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좋아하지 마라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 줄 테니까 '
관산이 차수현의 뒷통수에 복수를 다짐하는 그 순간 양쪽에서 1차 대결할 사람이 걸어 나왔다. 차 씨 남매에서는 둘째 차종호가 나갔고 오 씨 형제 쪽에서는 셋째 오삼이 나왔다.
두 사람이 3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서자 양쪽 진영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뒤쪽으로 멀찍이 물러나 대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충분한 거리가 벌어졌다 생각되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첫 대결이 시작됐다.
쾅
주먹과 발이 마주치자 공간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터져 나왔다.
각법을 쓰는 차종호와 권법을 쓰는 오삼은 한치의 물러섬 없이 초 근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파괴력은 차종호가 앞서 보인 반면 섬세함은 오히려 나이가 적은 오삼이 뛰어나 보였다.
두 사람은 일진 일퇴를 거듭했으며 관산의 눈으로는 쫓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공수를 주고받았다.
양쪽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관산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두 사람의 동작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 설마 풋워크? '
엄청난 몸 놀림으로 차종호의 주위를 맹렬히 돌아다니고 있는 오삼의 스텝이 꼭 복싱 기술인 풋워크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 설마 아니겠지 '
부정해봤지만 싸움이 깊어질수록 의구심은 깊어갔다. 이후 관산은 꽤 오랜 동안 실체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바로 차종호가 사용하는 각법이 태권도 발차기 동작과 아주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역시도 처음에는 우연이겠지 생각했지만 대결이 길어질수록 반복되는 동작으로 인해 확신이 들어버렸다.
' 그렇구나 많은 부분이 변형되긴 했지만 차종호의 각법은 태권도 동작과 아주 유사하고 오삼의 권법에는 복싱의 기술이 상당히 녹아있어! 이자들 정말 지구의 무술 교본을 익힌거야 '
관산은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작년이었던가. 여느 때처럼 하늘 문에서 떨어진 쓰레기들의 선별 작업을 하던 중 관산은 실제로 태권도 교본을 발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심결에 던져 버렸는데 이렇게 활용이 되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 하긴 사용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
차종호가 사용하는 무술의 원류를 알게 되자 그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그의 다음 동작이 읽히기 시작했다.
' 이렇게까지 읽혀버리니 부정을 할 수도 없겠구나 '
그 덕분이 분명했다. 방금까지는 각성자들의 빠른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산은 오삼이 사용하는 기술까지 알아냈다.
' 블로킹(Blocking)과 스토핑(Stopping) 오삼은 아웃복싱을 구사하고 있었던 거야 '
볼 수 있게 되자 점점 대결에 빠져들었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관산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관심을 받아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차수현이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이 자식 설마 각성자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건가? '
차수현은 자신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 생각했지만 실제 관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자꾸만 어쩌면이라는 의구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 그럴리는 없겠지만 좀 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
대결은 무려 20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이미 한번씩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한 상태인 그들은 오래된 원한 때문인지 누구 하나 쉽사리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럴수록 대결은 혈투로 바뀌어 갔다.
' 이대로는 안돼. 이 이상 타격이 누적되면 내가 먼저 지쳐 쓰러지고 말 거야 '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큰 차종호가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전투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공격을 멈추고는 양팔로 얼굴과 가슴을 가리며 오른발을 들어 복부까지 보호하는 방어 동작을 취한 다음 슬금슬금 움직였다.
' 차종호 무슨 꿍꿍이냐 '
생전 처음 보는 자세에 오삼이 경계했지만 차종호가 계속 그 자세만 유지하고 있자 특별한 것 없다 생각했는지 다시 폭풍 같은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퍼벅 퍼퍼퍼퍼벅
초인들이 펼치는 현대의 무술은 색다르면서도 공포스러웠다. 각성력이라는 초인기가 더해진 주먹질은 이미 스포츠라는 틀을 넘어섰고 진정한 살인기예가 되었다.
' 무슨 속셈이지? '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차종호가 특이한 자세를 취하며 오삼의 공격을 전부 허용하자 의아해 했지만 관산 만큼은 차종호의 생각을 읽어냈다.
' 무에타이로 카운터를 노리고 있구나 '
차종호의 선택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철벽같은 수비자세로 오삼의 폭풍 같은 주먹질을 모조리 막아내는 것 만 봐도 차종호의 수비 자세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 수 있었다.
' 압도적인 힘으로 가드를 뚫지 않은 이상 지속적으로 옆구리를 공략해서 가드를 풀어야 해 오삼 '
[ 어린 녀석이 그런 건 어찌 아느냐? ]
관산의 훈수가 신기했던지 관천령이 불쑥 끼어들었다.
' 눈에 익은 수법이라 자연히 알아본 것 뿐입니다. '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 관산은 대충 그렇게 얼버무려 버렸다.
