에게 붙잡혔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열여섯의 어린아이가 도시 바깥에서 홀로 걸어온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 아이가 성인 남자의 시신을 업고 왔다는 사실에 유격대원들은 강력한 호기심을 느꼈다. 더듬거리는 창수의 말을 통해 대원들은 시신이 아이의 아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남자의 시신을 검문소 근처 야산에 묻고 창수를 유격대 막사로 데려갔다. 창수를 동정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야생동물을 거둬온 것처럼 대원들은 창수를 막사의 문지기로 시켰다. 창수가 문을 지키는 개와 다른 점은 유격대원들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격대원들에게 얻어맞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폭력에 이유는 없었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은 그저 심심풀이로 꼬마 아이를 때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창수의 존재가 유격대 대장에게 전해졌다.

“말을 못한다고? 벙어리인가?”

“벙어리는 아니고 그냥 말이 좀 어눌합니다. 산속 나무꾼의 아들놈이랍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이틀을 걸어서 암담시까지 걸어온 독종 놈이죠.”

당시 시청 경비단 유격대의 대장을 맡고 있던 빅토르는 창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손한 자세였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빅토르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빛이 좋구나. 삼 일간 흠씬 두들겨 패라.”

창수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방적 폭행을 당했다. 끔찍한 폭력의 삼 일을 겪고 창수는 다시 빅토르 앞에 섰다. 부어오른 눈두덩이 아래 여전히 형형한 창수의 눈빛은 빅토르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강단도 좋구나. 그래, 네가 짐승이 아니란 건 스스로 증명해야지. 환영한다, 꼬마야. 얘들아! 우리 식구 막내로 잘 키워 봐라.”

사흘간의 매 맞기는 미켈슨의 시청 경비단이 청홍 일대의 폭력조직이었던 과거에 치러졌던 신고식이자 자격을 증명하는 시험이었다. 시험을 통과한 김창수는 암담 시청 경비단의 산하 조직인 유격대 대원이 되었다. 검문소에서 유격대원과 만난 불운이 그의 운명을 바꾼 순간이었다.

“개인 임무는 처음이지? 부단장님 직속 명령이다. 네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기회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러 창수는 스무 살의 어엿한 청년 유격대원이 되었다. 그런 창수에게 경비단 부단장으로 승진한 빅토르의 밀명이 내려왔다. 연합군 기갑창고를 담당하는 인간 관리자의 거주지를 알아내라는 명령이었다. 창수는 더 이상 숲의 아이가 아니었다. 연합군과 관계된 명령의 위험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는 도시의 아이이자 빅토르의 아이, 나아가 미켈슨의 아이였다.

창수는 연합군 기갑 창고의 인간 관리인이 이상군이며 그의 거주지가 진양 5번가 생봉 단지 303동 102호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나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4년을 유격대 대원으로 복무하며 창수는 암담 시 전역의 지리를 손금 보듯 볼 수 있었다. 창수는 빅토르가 이상군을 찾아갈 때 동행시킨 다섯 명의 부하 중 한 명으로 그를 따라갈 수 있었다. 집에서 곤히 자고 있던 상군을 깨워 거실 의자에 묶는 창수의 손길은 날래고 정확했다.

“그래, 민철용. 기갑 로봇 80기를 빌려주면서 재미있는 조건을 걸었다던데, 누구 지시로 그런 걸까?”

“그, 그,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상군의 외침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창수가 몽둥이를 들었다. 빅토르가 손을 들어 창수와 단도를 든 또 한 명의 대원을 제지했다. 창수는 빅토르의 비밀 작전을 함께 하며 희열을 느꼈다.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순수한 복종의 기쁨이자 집단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희열이었다.

연합군 남동해상여단장이 휴머노이드 병력을 이끌고 암담 시청에 도착했을 때 빅토르는 세 명의 유격대원들에게 휴머노이드 병력의 동태를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 창수는 명령을 받은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이 그를 살렸다. 평소라면 치안유지본부의 막사에서 잠을 잤을 창수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시청 청사에 있었다. 새벽녘을 틈타 휴머노이드 병력은 경비단 병력이 주둔해 있던 치안유지본부를 습격했고 창수는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청사를 점거하기 위해 몰려든 휴머노이드 병사들을 피해 창수는 청사 조리장 뒷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청사 뒤편의 으슥한 뒷골목에서 창수는 엉망으로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부단장님!”

