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3
현주는 쌍화차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아까 동기라는 남자가 남기고 간 냅킨은
테이블 위에 그냥 두었다.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쓴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 아니···아빠는 이게 뭐가 맛있다고 좋아하셨지?....
꼭 한약 먹는 거 같은데? ‘
11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소
쌍화차를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는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해진 아빠지만
평소 즐겨 드셨든 차를 통해 잠시 나마
기억하고 싶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커피숍이란 곳도
거의 못 가봤는데 아까 동기가 차 한잔 하자고
할 때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쌍화차를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승낙을 했던 것이었다.
늘 궁금했지만 혼자는 쑥스러워
못 마셨던 그것을 마침내 오늘 맛본 것이었다.
쌍화차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자
이내 동기가 생각났다.
무례한 행동을 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함이 묻어 나는 얼굴이었다.
선한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호감형 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랐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신 후
집이 풍비박산이 되었었다.
곱게 자란 어머니는 현주를 키우기 위해
일거리를 찾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누구도 일을 주지 않았었다.
그런 세월이 늘어날수록 어머니는 늘 불안감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면서 조금씩 정신 줄을 놓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독지가가 집에 쌀이며
현금을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주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두 모녀가 살아갈 정도의
도움을 받으며 다행히 대학교까지 입학한
현주는 작년에 늘 병을 달고 살았던
어머니마저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오직 엄마의 병 간호가 살아가는 이유였던
현주에게 더 이상 살아갈 명분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한 동안 있었지만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힘을 내 열심히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던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작년 10월 이후 독지가의 후원도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끊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서점에서 전공서적을 보던 중
가방이 바꿔지는 일을 당했던 것이었다.
독지가 분이 현주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문 앞에 합격 축하의 쪽지와 함께 선물해주신
가방이라 혹시 잃어버렸을까 봐 서점에서
심각하게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빨리 아르바이트나 가야겠다··· ‘
현주는 처음부터 동기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 앞에 있는
써클케이에 가야 했기 때문에
어차피 시간도 많지 않았었다.
24시간 편의점이 막 생길 때라 야간 아르바이트는
일반 커피숍의 주간 아르바이트보다 벌이가 나았다.
어차피 새벽 시간엔 손님도 많지 않아
틈틈이 책도 읽을 수 있었고 도서관 만큼은 아니더라도
공부나 리포트도 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 딸랑~~~~ ‘
“ 어!!···.알바학생 !!.. 시간 맞춰서 왔네···.수고해 그럼···. “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치고 현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편의점 남자 사장님은 때마침 들어온 현주를
반갑게 맞아주시고는 바로 퇴근을 했다.
" 네!! 사장님..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
" 어~~ 그래...중간에 간식도 챙겨 먹으면서 일해!!"
저녁 9시부터 주인 사모님이 나오는
새벽 1시까지가 현주가 일하는 시간이었다.
현주는 재빨리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을 나서 퇴근하는 사장님의 모습이 멀어지자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 음... 오늘 리포트가 뭐였더라?.. '
마침 편의점에 손님이 없어 리포트를 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남자 사장이 퇴근한 지 십 여분이 지났을 때
편의점 건너편 어두운 골목에 서있던 젊은 사내 두 명이
피우고 있던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더니 편의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자···.들어가볼까? ··· CCTV 없는거는 확인했어? “
“ 그럼···. 아까 담배사면서 확인했지.
계약한 경비업체도 없는 게 확실할걸?···카하하하 “
‘ 딸랑 ~~~~ ‘
“ 어서오세요··· 써클케이입니다 “
현주는 껄렁대면서 들어오는 두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을 보면서 노트에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두 사내는 컵라면이 있는 진열대부터 시작해
음료수가 있는 곳까지 한 바퀴 어슬렁거리며 둘러 보고 있었다.
이내 다른 손님이 없다는 걸 확인하더니 곧장 카운터로 다가왔다.
“ 어이···아가씨···. 저기 디스 두갑이랑
지폐 갖고 있는 거 몽땅 꺼내봐 !!···.크크크 “
“ 네?..... “
갑작스럽게 강도로 돌변한 두 사내를 마주한
현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별히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교육도
받은 게 없었다.
" 아가씨 뭐해? ... 빨리빨리 안움직여? "
앞에 선 두 사내가 재촉하자
현주의 입술이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얼어있는 현주를 보더니
두 사내 중 한 명이 카운터로 밀고 들어왔다.
“ 아이씨···.이 년이 왜 이리 굼떠!!
바쁜 사람 앞에 두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
‘ 땡~~~차악~’
금전 출납기를 능숙하게 연 사내는
안에 있는 지폐를 모두 비닐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덤으로 담배도 몇 보루 챙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내가 칼을 빼 들고 있었기 때문에
현주는 두려움에 얼굴을 감싼 채
구석으로 밀려나 떨고 있었다.
‘ 땡 ~~~~ ‘
강도질이 한창이던 그 때
갑자기 편의점 문이 열리더니 두 사내가 들어왔다.
순간 놀란 강도 두 명이 소리가 난 입구를 쳐다보았다.
칼을 들고 있던 사내는 칼 방향을 그쪽으로 향했다.
" 꼼짝 마!!!...다치기 싫으면 거기 가만히 있어!! "
강도의 외침에 들어서던 두 사내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서 카운터쪽을 쳐다봤다.
‘ ···.?? 동기씨..?? ‘
현주는 두 명중 한 명을 한 눈에 알아봤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편의점을 들어선 건
동기와 그의 친구 재윤이었다.
강도의 외침에 몸이 굳은 상태로 남자 네 명의
신경전이 벌어 지고 있었다.
" 현주씨!!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
" 어쭈!!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네...이것들이..