[ 챗 하여튼 비밀이 많이 녀석이라니까. ]
이후 관천령도 말없이 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관심을 끊어 버렸다.
[ 이 행성 인간들의 무술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수준이지만 파괴력 하나 만큼은 그럭저럭 쓸만하다..비록 그것조차 중원성(中原星)의 무인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
' 중원성? 무인? 설마 무협 소설에 나오는 무림(武林)을 말하는 겁니까? '
[ 오 너도 무림을 알고 있었더냐? 이놈 진짜 신기한 놈일세. 이 행성에서 까마득히 멀리 있는 무림을 어찌 알고 있지? ]
관천령은 진심으로 놀라 했지만 관산은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 정말 무림이라는 곳이 존재합니까? '
관산이 의뭉스러운 말투로 물어오자 관천령은 펄쩍 뛰며 열 받아 했다.
[ 내가 너 같은 어린아이하고 지금 농담 따먹기하고 있겠느냐? 믿기 싫음 믿지 마 마라 굳이 믿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
' 믿지 못 하는 게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세상이 사실이라고 말씀하시니 조금 당황한 것 뿐입니다 '
쾅
그때였다. 관산이 잠깐 한 눈 판 사이 방어만 하고 있던 차종호가 벼락같이 몸을 돌려 팔꿈치로 오삼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오삼이 황급히 가드를 올려 공격을 막긴 했지만 무시무시한 팔꿈치의 파괴력을 완전히 막아내긴 불가능한 방어였다.
" 크윽 "
아니나 다를까 공격을 막아낸 오삼이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리며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 제....길 차종호 이 개자식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
' 기회다! '
간신히 승기를 잡은 차종호는 마무리를 내기 위해 남아있던 각성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희미하지만 붉은색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와 몸을 감쌌다.
" 흥 그래 끝을 보자 차종호! "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은 오삼도 즉시 모든 각성력을 끌어올렸고 그의 몸에서는 희미한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 내가 할 소리다. "
그렇게 붉은색과 푸른색의 기운을 몸에 두른 두 사람은 다시 상대에게 달려들었고 최후의 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 빠르다! '
눈으로 쫓기도 힘든 두 사람의 빠르기
콰쾅
그들이 스칠 때마다 들려오는 포탄 터지는 소리로 간신히 두 사람의 위치 정도나 파악 할 수 있던 관산은 초인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강함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 저 두 사람 지금까지 전력을 다 하지 않고 있었구나. '
비록 더 이상 대결을 직관할 수 없어 아쉬움은 컸지만 그와 반대로 그의 마음은 각성에 대한 열망으로 맹렬히 불타고 있었다.
' 내게 과연 저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 '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간절하다고 해서 다 이뤄지는 게 아니었기에 오늘따라 쥐뿔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유난히 한탄스러웠다.
' 이왕 환생 할 거 좀 좋은 환경에 태어났으면 좋았으련만 '
암울하기만 한 미래를 생각하자 자동으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몰래 관산을 지켜보고 있던 차수현의 입꼬리가 한 쪽으로 살짝 말려 올라갔다.
' 흥 그럼 그렇지. 저런 녀석이 무슨 수로 각성자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겠어 '
아마도 그녀는 관산이 대결을 제대로 볼 수 없어 그 아쉬움에 한숨을 내쉰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긴박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으아아악 "
비명소리가 들린 직후 누군가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그가 누군지 확인하는 순간 관산의 눈에 낭패한 오삼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삼은 탈골된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나고 있었다.
" 크윽.. 젠장.. 내가 졌다. "
오삼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 와~ 큰 오빠 둘째 오빠가 이겼어요 "
차수현은 기쁨에 호들갑을 떨었지만 차상호는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로 돌아온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으로 기쁨을 대신했다.
" 고생했다. 이걸 마시고 상처를 돌보거라 "
" 감사합니다. "
차종호는 승리자 답지 않은 표정으로 차상호가 건네는 보라색 약병을 받아 마셨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자잘한 상처들과 출혈이 금세 회복되었다.
" 형님 오삼 저놈 어린 나이지만 실력이 제법입니다. 다음에 만난다면 그때는 정말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어요 "
" 너도 아직 젊은데 무슨 걱정이냐. 오삼이 발전하는 만큼 너도 발전할 테니 난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
동생의 출혈이 완전히 멎었다는 걸 확인한 차상호가 그제야 오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 오형 1:0 입니다. "
" 종호의 실력이 많이 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다음 대결에 들어가지요. 오이는 앞으로 나서거라 "
1승을 더 내어주면 패배로 끝날 상황에 오일은 의외로 자신이 아닌 동생 오이를 내보냈다.
" 오 형 그 선택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 전 제 아우를 믿습니다 "
" 뭐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
차상호는 이해할 수 없는 오일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차피 1승만 더 올리면 자신의 승리였기에 직접 2차 전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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