쓰러져 있는 사내는 휴머노이드의 습격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빅토르였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의 옆면을 지나 그의 턱수염까지 적시고 있었다. 신속하게 응급 지혈을 마친 창수는 빅토르를 등에 업었다. 연합군의 시청 점령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어디로 피신해 있어야 하는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는 한 곳뿐이었다.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힘내십시오, 부단장님.”

아버지를 업고 오두막에서 암담시를 걸어왔던 열여섯의 창수는 스무 살이 되어 이번엔 빅토르를 업고 암담시에서 오두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암담시 전역을 훤히 꿰고 있는 창수였지만 빅토르를 업고 가는 여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암담시까지 이틀이 꼬박 걸렸던 열여섯의 창수와 달리 스무 살의 창수는 만 하루 만에 오두막에 당도했다. 열여섯의 창수와 달라진 점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열여섯의 창수가 업고 있던 아버지는 차가운 시신이 되었었지만 스무 살의 창수가 업고 온 빅토르는 아직 살아 있었다. 창수는 폐가가 된 오두막의 더러운 나무 침대에 빅토르를 눕혔다. 창수는 빅토르를 간호하며 폐가가 된 오두막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었다.

“깨어나셨습니까.”

다시 꼬박 하루가 지나고 이른 아침의 햇살이 산을 깨우는 시간에 빅토르가 정신을 되찾았다. 빅토르는 시커먼 얼굴에 드문드문 엿보이는 앳된 인상의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창수구나. 여긴 어디냐.”

“제 고향입니다.”

창수는 담담하게 4년 만의 귀향을 선언했다. 천생원에서 자신을 받아왔을 나무꾼 아버지를 4년 전의 창수는 살릴 수 없었지만 유격대원으로 자신을 만들어준 빅토르를 지금의 그는 살릴 수 있었다. 창수의 눈에 빅토르와 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빅토르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빅토르는 그의 충직한 유격대원 김창수를 시켜 대범하고 은밀하게 암담시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그가 가져온 사설 신문과 관보를 통해 빅토르는 미켈슨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켈슨의 죽음은 암담에서 시청 세력을 축출하겠다는 연합군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문을 쥔 그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빅토르가 연합군의 기갑 창고 관리자였던 이상군을 족쳐 알아냈던 정보엔 불법 법관들의 세력이 있었다. 천자클럽 소탕 작전 당시 기갑팀장이었던 민철용에게 제프리란 법관의 제거를 사주하고, 민철용마저 제거한 놈의 배후에 불법 법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빅토르는 이상군을 통해 그들이 한성시의 불법 법관들과 연락하고 있다는 정황도 파악했다. 빅토르는 성황이 연합군과 한 몸이나 다름없다는 미켈슨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법 법관들을 전국적으로 제어하고 연합군의 허가 코드도 얻어낼 수 있는 인물. 빅토르는 성황 이외에 다른 인물을 떠올릴 수 없었다.

성황과의 은밀한 협력에 대해 뒷조사를 한 사실을 알면 미켈슨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테지만 빅토르는 성황의 수상한 행태를 미켈슨에게 보고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채 보고를 하기도 전에 연합군은 미켈슨과 시청 세력을 순식간에 박살 내버렸다. 빅토르의 시선이 다시금 관보에 실린 미켈슨의 죽음에 꽂혔다. 쓴 입맛을 다시며 빅토르는 자신의 추측을 정리해 보았다.

미켈슨은 천자 클럽 소탕 작전의 목표가 제프리란 법관의 제거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민철용의 죽음을 미켈슨에게 보고했던 당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프리의 제거는 아마도 성황의 요구였을 것이다. 미켈슨은 그 대가로 연합군의 힘을 요구했을 것이고 미켈슨의 요청대로 성황은 연합군의 힘을 암담시로 불러냈다. 하지만 그 힘은 오히려 미켈슨을 제거했다. 과연 그것은 연합군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성황의 배신이었을까?

빅토르는 성황의 배신 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민철용의 말에 따르면 이상군은 제프리의 시신이 가짜라고 했었다. 제프리의 시신이 가짜였기 때문에 민철용은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제프리 제거라는 성황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성황은 연합군을 움직여 미켈슨을 제거한 것이다.

암담시 탐문을 마치고 온 김창수가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빅토르와 창수가 오두막에 은신한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빅토르는 자신의 몸이 거의 회복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창수에게 말했다.

“창수야. 용일산 타워로 가자.”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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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7 23.07.17 18 1 10쪽
96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6 23.07.16 18 1 12쪽
95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5 23.07.14 19 1 10쪽
94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4 23.07.12 18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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