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5년 치 수명을 댓가로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알려줘 "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며 묻는 질문. 단명한다는 소리에 실성이라도 한 것인지 생각들수도 있겠지만 관산은 어느 때보다 냉정한 상대였다.
" 이 방법이 최상일수는 없겠지만 최악은 막을 수 있겠지 "
관산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이 방법이었다. 바로 처음부터 지불할 수명을 자신이 정하고 관천주에게 질문을 하는 방법 말이다.
그는 이 방법이라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자신했다.
" 물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위험도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질문 한 번에 모든 생명력을 빨리는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
[ 괜찮은 꼼수이다만 그런 방법으로는 최상의 답을 듣기는 힘들 것이다 ]
관천령의 말대로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컸지만 관산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 백원을 지불했으면 백원어치 답만 확실하게 들으면 되는 겁니다. "
데루르르르르 뚝
말하는 와중에 관천주가 구르기를 멈췄고 관산은 몸속에서 뭔가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드러난 관천주의 글자들..
[ 차(此) 흡명마공(吸命魔功 ]
" 흡명마공? 이곳에 흡명마공이란 게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어르신은 혹시 흡명마공에 대해 아시는게 있습니까? "
[ 호오. 오래전 실전된것으로 아는데 이게 이 행성에 있었던가? ]
" 뭡니까 흡명마공이란게. "
[ 흡명마공은 중원성에 있었던 혈교(血校)의 지존인 혈교존자의 독문 무공이다. 상대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지 들리는 소문에 혈교존자는 이 무공으로 무려 500년을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고. 하나 확실한 건 부작용이 굉장히 심하다는 거다. 웬만하면 익히지 않는 걸 추천한다. ]
" 어르신 5년 치 수명은 지금의 저에겐 절대 적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관천주가 흡명마공을 이야기했다는 건 그게 지금 저에게는 최선이란 말이지 않을까요 "
[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흡명마공은 위력으로만 보면 정말 대단한 마공이니까. 문제는 네가 그걸 손에 넣어도 익힐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
" 관천주가 흡명마공을 이야기했으니 제가 익힐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답으로 제시했을 겁니다. "
[ 하하 요놈 보게 이제는 나보다 관천주를 더 잘 아는구나. 어쨌건 서둘러라 이제 너에게 남은 수명은 고작 5년 뿐일 테니까 ]
" 비록 5년이지만 인간에게 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
이후 이틀 동안 꼬박 골방에 갇혀 있던 관산은 삼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맞을 수 있었다.
관산을 데리고 나온 차수현은 그를 이 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나름 저택이다 보니 2층에도 제법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 차수현은 그를 맨 끝 방으로 안내했다.
" 들어가서 박사님 말 잘 들어 "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 냄새가 섞인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이 정도 냄새 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그는 차수현을 따라 늙은 노 신사 앞으로 다가갔다.
" 이 소년입니다. "
차수현의 소개에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치료하던 노 신사가 관산을 돌아보며 그의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 이 소년이 정말 미어를 할 줄 안단 말입니까? "
" 박사님께서 확인을 해 보시지요 "
" 흠 그럽시다. "
노 신사는 웨건 위에 올려져 있던 수많은 병들 중 하나를 관산에게 건네며 물건의 이름과 용도를 물어왔다.
" 이게 뭔지 말해 보거라 "
관산은 병의 뒷면에 붙어 있던 성분표를 확인했고 그것의 이름과 용도를 노 신사에게 말했다.
" 지노베타딘 .. 입니다 "
" 용도는? "
" 상처..를 소독할 때 쓰는 약입니다. "
관산은 지노베타딘의 진짜 용도까지 알려줄까 하다 노 신사가 그걸로 상처를 소독하고 있어서 굳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 질염 치료제..하지만 소독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니까. 진짜 소독약이 없다면 쓸 수도 있겠지 '
" 흐음 훌륭하다. 조수로서 손 색이 없겠구나..좋다 앞으로 날 옆에서 도와다오. "
" 네 알겠습니다 "
" 박사님 소년이 마음에 드십니까? "
" 꽤 쓸만합니다. 저 정도 언어 실력이면 약을 잘못 처방해 낭패를 당할 일은 없겠어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
차수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관산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그날부터 관산은 자신을 제임스라고 밝힌 노신사와 함께 차 씨 가문의 막내이자 차수현의 쌍둥이 동생인 차수희를 치료하는 보조 일을 시작했다.
확실히 관산이 필요한 인재라고 느꼈는지 그날부터 차 씨 가문에서 관산의 대우가 달라졌다.
골방에 갇혀 있을 때는 맨날 보리로 만든 빵만 제공하던 그들이 치료 보조 생활을 시작하자 밥과 고기를 제공해 주었고 잠자리도 침대가 구비된 노 신사의 옆방으로 옮겨주었다.
본격적으로 환자와 마주한 날 관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환자가 차수현과 쌍둥이란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상처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차수희의 상처는 이강식일 때 봤던 고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장 촉수 몇 개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비주얼을 가지고 있어 관산의 눈을 의심케 했다.
