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3화 캣그라스 (1)
라그는 아차 싶었다.
‘설마 묘인족에게도 캣그라스가 필요했던 건가?’
캣그라스는 고양이들이 먹는 풀이다. 품종이 딱히 정해진 건 아니다. 밀싹이나 보리싹을 많이 쓸 뿐.
고양이가 풀을 먹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캣그라스라고 해서 실제로 급여하는 집사님들이 많다.
소화에도 도움이 되고, 그루밍으로 쌓인 헤어볼을 토해내게 하는 기능도 있고, 채식으로만 챙길 수 있는 영양도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나 개가 풀을 뜯는 건 본능이다.
개체마다 다르지만 취향까지 맞으면 환장한다.
“야!”
라그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맥주를 위해 심은 보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걸 서슴지 않았다.
라그가 움직이자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묘인족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라그의 텃밭에서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라그의 발걸음이 멈췄을 때 그의 손은 젠타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젠타는 보리싹을 씹어 먹다가 딱 붙잡혀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이렇게 목 뒷덜미를 붙잡히면 움직임을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뒷덜미를 붙잡는 걸 ‘클립노시스’라고 하는데 이게 고양이 진정 버튼이었다.
“마스터, 조금만······ 조금만 더 먹게 해주십시오.”
젠타는 간절했다. 하지만 라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종자가 많지 않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풀을 눈앞에 두고 못 먹다니······!”
젠타는 많이 아쉬워했지만 라그로선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집에서 수제 맥주를 만들어 마실 요량으로 종자원에서 받아온 품종은 그 양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아예 보리싹이 목적이라면 대체할 품종이 있었다.
밀싹이나 보리싹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그것들로 클렌즈 주스를 타서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특수작물 재배에 관심이 많았던 전생의 라그는 밀싹용과 보리싹용 종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거보다 더 좋은 풀을 먹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이거보다 정말 더 좋은 풀입니까?”
“아예 새싹만 수확하려고 만들어진 품종이 있어. 먹어보면 이거랑은 비교조차 안 될 거야.”
낱알이 아니라 싹이 목적이라면 그에 맞는 품종을 재배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품종들이 있었다.
밀이라면 밀싹용으로는 ‘새금강’이 제격이다.
건면용 품종인 ‘금강’과 이를 모본으로 만들어진 ‘올그루’라는 품종을 인공교배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리싹용은 ‘흰알보리 1호’. 파종하고 일주일 정도면 보리새싹을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르다.
게다가 수확량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기능성 물질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대한민국 농촌진흥청, 만세!
* * *
며칠 후.
라그의 방에서 묘인족 암살자들의 폭풍 먹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쩝쩝거리며 밀싹과 보리싹을 씹어대는 그들을 라그는 어머니 마리안과 함께 보고 있었다.
“보셨죠?”
라그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러자 마리안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고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풀에 이렇게 환장을 할 줄은 몰랐네? 그런데 아들, 왜 이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
“묘인족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우리만 생산할 수 있다면 다음에 뭘 할지는 뻔하잖아요? 씨앗을 심고 이틀이면 수확할 수 있죠. 기호성은 보시다시피고요.”
“저렇게 좋아하니 파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마리안이 말끝을 흐리는 걸로 봐선 다른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 뭐가 마음에 걸리세요?”
“수인 왕국까지 마차에 싣고 가는 동안 시들어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역시 운송이 문제였다.
변경령은 수많은 나라들과 접경하고 있긴 하지만 수인 왕국과는 접경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땅을 거쳐 가야 한다는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옮길 물건이 풀이라는 점이다.
“변경령에서 수인 왕국의 국경까지 마차로 빨라도 나흘은 걸리겠죠.”
“국경에서 또 도시로 옮겨져 시장에 풀릴 때까지의 시간도 생각해야지. 그러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고 봐야 해.”
“여름에는 수확한 풀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짓물러질 거고요.”
“그러니까 수인들이 아무리 좋아하는 풀이라고 해도 수인 왕국까지 운반하는 건 무리라고 봐야지. 아깝지만 포기해야지.”
그러자 라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머니,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최대 보름까지 신선한 상태로 운송할 방법이요.”
“하루면 숨이 죽을 거고, 지금 날씨에도 사나흘이 고작일 거야.”
“차갑게 보관할 수 있어요.”
“어떻게······?”
“레이첼이 차가운 바람을 뿜어내는 마석을 개발했거든요. 그래서 이 저택의 식량 창고 하나랑 수레의 짐칸에 올릴 크기의 냉장고를 만들었답니다.”
“냉장고······?”
마리안은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하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대화의 맥락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얼음산에 굴을 파서 얼음을 보관하면 한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
“밀폐된 공간을 차가운 바람으로 채워서 음식이나 식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거예요.”
“보름이나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네 외삼촌들 부른다?”
“상단을 호위하는 건 걱정 마세요. 제가 저 녀석들을 데리고 처음에 한 번은 수인 왕국에 다녀올 생각이니까요.”
라그는 말끝을 흐리며 지금 캣그라스로 먹방을 찍고 있는 묘인족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리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은 아낄 수 있겠네.”
* * *
변경령 남부 도시 르베인. 늦은 밤 영주관.
발츠는 복도에서 누군가와 스쳐 지나치며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얼굴이 보이는 상대가 아니었다.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뒤돌아본 발츠는 상대의 뒷모습에서 지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때 그 수인. 그래! 한 달 전쯤이었어.’
형 시몬이 라그를 암살하려 한다는 걸 알고 이를 알린 사람이 바로 발츠가 아니던가.
