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계의 벽
수백 년 동안 인간들의 도시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벽 이 거대한 원형의 장벽을 사람들은 경계의 벽이라 불렀다.
" 질서 있게 줄을 서 주십시오 "
경계의 벽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이 거대한 철문을 통과해야만 경계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벽을 경계의 문 혹은 기회의 문이라고 부른다.
" 어허 밀지 마 "
그중 남쪽에 위치한 철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이 굳이 자신들의 터전인 평안시(平安市)를 벗어나 위험한 경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곳에 죽음과 함께 엄청난 기회가 공존하기 때문이었다.
그그그그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철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다들 무사귀환하길 바랍니다. "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든 병사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 살아올 테니 걱정마. "
경계 밖
흙먼지와 모래 바람들로인해 제대로 된 시야 확보조차 되지 않은 황색 빛의 세상은 화려하고 번화한 경계 안쪽과는 달리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 자 다들 출발하자고 "
그런 벌판을 낡을대로 낡아버린 10대의 트럭들이 질주하기 시작했고 그 맨 후미 트럭에는 20명가량의 사람들이 탑승해 있었다.
" 몇 살이냐? "
달리는 트럭 위 한 소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소년에게 나이를 물어왔다.
소년은 한눈에 봐도 너무 말라 볼품없어 보임과 동시에 어리숙해 보였는데 주변을 경계하다 노인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 어린놈이 귀가 먹었느냐? 나이를 물어도 대답이 없어! "
노인의 역정 섞인 목소리에 관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봤다.
" 열여덟입니다 "
" 열여덟? 허허 거짓말을 하려거든 남들이 속아 넘어가게 하거라. 인솔자가 정말 네 그 되지도 않는 거짓말에 속아 널 이 대열에 합류 시켜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멍청해도 정도란 게 있다. 그들이 어떤 놈들인데 어린아이 거짓말하나 파악하지 못할까. "
소년도 물론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경계 밖을 나오기 위해서는 열여덟이 최소 나이였기에 누가 물어봐도 그는 열여덟이라고 말할 것이다.
" 열다섯 정도인 널 담군 무리에 넣어준 걸 보니 소문대로 정말 일손이 많이 딸리긴 딸리나 보구나 "
노인이 자신의 나이를 정확하게 맞추자 관산은 고개를 숙여 비쩍 마른 몸을 한번 내려다보았고 노인은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관산에게 핀잔을 주었다.
" 웃기는 녀석이네 집에 거울도 없느냐? "
그때 트럭 맨 안쪽에 앉아 있던 40대 중년인이 관산을 두둔하고 나섰다.
" 노인장 소년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저래 봬도 이 일을 2년째하고 있는 베테랑이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저 아이보다 경력이 짧은 사람이 부지기수란 말이오 "
그는 바로 마철곡이란 이름의 중년 남자로 오래전부터 관산과 함께 담군일을 하고 있었고 종종 관산을 도와주곤 했었다.
" 거짓말하지 마시오. 저런 어린아이가 이 일을 2년째하고 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요? "
" 뭐 믿든 안 믿든 그건 노인장 맘이지만 사실이오 곧 관산이 이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아이란 걸 알게 될 테니까 "
그걸 끝으로 중년인이 피곤에 지친 눈을 감아버리자 노인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관산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트럭은 단 한번의 휴식조차 없이 몇 시간을 달렸고 한 낡고 버려진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중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각자 가지고 온 호신용 무기들을 꺼내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그때 구명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30대초반의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전달 사항을 건넸다.
" 문이 열리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남았다고 하니 그동안 쉬고 있어. 혹시 나락(那落)이나 기형수(奇型獸)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경계 소홀하지 말고.. 죽어도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데 이런 곳에서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
구명진은 그렇게 나가버렸고 같이 모여 있던 담군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평소 안면이 있는 자들끼리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 정 씨 오랜만이야 자네는 북쪽에서 주로 활동하지 않았나? 그런 자네가 남쪽까지 어쩐 일 이래? "
50대 중년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쪽 얼굴에 상처가 심한 50대 후반 남자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갔다.
