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최대한 몸을 숨기면서 주위를 살피던 관산은 하필 가장 보기 싫은 얼굴을 찾아냈다.
' 차수현..'
그녀는 웬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를 대동한 체 한 고급스런 식당에서 걸어 나왔고 슬그머니 남자의 팔을 만지작 거리며 가식적인 미소를 흘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저년 혼자 왔을 리가 없을 텐데'
관산은 분명 그녀만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 황급히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두꺼운 솜옷 몇 개를 꺼내 겹겹이 걸치기 시작했다.
" 춥니? 갑자기 옷을 왜 그렇게 많이 껴입어? "
" 몸살기가 좀 있는 것 같아서요 "
" 저런.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해줘"
" 예 걱정 하지 마세요 "
옷으로 대충이나마 체형을 가린 후에 주변을 세밀히 살펴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외에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계의 문 개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5분 후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작위가 있으신 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주십시오 "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의 말에 다섯 행렬이 문 앞으로 나갔고 그 행렬에는 관산이 포함된 은소향의 행렬과 의외로 관산이 의심했던 남자들의 행렬이 끼어 있었다.
'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관산은 이 상태로 5분만 버틴다면 무사히 창천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산에게 그런 행운이 쉽게 찾아올 리 만무했다.
[ 차종호다. ]
가장 우려했던 일이 관천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정말 차종호가 식당에서 빠져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젠장 ..차라리 차상호가 추격해 오길 바랐는데 '
차종호는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빨라 관산은 세 남매 중 그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는데 하필 차종호가 나타난 것이다.
' 어르신 놈의 동태를 계속 살펴 주십시오. 제가 그를 주시한다면 그는 각성자들의 예민한 감각으로 단번에 제 시선을 알아차릴지도 모릅니다. '
[ 알겠다 ]
두건을 깊이 눌러 쓴 관산은 최대한 차종호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차종호는 관산의 작은 키를 의심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5분만 5분 동안만 들키지 않으면 돼 '
그그극
드디어 경계의 문이 기계음을 토해내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관산의 뒤쪽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 지금부터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
경비병은 가장 먼저 다섯 귀족의 신분을 확인했고 그중에 상족보다 한 작위 높은 준족(峻族)이 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경례를 올렸다.
" 공손 각하 "
" 난 신경 쓰지 말고 절차대로 진행하라 "
" 예 각하 "
준족이란 작위는 상족에서 굉장한 공헌을 올려야 받을 수 있는 작위라 일반인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존재인데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 공손? 누구지? "
은소향이 궁금해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그 남자의 뒷모습만 볼 뿐이었다. 하나 확실한 건 그 남자는 신분에 맞지 않게 하인 하나 없이 혼자라는 것이다.
그런대 그때였다. 차종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관천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놈이 널 주시하기 시작했다. ]
그 소리에 관산은 심장이 내려 앉을뻔 했지만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했고 막 열리기 시작한 경계의 문만 주시하고 있었다.
[ 놈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래도 확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상태로라면 문이 열리기 전에... 잡힌다. ]
관천령의 다급한 경고에 관산은 미련 없이 주머니에서 관천주를 꺼냈다.
' 관천주 내 1년 치 수명을 댓가로 무사히 문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
[ 댓가가 적으면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 나올 수도 있다. 숙고해라 ]
관산은 관천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사위를 아무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트렸고 즉시 몸을 숙여 드러난 글자를 확인했다.
[ 분(砏) 모시립(謨施粒) ]
' 모시립? '
처음 접하는 단어였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나타나자 관산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 어르신 무슨 뜻입니까? '
[ 모른다. ]
관산은 당황했고 그때 차종호가 이미 그의 뒤까지 접근해 관산이 쓰고 있던 두건을 거칠게 벗겨 버렸다.
" 잡았다. 쥐새끼. 제법 발악을 쳤다만 개미가 발악을 쳐봐야 손바닥 안이지 "
섬뜩한 목소리에 관산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끝까지 관천주가 보여준 글자를 놓지 않았다.
