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겁과 당근

백악관 상황실 비디오 룸
“주변 10km내의 모든 CCTV까지 샅샅이 조사했지만 외부침투의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담스 비밀경호국(United States Secret Service)국장의 보고에, 딕 부통령은 인상을 찡그렸다. 딕은 비상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죽거나 사고를 당하면 자동으로 대통령을 대신하도록 돼있지만 현재 조지 대통령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유령이 대통령을 납치라도 했다는 겁니까?”
딕의 시선이 FBI국장을 향했다.
FBI 과학수사부에서 조지가 사라진 대통령침실을 포함해서 백악관전체를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모리스 FBI국장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침입자의 흔적이나 대통령이 납치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리스는 조사할 만큼 했고 더 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라는 단서를 붙였다. 단정적인 표현을 삼가야 나중에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다.
“미칠 노릇이군요.”
딕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미인을 본 10대 소년처럼 벌렁거리고 있었다.
‘제발! 나타나지 마라.’
조지의 임기는 아직도 2년10개월이나 남아있다.
일단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 현직프리미엄으로 재선은 자동코스나 다름없으니까 조지가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딕이 2009년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수 있다.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딕은 참담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도 황당하고 불행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위대한 미국은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맞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1초도 비워둘 수 없어요.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즉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해야합니다.”
해리스 법무장관이 딕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딕, 해리스, 밴은 조지정권의 핵심 3인방이다.
하지만 국토안전부장관이 제동을 걸었다.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바로 승계할 수 있는 경우는 대통령이 면직, 사임, 사망했을 때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에요. 법무장관이 말한 수정헌법 25조 1항은 현 상황에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이대로 혼란을 방치하자는 거요?”
“대통령이 사라졌는데 어떤 증거나 흔적도 없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건 백악관 내부에 조력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쿠데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
국토안전부장관이 쿠데타를 언급하자 상황실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상식적으로 조지 같은 실종케이스는 국토안전부장관의 말처럼 내부자의 도움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쿠데타라는 말이 나온 이상 참석자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제부터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했다.
상황실 안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
예상대로 백악관은 대혼란에 빠졌다.
차라리 시체라도 있었으면 법에 따라 권력승계가 이루어졌을 텐데 대통령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고 백악관내부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방향으로 치달아서 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딕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은 조지가 실종되고 38일이나 지나서였다.
그래서 그동안은 내부에서 권력투쟁하기도 바쁜 상황이어서 한국의 외환거래와 해상수출입을 차단해서 동맹국을 적으로 만들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딕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밴이 전화해서 백악관의 돌아가는 상황을 말해주었지만 도건은 그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딕은 조지가 실종됐던 장소인 백악관 2층 대통령침실을 일부러 자신의 침실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남자다움을 강조해서 마초적인 보수층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쇼맨십이었는데 대통령침실에는 도건이 만들어놓은 블루서클이 여전히 존재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딕이 조지보다 더 강성이야. 오늘내일사이로 한국정부에 다시 텐 수출을 금지하라고 요구할 거야. 나도 이젠 진짜 커버 못해준다.
그놈의 커버해준다는 소리는!
딕은 대통령이 되면서 밴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CIA국장에는 자신의 심복을 앉혔다.
미국의 부통령자리는 원래 영양가 없는 자리지만 밴은 딕 정권에서도 실세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CIA국장이었을 때보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지위보다는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서 권한과 힘이 결정되는 것은 미국도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으니까 넌 지금처럼만 해줘.”
-근데 텐 판매점을 너무 많이 짓고 있는 것 아냐? 어쩌려고 그래?
밴에게 무성산 텐 저장고 말고도 비축분이 더 있다고 말해줬지만 구체적인 양은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하면 비축분이 금방 동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만 알고 있겠다고 약속하면 비축분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주지.”
“오케이! 약속할게.”
“5,000억 배럴.”
-뭐?
“5,000억 배럴이라고.”
도건은 놀리듯이 숫자를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말도 안 돼!
“나한테 이득 될 것도 없는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
-그런 거대한 저장고를 만들 시간도 없었잖아! 어디에 만들었는데?
“그건 비밀이야.”
도건은 밴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곧 딕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러라고 말해준 것이다.
딕이 중국에 대한 텐 수출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와는 함께 할 수 없다.
도건은 밴을 미국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딕까지 또 사라진다면 밴은 연이은 대통령실종이 도건과 관계있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밴이 애국자라면 도건을 죽이려고 하겠지만 그는 그럴 위인이 못된다.
적당히 자존심을 세워주고 확실한 보상을 해준다면 밴과는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도건은 밴과 통화를 끝내고 판교 텐 본사로 향했다.
1시간 후, 텐 회의실
오늘 회의에는 대성자동차그룹과 선대자동차그룹 임직원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텐 영업팀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2002년 5월11일 현재, 미국 50개주의 인구10만이상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16,500개의 텐 판매점을 개설했습니다. 올해까지 50,000개로 늘릴 계획이고요.”
작년 말 기준, 미국의 주유소숫자는 172,200여개인데 텐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려면 판매점이 최소한 5만개는 되어야한다.
“선대자동차의 강민혁입니다. 아직 텐 허가를 받지도 않았는데 너무 공격적인 확장 아닌가요?”
선대자동차 글로벌마케팅팀장의 지적에 도건이 대신 대답했다.
“제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어요.”
“회장님, 미국정부는 텐 판매를 허가하지 않을 겁니다. 중국에 대한 텐 수출금지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석유업체들이 미국의회와 백악관에 엄청난 로비를 벌이고 있습니다. 회장님도 모르시지 않을 것 같은데 저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당연한 우려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텐 판매점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그에 맞춰서 영업 전략을 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을 만한 곳에 로비를 하고 있어요. 아마 빠르면 이달 안으로 판매 허가가 떨어질 겁니다.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고요. 선택은 선대자동차그룹이 해야겠죠.”