" 박사님 혹시 이분 나락으로 폭주하는 중 아닙니까? "
관산은 자신의 예상을 제임스에게 물었고 제임스는 조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눈치가 빠르구나 맞다. 각성 도중 기운이 폭주에 이미 반 나락이 되어버린 상태다. 하지만 절대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갔다 간 너도 나도 죽은 목숨이다 "
" 조심하겠습니다 "
[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징그럽구나 ]
산전수전 다 겪은 관천령이 징그럽다 말할 정도였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지 짐작이 가리라 .
" 이런데 치료가 되긴 할까요?. "
" 굳이 치료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만 만들어 달라 했으니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
" 얼마 동안이나요? "
" 한 달.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야 "
' 한 달? 폭주는 순식간에 일어난다고 했는데.. 아닌가? '
제임스는 나름 이쪽 분야에서 명성이 높아 은근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치료 일주일 만에 무너져 버렸다.
" 젠장.. 이럴 리가 없는데 "
일주일 사이에 폭주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신체 변형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 팔과 다리는 이제는 사람의 팔다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버렸고 더 끔찍한 건 처음 관산이 상상한 대로 정말 가슴에서 촉수 한 개가 빠져 나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 큰일이다 폭주의 진행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어! 이 정도 속도라면 2주일은 고사하고 3일도 넘기지 못할 텐데 .. "
제임스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후시딘이라 적힌 연고를 꺼내 수희의 온 몸에 덕지 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그걸 본 관산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뻔했지만 제임스의 절박한 표정에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 그 연고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
"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구나 방법이.. "
제임스의 목소리는 이미 반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관산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의료 지식이라고는 응급처치 지식 정도밖에 가지고 있질 않아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이 여자가 이대로 완전히 나락으로 변한다면 과연 그들이 우리를 살려줄까? '
수십 번 생각해 봐도 대답은 절대 아니다 였다. 그들이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들을 살려둘리 만무했고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을 데려오려고 막대한 댓가까지 지불한 상태이지 않은가.
' 어쩌지 또 다시 관천주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내가 가진 수명은 고작 5년 뿐인데 이것으로 두 명의 생사가 직결된 일에 대한 온전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 '
만약 자신 혼자만의 생사만 걸렸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제임스와 어쩌면 수희까지 포함될지도 모르는데 세 사람의 목숨과 관련됐다면 백 번 양보해도 절대 가능할리 없었다.
그렇다고 제임스에게 관천주를 굴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관산 역시 정말 막막한 상황이었다.
[ 맞다. 관천주는 단 한 명의 주인에게만 답을 내어 준다. 저 노인이 관천주를 사용하게 하려면 네 목숨이 끈어져야 한다. ]
' 역시 그런거군요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던 막연한 생각에 관천령이 쐐기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보긴 해봐야 했기에 관산은 2년 치의 수명을 댓가로 관천주를 굴려보기로 마음먹고 질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야 그렇게 넓은 범위로 모호하게 물어서는 최상의 답을 끌어낼 수 없어 자칫하면 전혀 엉뚱한 답이 나올 수 있으니 핵심을 분명히 해서 직설적으로 물어야 해 '
관산은 한참을 고민해 드디어 질문을 완성했다.
' 내 수명 2년 치를 소비해 차수희의 폭주를 늦출 방법 '
관산은 살짝 뒤로 물러나 제임스 모르게 관천주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관천주 퍼즐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 혈(血) ]
' 피? 피로 뭘 어쩌라고? '
당장은 관천주가 말한 뜻을 곰곰히 생각했고 수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낸 다음 그 피를 수희의 상체에 떨어트렸다.
" 무슨 짓이냐? "
그 모습을 본 제임스가 기겁하며 제지했지만 이미 관산이 떨어트린 피방울들은 수희의 몸에서 빠져나온 촉수가 모두 먹어 치운 뒤였다.
" 이런! 너 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느냐 나락 기형수 마수들이 인간들의 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런 짓을 벌였느냐! "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제임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관산의 멱살까지 잡아 챈 상태로 눈을 부랄이며 다그쳐 왔다.
" 알고 있습니다. "
물론 관산도 충분히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관천주가 피라는 답을 내놨으니 그로서는 뭐든지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 상황이 그런데 뭐든 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
" 뭐! 이놈!! 오냐오냐 해줬더니 못하는 짓이 없구나 당장 이곳에서 나가 네 방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
예상치 못한 제임스의 축객령에 관산은 결국 방을 나와야 했다. 충분히 그가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관산은 제임스를 원망하는 자신이 벌인 짓이 결과를 가져와 주길 기도했다.
' 이제 내가 저지른 짓이 효과가 있기 만을 바라야 하는 상황이구나 '
만약 이 상황을 차 씨 남매가 알게 되거나 차수희의 증세가 더욱 안 좋아진다면 자신은 분명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관천주를 굴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남아 있는 수명조차 고작 3년뿐이라 관산은 조용히 방 안에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관산은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 제임스라면 살고. 차 씨 남매라면 죽는다. '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라 관산은 관천주를 오른손에 쥔 상태로 방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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