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달그림자
연회가 끝날 즈음 절매검 이명진이 다시 장평이 있는 좌석에 찾
아오더니 곽홍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곽홍 아우, 옥소공자와의 대결중 염려해주어서 고맙네. 무엇보다
아우의 한 마디 조언 덕분에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고 이기게
되었네"
앞서 대결중에 곽홍의 충고대로 상대의 하체요혈만을 공격하지
는 않았으나, 그 충고를 통해 깨닫는 것이 있어 그가 양의심공을
적시에 운용한 것이고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곽홍이 절매검 이명진이라는 항주 청년층중 제일고수에게서 뭇 중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칭찬
을 듣자 그만 입이 기쁨에 찢어지며 말했다.
"하하, 명진형님, 괜찮습니다. 소제도 그만 옥소공자라는 놈의 건
방진 행동에 울컥하여 한마디 한 것입니다. 옥소공자라는 얼굴만
희멀건 놈이 하체는 부실해보이더군요. 제가 진작 명진 형님에게
귀뜸을 하였어야 하는데..."
곽홍이 장평과 임숙영의 화재중에서 줏어들었다는 사항은 일체
모른체하며 의기양양한채 호언을 계속했다.
그때 마침 그 좌석에 들른 만리신개 또한 곽홍의 무공에 대한 뛰
어난 안목을 칭찬했다.
"하하, 본래 곽회주의 안목은 이 늙은이도 감탄할 정도로 예리한
일면이 있지"
그렇게 곽홍을 잔뜩 띄워놓고는 만리신개가 곽홍을 자기 자리로
데려가서는 현명진인과 무영노인에게 소개했다.
이미 만리신개가 현명진인과 무영노괴를 모종의 이유로 정의회
에 넣고자 계속 권유하던 참이었고 현명진인과 무영노괴가 그
등쌀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무영노괴가 곽홍을 가만히 보니 약간 덜떨어져 보이나
곽씨세가의 자제라는 유혹이 컸다.
'회주라는 녀석이 조금 모자라니 큰 사고는 치지 않을 것이고
항주에 있는 동안 돈주머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군'
무엇보다 이해타산이 밝은 만리신개와 충직한 장평이 가입했다
하니 무언가 정의회에 그가 모르는 가치가 있는 듯도 했다.
‘흐흐, 정의회라... 단지 먹고 소일하는데 정과 의리가 있는 모임
이겠지!’
무영노괴가 속셈을 굴리더니 현명진인을 향해 가입하기를 권유했
고 현명진인 역시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노인이 찬성하자 곽홍이 크게 기뻐하며 감사의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한번 며칠 내 환영회겸 모임을 저의 곽씨 세가에서
크게 열까 합니다”
노인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의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정원
의 말똥구리들 마냥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함께 생의 무
게를 밀며 가는 봄날 밤의 연회는 한 시진 정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연회가 끝나, 모두가 돌아갔고 장평 역시 마지막까지 남
아 있다가 자신의 방인 내원 2층 방으로 돌아갔다.
황유정은 먼저 들어와 자는 듯 했고 진용, 진명도 잠에 든 듯
했다.
장평이 창문을 열고는 창가 딱딱한 나무의자 위에 앉았다
황유정이 준 창가에 놓은 화분의 말리화는 이제 소담한 흰색 꽃
몽우리를 피우고 있었다.
장평이 계수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말리꽃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사형인 절매검 이명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옆방 지척에 있는데 그는 먼 구름 너머
를 보고 있었다.
밤하늘은 태양은 지고 태양의 그림자인 달은 떠서 태양이 없는
슬픔을 홀로 달래주고 있었다.
언젠가 임숙영이 말한 그림자의 숙명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달그림자인 것인가?’
밝은 불빛을 찾는 사람들의 시선은 빛을 향해 있는 법이었고 그
림자는 항상 빛 뒤에 생겨나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는 구분이 없고 하나이다’
사부의 말은 무공에 한하지 않았으나 무공과 달리 인생에 있어서
그 말이 지닌 깊이를 장평이 알기에는 더욱 어려웠다.
장평이 여러 생각 끝에 침대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잠결에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황유정이 옥소공자의 상대로 지명
한 자는 절매검 이명진이 아니고 장평 자신이었고, 그가 옥소공
자와 연회장 복숭아 수림 아래에서 싸우고 있었고 곁에는
황유정이 기대의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와아!-”
그를 응원하는 모두의 환호성이 들리고 그가 마음속에 좋아하는
소녀와 그가 아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나타내고 싶은
무의식속의 감정이 꿈에 나타나는 것이다.
평소 사부가 장평에게 직접 가르치지 못한, 그래서 사부가
항상 마음이 아팠다는,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
의 겸양과 바른 예의와 진정한 도리를 세상에 나가 필히 배우라는
사부의 마지막 유언의 말을 지키려는 장평의 의지가 꿈에서만은
잠시 풀어진 것이었다.
그때 꿈결에 누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장평! 장평!"
장평이 급히 깨어나서 보니 문밖에서 문을 급히 두들며 나지막이
그러나 초조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바로 황유
정의 목소리였다.
창밖은 산속 여우마저 깊이 잠든 새벽이 가까운 심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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