‘설마 변경백이 당했나?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설마······.’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페사레로 사람을 보내 라그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발츠가 빨리 발걸음을 옮기거나 말거나 상대는 느긋하게 시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시몬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몬을 보자마자 몸을 날렸다. 그리고 어느새 시몬의 목에 날카로운 칼끝이 살짝 파고들고 있었다.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대화를 하려고 했던 시몬은 예상 밖의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왜······ 이러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거야?”
“화를 낼 사람은 나잖소?”
시몬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암살을 의뢰하고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라그는 멀쩡하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도 할 말이 있었다.
“사냥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줬어야지. 그게 우리 거래의 조건 아니었던가?”
“줘야 할 건 다 줬소. 오히려 그 쉬운 의뢰 하나 해결하지 못한 당신들의 실력을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니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실패했다.”
“그럼 또 암살자를 보내는 게 원칙이라 들었는데······?”
시몬은 말을 하자마자 목에 닿아있던 칼 끝에 힘이 더 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핏방울 하나가 목선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래서인지 시몬은 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자는 엄청난 환수를 부리고 있었다. 그래서 두 번의 사냥은 모두 실패했다.”
“환수? 말도 안 돼. 라그, 그놈은 치유술사요.”
“소환술사의 적성도 가지고 있었나보지.”
“두 개의 적성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드물기는 하지만 두 개의 적성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시몬은 라그도 그런 부류일 거라 여겼다.
“그래서 또 언제 암살자를 보낼 거요?”
시몬의 말에 상대는 티 테이블 위로 돈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았다.
“사냥은 끝났다. 받은 돈은 그대로 돌려주지.”
“단 한 번도 이렇게 끝낸 적이 없다 들었소.”
“네 의뢰를 받은 덕분에 우리 길드는 끝장났다. 나도 네놈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지.”
“그렇다면 내게 고용되지 않겠소?”
“사냥감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얼간이랑 같이 일하는 건 사양하지.”
그러자 시몬이 화를 냈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생각 같아선 이 자리에서 네놈을 끝장내버리고 싶다만 의뢰인을 해쳤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참을 뿐이다. 앞으로 허튼 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면 다시 찾아오지.”
* * *
위벨이 손수건으로 목의 상처를 누르고 있던 시몬을 찾아왔다.
묘인족 암살자가 떠나고 위벨이 이 방으로 오기까지의 시간차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위벨도 묘인족 암살자를 봤던 모양이다.
“시몬, 어떻게 됐어?”
그러자 시몬은 대답 대신 티 테이블 위에 놓인 돈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가져가.”
굳이 풀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러난 윤곽만 봐도 돈이 들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 돈주머니를 처음에 시몬에게 줬던 사람 역시 위벨이었다.
“일이 잘 안 풀어진 모양이지?”
“암살은 안 될 것 같아. 묘인족 암살자 길드에 의뢰까지 해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다던 유명한 암살자 길드에서 맡았는데도 실패라고?”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 그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안 줘서 실패했다고 하네. 그 자식은 두 개의 적성을 가지고 있나봐.”
“그 망나니놈에게 적성이 두 개나 있다고? 놀랄 일이네.”
“쉽게 볼 일이 아니야.”
“무슨 적성이길래?”
“위벨,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 걸.”
“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아.”
위벨은 애써 라그를 폄하했다.
그러나 시몬은 달랐다.
묘인족 암살자 길드에서 실패를 선언했을 정도면 앞으로 라그를 암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치유술사로도 엄청난 능력을 보여서 변경에선 라그를 변경의 성자라고까지 불러. 그런데 묘인족 암살자들도 손발을 다 들 정도로 대단한 환수까지 불러냈대.”
“말도 안 돼. 시몬, 너도 그놈들이 하는 말을 다 믿지마. 기껏해야 수인이야. 짐승보다 조금 낫고, 사람보단 못한 족속들이지.”
위벨은 수인족이라는 종족 자체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제국은 인간 중심의 나라.
그 제국 안에서도 선제후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수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좀처럼 높이 평가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껏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묘인족 암살자 길드가 실패 선언을 했어.”
“계산을 때려보니까 손해 볼 것 같으니까 손 떼려고 하는 거잖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자 위벨은 시몬을 향해 턱짓을 하고는 되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암살은 글렀다고 생각해. 하지만 라그, 그놈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그래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면 시끄럽게 해야겠지.”
시몬은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는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왕국 연합을 충동질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변경이 아주 쑥대밭이 될 수 있으니 조심스럽지.”
“다른 하나는 뭔데?”
“페잔 평원 전투에서 란스미어 왕국의 왕이 전사했어. 란스미어 왕국군 일부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돌아가지 않았대.”
위벨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만지작거렸다.
“도적이 됐겠네? 그것도 변경령과 가까운 곳에서······?”
“확실치는 않지만 무리가 천 명이 넘는다는 소문이 있어.”
“라그에게는 병력이 얼마나 될까?”
“곁에 쓸 만한 기사가 하나뿐이고, 필두 마법사는 고작해야 2서클까지밖에 못 쓰는 견습마법사야. 병사들은 수십 정도인데 그마저도 죄다 노인들 뿐이야.”
“란스미어의 패잔병 부대가 페사레를 쳐서 왕의 복수를 한다······. 어때, 시몬? 제법 그럴듯한 얘기지 않아?”
“위벨, 라그가 다른 나라와 교역을 준비한다는 정보가 있어.”
“누구랑?”
시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진 몰라. 하지만 수레 수십여 대가 준비되었다고 해.”
“그래? 그럼 변경령 안으로 패잔병 부대를 들이지 않아도 라그, 그놈을 정리할 수 있겠네.”
“알겠어, 위벨. 교섭해 볼게.”
그러자 위벨은 티 테이블 위에 놓인 돈주머니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건 그냥 두고 갈게. 쓸데가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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