" 양만이구먼.. 오랜만일세. 나 이제 북쪽으론 안 가 자네도 듣지 않았나? 며칠 전에 그곳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거 말이야 "
" 듣기야 했지. 근래 보기 드문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항상 그런 위험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
"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겪어보기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
"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설마! 그 사고 현장에 있었나? "
양만이란 남자가 놀라며 정 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 있었지. 지금도 그때 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속옷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매우 가까이에 있었어 "
정 씨의 말에 건물 속에서 같이 쉬고 있던 담군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그 사건이 뭔지 모르는 관산 빼고 모두들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오- 소문만 무성해 궁금했는데 도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좀 해보게 신문에 발표된 내용처럼 기형수들의 습격이었나? "
양만이 바짝 달라붙어 묻자 정 씨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 안돼. 수색대에 끌려가 조사받을 때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 받았어 "
" 이거 왜 이러나 자네 나 못 믿어? 내가 어디 그런 소리 떠벌리고 다닐 사람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만이라도 말 좀 해주게나 진짜 궁금해 미치겠다니까 "
" 아 이거 곤란한데. 뭐 좋네 같이 지낸 세월이 있으니 특별히 자네에게만 알려줄테니 이리 따라오게 "
양만이 재촉하자 정 씨가 마지못해 그를 한 쪽으로 끌고 갔다. 마침 그곳이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있던 관산이 있는 곳과 멀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관산에게도 두 사람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 일 신문에는 월광석 채굴장에 있던 헌터와 담군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던 각성자들이 모조리 기형수(奇形獸)때에 의해 몰살을 당했다고 발표 났었잖아. "
" 그렇지. 나도 그렇게 봤었으니까? "
"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가 월광석(月光石)을 채굴하고 있었던 것도 맞고 나 빼고 전부 몰살을 당했다는 것도 맞지만 우리를 습격한 건 기형수가 아니었다. "
" 기형수가 아니었다고 그럼 뭐였는데? "
" 나락(那落) "
" 나락이었다고? 그런데 왜 기형수라고 알려졌지? "
" 그건 우리를 습격한 나락(那落)이 ...."
정 씨가 그날의 참상이 떠올랐는지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고 양만이 재촉했다.
" 나락이 뭐..? "
" 그 나락들은 외부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광산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 나온 각성자들이 갑자기 폭주를 하는 바람에 만들어진거야 "
" 뭐? 그게 정말이야? "
" 헛 "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관산이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정 씨가 그런 관산을 돌아봤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 각성자들이 동시에 폭주를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
" 정말이야. 세명이 한꺼번에 그랬다니까. 그때 마침 대변을 보러 근처 숲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갈기 갈기 찢겨 놈들의 한끼 식사거리가 됐을 거야 "
" 천운이군 천운이야. 확실히 예전부터 자네는 악운에 강한 면모가 있었지...근데 자네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으면서 한 달도 되지 않아 또 경계 밖을 나온 것인가? "
양만이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표정으로 정 씨를 바라보자 정 씨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 나라고 또 나오고 싶었겠나. 웬수같은 마누라가 돈 벌어 오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던대 죽었으면 죽었지 집에는 못 붙어 있겠더라니까 "
" 저런..사는게 다 그렇지 힘내게 "
남일같지 않았는지 양만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정 씨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 우리 공주만 없었어도 진즉에 갈라서는 건데 "
" 자네를 판박이같이 닮았던데 그런 딸이 자네 눈에는 공주처럼 보이나 보구먼..."
" 뭐? 양만 자네 못 본 사이에 간덩이가 많이 커졌군 그래 "
" 아하하 농담일세 농담이야 "
이후 두 사람은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유부남들의 비애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고 관산도 이내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쯤 처음 그들을 데리고 왔던 구명진 다시 나타나 쉬고 있던 담군들을 다시 트럭에 태우고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트럭은 다시 한 시간 정도 달려 거북이를 닮은 돌산에 도착했다.
" 도착했으니 다들 내리라고 "
구명진의 인솔에 따라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돌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삼십분 정도 산을 올라가자 꼭 거북익 등딱지처럼 생긴 평평한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대부분은 관산과 한번 쯤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지만 새로 온 이남 일녀의 각성자들은 그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 전에 왔던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네..'
이남 일녀는 남자들은 이십 대 중반이었고 여자는 십 대 후반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질감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중에 청바지에 흰색 티 하나만 걸치고 있는 여자는 관산이 살면서 봤던 여자들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여자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려 관산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관산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후 그게 오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관산이 여자에게 걸어갔다.
" 왜 부르시는.."
그가 여자 앞에 서서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여자가 다짜고짜 관산의 뺨을 후려갈겨 버렸다.
짜아악
" 크흐흑 "
그 손속이 얼마나 매섭던지 관산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잠깐이지만 정신까지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런 상태로 무려 2미터나 날아가 처박혀 버렸다.
관산은 불시의 일격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한 번으론 만족하지 못했던지 여자가 다시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이런 썅년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화가 치밀었지만 감히 각성자에게 그 불만을 토할 용기까지는 없어 치미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던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가면 눈을 뽑아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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