어서 꺼지지 못해? 누구 하나 피를 봐야 정신 차릴거야? "
강도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는지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서로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고
눈싸움만 1분이 되어갈 때 동기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현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게걸음으로
진열대 옆으로 이동한 동기는 판매중인 긴 우산을 집어 들었다.
"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한 번 해보자는 거야?...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이 칼 안보여? "
정적을 깨는 동기의 움직임이 두 강도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대충 칼만 들면 겁을 먹고
순순히 물러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공격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당황을 한 것이었다.
" 자!! 지금 빈손으로 나가든지... 아님 나랑 한 판 뜨던지!! "
강도가 협박을 해도 동기가 감정의 기복도 없이
결투를 얘기하자 편의점 안의 분위기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 이 새끼들 저렇게 긴장한 거 보면 단순한
동네 양아치일 확률이 높아!!.. 진짜 큰 일 나기 전에
빨리 정리를 하는 게 좋겠어... '
동기가 자신 있게 저들을 도발한 건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 자신이 태권도와 검도 유단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남자 답게 키운다고 격투에 관련된
학원이란 학원은 다 다니게 하셨다.
처음 편의점을 들어와서 닥친 상황에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펴보니 대단한 불량배가
아님을 격투기 고수 답게 간파한 것이었다.
‘ 타탁···탁탁탁···. 야~~~~~잇 ‘
동기의 기합소리와 함께 상황은 순식간에 싱겁게 정리되었다.
우산 하나로 두 명의 양아치를 때려잡는 건 검도 유단자인
동기에게는 손쉬운 대련 수준이었던 거였다.
옆에 서있던 재윤이는 이 상황을 당연하게 예견한 것처럼
상대가 쓰러지자 바로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 정말 감사해요···.두 분이 안 오셨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뻔 했어요 “
현주는 자신이 당했을 지 모를 상해 따윈 관심도 없었다.
다만 돈을 강도 당했을 때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거의 한 달치 알바비를 물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공포스러웠다.
' 에~~~~~에에엥~~~'
재윤이가 신고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지역 순찰대 경찰 두 명이
바로 도착했다. 동기에게서 상황을 전달 받고 현주에게는 피해 상황을
묻더니 두 양아치에게 수갑을 채우고 경찰차로 데려갔다.
경찰이 떠난 뒤에야 진정이 된 현주가 동기와 재윤이를
보더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정말 감사합니다...두 분이 안 오셨다면 큰일 날 뻔 했어요 "
현주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다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후부터 이상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
것이었다.
“ 아 !!.... 그런데 여긴 어떻게 ···.?? 혹시 이 근처에 사세요? “
때마침 동기가 등장한 이유가 궁금한 것 이었다.
“ 아??···.그게···.하하하 “
동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이 얘기하면 또 혼내실 거 같은데······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말씀드릴게요··· “
“ 여기 얘가 제 가장 친한 친구 재윤인데요
사실 오늘 이 놈과 약속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현주씨를 만나면서 제가 이 놈 바람을 맞혔죠..
근데 저도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온 사이
현주씨가 독수리 다방에서 가셨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이 놈과 만나기로 한 민들레영토를 갔었어요···
그리고 제가 현주씨 만난 얘길 했더니 이 놈이
오늘을 넘기면 인연이 안 이어진다고 저한테
꼭 오늘 다시 만나러 가라는 거예요···하하 “
동기가 겸연쩍게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재윤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의 공을 알아 달라는 식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데 제가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
현주는 동기의 얘기를 들어도 풀리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아까 만났을 때 자기가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말이다.
“ 아??···.그게···.에······아까 가방 바뀌었을 때
노트에 있는 이름만 본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시간표도 봤었거든요···거기에 저녁 9시부터
성수동 써클케이 아르바이트라 적혀있길래
속는 셈 치고 한 번 와봤죠···. “
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화가 날 내용이었지만
방금 전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동기가 고마웠다.
좋게 해석하자면 그의 관심이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준 격이니 말이다.
자라오면서 누군가의 관심이라고는 받아 본 적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낯설었지만 동기라는 사람에게서 그 동안 갈망하던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졌다.
“ 지금은 일하는 중이라 더 이상 힘들겠지만
동기씨가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 토요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나요··· 도와주신 거에 대한
답례로 제가 식사 대접할게요..재윤씨도 시간되시면 같이 오세요 “
“ 아 !!!....정말요?......감사합니다···그럼 토요일에 뵐게요..
아? 그리고 아까 제가 적어드린 연락처는 챙기셨나요? “
“ 아?···.. 죄송해요··· 아까 까지만 해도 별로 내키지 않아서··· “
“ 아!!···네네..괜찮습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적어드릴게요··· “
현주가 아직 근무시간이라 동기와 재윤이는 다시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동기는 재윤이의 뺨에 뽀뽀를 쪽했다.
이 모든 게 재윤이의 닥달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 토요일 교보문고 !!.. 토요일 교보문고!!....토요일 교보문고!! “
동기는 신나는 마음에 계속해서 약속을 되뇌였다.
“ 으이구··· 이 화상아 !!! 그리 좋냐? ···.. 옛다..이거나 먹어라 !! “
재윤이가 동기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쥐어 박으며 저 멀리 도망쳤다.
" 야 쨔샤!!!! 더 때려도 돼!!! 재윤아~~~~ 고맙다!!!
그리고 너는 토요일에 안나와도 되는 거 알지?
그날 보이면 죽는다?~~~~~하하하... 알겠지? "
저 멀리 도망을 가던 재윤이가 동기의 외침을 듣더니
뒤를 돌아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머리 위로 올렸다.
동기는 그 모습마저도 예쁘게 보였다.
지금 동기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베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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