“그렇게 자신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으니 저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만 어째든 알겠습니다. 그런데 딕 대통령은 네오콘출신이라서 조지보다 더 중국에 강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중국에 대한 텐 수출을 금지하라고 우리정부에 실력을 행사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놈 쓸 만한데!’
도건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똘똘했다.
강민혁이란 이름을 머릿속에 메모했다.
“대비책은 있지만 지금 말해줄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일개 팀장인 저에게 성심껏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적당한 아부로 자신의 인상을 나쁘지 않게 메이크업 할 줄도 알고,
강민혁이 더 마음에 들었다.
텐 영업팀장에 이어서 대성자동차그룹 해외마케팅팀장이 보고했다.
“이미 보고 드렸던 것처럼 저희 대성자동차와 쌍웅자동차는 한 건물 안에 함께 매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245개의 매장을 오픈했고 연말까지 4천개 매장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원래는 선대자동차그룹까지 참여해서 선대자동차, 신아자동차, 대성자동차, 쌍웅자동차를 함께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의 한국압박에 부담을 느낀 선대자동차그룹이 참여를 포기했다.
선대자동차그룹은 이미 북미에 영업망을 탄탄하게 구축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포기를 해도 타격 같은 것은 없었다.
“미국은 주州별로 휘발유 가격이 달라서 텐 판매가격도 그에 맞춰 책정해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텐 가격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가단위로 책정할 거예요. 미국도 어느 곳에서나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일단 리터당 2.5달러로 고정하세요. 미국 휘발유 소매가격이 리터당 50센트를 넘으면 그때는 그 인상된 가격에 비례해서 재산정하고요.”
“알겠습니다.”
리터당 2.5달러면 국내 판매가격과 같았다.
“중국 상황은 어때요?”
도건의 시선이 박영호 대성자동차 대표이사에게 향했다.
“타이오의 적극적인 협조로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8월말까지는 인구 100만이상의 52개 도시에 영업망구축을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네요. 계속 수고 좀 해주세요.”
“제 일인데 수고는요.”
회의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K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청와대에 텐 수출을 금지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기한도 안주고요?”
-네.
도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들 마음대로네요.”
-빠르면 내일부터 외환거래와 해상수출입이 전면 금지될 겁니다. 지금 청와대는 난리가 났고요.
“그렇겠죠.”
‘딕 이 개새끼!’
죽고 싶다면 죽여줘야지.
다음날 워싱턴시간으로 새벽3시,
도건은 조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딕을 B월드 그랜드산맥 절벽 아래로 던졌다.
그로부터 4시간 후,
밴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건은 여러 말 하지 못하게 선수를 쳤다.
“나, 마운틴 뷰에 있어. 주소 불러줄 테니까 바로 비행기로 와. 부통령이니까 그 정도 능력은 되지?”
-알았다.
밴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B월드를 거쳐 마운틴 뷰 집으로 이동했다.
20분후,
밴이 초인종을 눌렀다.
밴은 도건을 보자마자 말했다.
“너지?”
“······.”
도건은 대답하지 않고 푸른빛기운으로 밴 뒤편에 블루서클을 만들었다.
밴의 손을 잡고 블루서클로 들어갔다.
파아-
B월드 천강 강변
멀리 밴과 처음 만났던 스타벅스건물이 보였다.
밴도 천대용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도건은 밴이 어느 정도 진정됐을 때
파아-
B월드 그랜드산맥 천왕봉 절벽으로 이동했다.
천왕봉정상은 숨도 쉴 수 없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극한의 곳이지만 도건이 푸른빛기운으로 밴의 몸에 막을 씌워주었기 때문에 밴은 얼어 죽지 않고 평소처럼 호흡할 수 있다.
도건은 절벽아래를 가리켰다.
“이 절벽 아래로 조지와 딕을 던졌어. 고통은 없었을 거야. 잠든 채로 얼어버렸으니까.”
도건은 밴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넘실거렸다.
“걱정 마. 널 죽이려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니니까.”
“······.”
밴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산은 블루시티 북쪽으로 500km거리에 있는 천왕봉이야. 그랜드산맥에서 제일 높은 곳인데 여기 온도가 영하 80도쯤 돼. 근데 넌 하나도 안 추울 거야. 내가 네 몸에 보이지 않는 막을 씌워주었거든.”
“······당신은 신입니까?”
격식을 한껏 차린 밴의 물음에, 도건은 웃음을 터트렸다.
겁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다.
파아-
다시 B월드 1구역 집으로 이동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밴에게 건넸다.
벌컥벌컥-
밴은 단번에 500ml생수병을 비웠고 그제야 눈에 초점이 제대로 돌아왔다.
“스타게이트를 없앤 것도 당신이지요?”
“밴, 어색하다. 그냥 전처럼 말해.”
“너지?”
도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밴, 네가 날 거역하지 않는다면 넌 죽을 때까지 미국을 통치할 수 있을 거야. 선택해. 지금 죽을 거니, 아니면 나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래?”
공포만으로는 자발적인 협조를 끌어낼 수 없다.
세상은 복잡한 것 같지만 현학적인 말과 위선적인 행동을 걷어내면 욕망이 남는다.
부귀영화와 섹스가 인간욕망의 본질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죽겠다는 멍청이가 있겠냐?”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 상황인데도 밴은 금세 여유를 찾았다.
생각보다 담대한 구석이 있네.
“좋아! 그럼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백악관을 장악해.”
밴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한테 궁금한 점들이 많지만 급한 상황부터 정리하고 올게.”
도건은 밴을 마운틴 뷰로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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