' 모시립! 도대체 모시립이 뭐냐고! '
" 재롱은 여기까지다. "
몇 번을 생각해도 전혀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관산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모시립을 외치란 말인거야? '
관산은 자신의 생각을 믿어보기로 하고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모시립이란 단어를 연신 외치기 시작했다.
" 모시립!! 모시립!!! "
" 쥐새끼 같은 놈 또 무슨 짓거리를 벌이는 거야! "
차종호가 놀라 관산의 목덜미를 거칠게 끌어 당겼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관산에게로 쏠렸고 차종호는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15구역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쾅쾅쾅
강력한 폭발은 역장이 머물고 있는 고층 건물을 통째로 불태웠고 인당심과 조아민이 부하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모두 날 따라와! "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장내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경계의 문을 나가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들은 폭발에 휩쓸릴까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은소향을 포함한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아가씨 아무래도 테러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
" 알겠어요 "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챙겨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차종호와 관산 그리고 공손이라는 남자 만큼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 너 뭐냐?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
폭발에 놀란 차종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관산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 공손이라는 남자가 차종호에게 다가와 명령조로 말했다.
" 그 소년을 내려 놓거라 소년은 내가 데려가야겠다. "
" 각..하 "
차종호는 남자의 정체를 몰랐지만 이미 그의 신분은 들어서 알고 있어 감히 남자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각하.. 이 아이는 저희 집안의.. 죄인인지라..."
" 거짓말 하지마! "
관산이 차종호의 거짓말에 소리치던 그때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 옆에 있던 상인들이 놓고 간 가방에서 또 다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콰광
바로 눈앞에서 터지는 폭발에 관산은 순간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 폭발력에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똑 똑 똑
' 무슨 소리지? '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멀어져 있던 관산의 정신이 서서히 의식 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
관산의 정신은 빠르게 기억을 돼 살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모든 상황을 떠올린 그는 번개처럼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 동굴? "
생각지 못한 환경에 어리둥절 하고 있던 그때 관산의 눈에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남자가 앉아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준족 신분의 공손이라는 남자였다.
분명 죽었어야 할 상황에 살아있다는 건 누군가 살려줬다는 말일 터 관산은 그 인물이 눈앞의 남자 일거라 확신하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직 살았다 자신하지 말거라. 넌 이름이 뭐냐? "
" 신평입니다. "
" 진짜 이름.."
남자는 귀신같이 관산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 관산..입니다. "
" 나이는. "
" 열다섯입니다. "
" 열세살쯤 될 줄 알았는데.. 보기 보다는 나이가 많구나. 가족은? "
"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전 고아였습니다. "
" 복 받은 녀석이로구나. 요즘 징집을 피하려고 하는 부잣집 녀석들 대신에 전장으로 팔려나가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던데 넌 그럴 일은 없으니까.."
" 그렇.. 습니까? "
" 확실히 그렇다. 부모라는 존재가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굳이 귀찮게 널 살려서 이곳까지 데려온 내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다. "
남자의 분위기 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장난스러우면서 경건함이 있었고 나른해 보이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져왔다.
" 어떻게요? "
" 간단하다. 언제부터 나를 알고 있었는지 말해주면 된다. "
" 예? 제가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전 아저씨를 처음 보는데요? "
관산은 공손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을 들어냈다. 하지만 공손은 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관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허.. 네 이름까지 알고 있으면서 날 모른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냐? 세상 사람들 중 10명도 알지 못하는 내 진짜 이름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쳐 놓고서 이제는 발뺌을 하시겠다? "
" 예? 그럼 설마! "
" 맞다 내가 모시립이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 이름은 내가 어렸을 때 버린 이름이라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을 통 틀어 열 사람이 넘지 않는다. "
관산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주먹까지 쥐어졌다.
" 날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난 그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널 죽일 것이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고 "
' 제길.. 관천주가 최상이 아닌 차악을 내놓았구나 '
[ 공교롭게 됐구나. 하필 당사자와 맞닥뜨리다니 해명하기가 쉽지 않겠어 ]
관산도 같은 생각이었다. 살려고 외친 단어가 하필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귀족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줄이야.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명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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