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동굴로 돌아온 관산은 침실과 주방으로 이뤄진 석실에 쌓인 먼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무려 세 시간을 쓸고 닦은 덕분에 조금 지낼 만하게 변하자 관천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 아무래도 이곳에 기관이 설치된 거 같다. ]
" 기관이오? "
[ 그래 몇 군데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한데 일단 돌침상을 먼저 살펴보거라 ]
관천령의 말에 따라 돌침상으로 간 관산은 그곳을 바닥부터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비록 기관이란 걸 직접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어떤 형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전쟁에서 보았던 무협소설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참을 살펴봐도 눈에 띄는 점을 발견하지 못한 관산은 마지막으로 돌침상을 있는 힘껏 밀어보았다. 그런데 정말 꼼짝도 안 할것 같은 돌침상이 스륵하고 밀리는 것이 아닌가.
" 엇? "
[ 역시. ]
관산은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돌침상을 밀어냈고 결국 돌침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계단을 발견했다. 이후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횃불을 챙겨들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대략 스무계단 정도 아래로 내려가자 문조차 달리지 않은 세 평 크기의 지하 석실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는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백 개의 두루마리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 이게다.. 뭘까요? "
[ 글쎄다. 혁지(革紙)같긴 한데 일단 내용을 확인해 봐야 뭔지 알겠다. ]
관산은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검은색의 두루마리를 집어들어 그 외형부터 살피기 시작했고 이상이 없는걸 확인하고 나서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 어라? 이게... 무슨 문자죠? "
안타깝게도 두루마리는 관산이 생전 처음 보는 문자들로 빽빽하게 적혀있어 전혀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 영선문(靈仙文)이다. ]
" 영선문이오? "
[ 이 행성의 문자가 아니야.. 이건.. 굉장히 희귀한 문자인데 왜 이런곳에 ..]
관천령은 아닌척하고 있지만 굉장히 놀라워 하고 있어 관산의 의문을 자아냈다.
"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시겠어요? "
" ......연기술(鍊起術)이 적혀 있구나 "
" 연기술요? 그게 뭔데요? "
관산은 연기술이란 걸 처음 들어 봐서 별 생각 없이 물어 보았는데 의외로 관천령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고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연기술은 뭔가를 만드는 기술이다. 인간들의 야장술(冶匠術)과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고차원적인 야장술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
" 그 연기술로 뭘 만들 수 있는데요? "
[ 수준 낮은 연기술자는 기문둔갑을 만들 테고 연기 장인들은 법기(法器)까지 만들어 낼 수 있지 ]
" 기문둔갑요? 이곳에 기문갑이란게 존재하긴 하는데. 두 개가 혹시 같은 걸까요? "
[ 글쎄다. 안 봐서 모르겠다. 나중에 볼 기회가 있다면 알려주마. ]
" 알겠습니다. 그런데 법기라는 걸 언급할 때 어르신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굉장한 물건들인가 봅니다. "
[ 그렇다. 왜 이런 혁지들이 이런 곳에 볼품없이 굴러 다니는지는 모르겠다 만 법기는 아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
" 어째 너 같은 건 절대 못 만들 테니 관심을 두지 말란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
[ 눈치가 빠르구나. 일단 지금은 관심을 끄거라. 나중에 네가 충분히 제 앞가림을 하게 되면 그 때 다시 한번 생각해보든지. ]
" 알겠습니다. 당장 배워보고 싶어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문자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제가 원할 때 영선문인가 하는 그 문자를 가르쳐 주십시오.. 저에게 충분한 수명이 생겨난다면 연기술이란 야장술을 한번 배워보고 싶습니다. "
[ 그러마 ]
관산은 두루마리를 원위치 시켜 놓고 작은 석실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은 숨겨진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관천령은 또다시 그를 벽에 걸린 촛대로 이끌었고 벽에 걸려있는 촛대를 밑으로 당겨보라 주문했다.
" 이것 말입니까? "
관산은 관천령이 시키는 대로 촛대를 밑으로 잡아당겨 보았고 그 순간 막혀있던 벽이 옆으로 스르르 밀리며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 가보자 ]
" 예 "
관산이 망설임 없이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벽은 원상태로 돌아와 통로를 다시 막아버렸다.
[ 걱정하지 말거라 돌아올 때 여는 법을 알려주마 ]
" 훗 이런 걸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
관산은 그렇게 새로 발견한 동굴의 통로를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통로는 누군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 놓은 곳이 분명했다.
통로 천장에 박혀있는 월광석이 그 증거였고 중간중간 설치되어 있는 섬뜩한 함정들이 증거였다.
방금 전에도 관천령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관산은 필시 한철로 만들어진 수십 발의 강전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불과 수십 미터를 걸어오는 동안 관산은 이런 위험을 몇 번이나 겪으면서 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어떤 빌어먹을 놈이 이런 위험한 것을 끝도 없이 만들어 놓았을까요 "
[ 분명 석실을 만든 놈이겠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기관들이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놈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놈이 재료만 충분했다면 우린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
" 기관들이 갈수록 위험해지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
[ 아니다.. 계속 가자 아무래도 안에 굉장한 게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네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물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
관천령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곧장 황천길로 직행할 상황인 관산으로써는 미칠 노릇이었다.
" 예.. 가봅시다. 시한부 인생이 뭔들 못하겠습니까 "
[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별 탈 없을 것이니 ]
이후 관산은 십여 번의 죽을 고비를 더 겪고 나서야 무사히 통로의 막다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아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
돌아보면 100미터 밖에 안되는 거리였지만 마치 수천 미터는 지나온 듯 느껴졌고 얼마나 긴장한 상태로 지나왔는지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다.
[ 호들갑 떨지 말고 일어나라 조금 더 가야 한다. ]
" 예? 막혀있는데요? "
[ 환영진이다. ]
" 진법이요? 어떤 놈인지 별 지랄을 다 해놨습니다. "
[ 기관술은 뛰어나지만 진법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야. 아주 조잡스럽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 정도다. ]
" 끙차~ 어르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
무거운 엉덩이를 간신히 들어 올린 관산은 망설임 없이 막다른 동굴 벽을 향해 걸어갔고 주저하지 않은 덕분일까 그의 몸이 막 벽에 닿는 순간 진법은 깨져버렸다. 이후 관산은 거짓말처럼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벽을 통과하자 관산의 눈 앞으로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수백평의 땅 위에 수많은 영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게 도대체.. "
[ 역시 예상대로구나.. 진한 영기가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영초들이 심어져 있었어.. 아쉽게도 대부분 어린 영초들이지만 몇몇 영초는 그런대로 쓸만하겠다. ]
만약초본(萬藥草本)을 통째로 외우고 있던 관천령이 다행히 영초를 알아보고는 조언을 해주었다.
" 그렇다면 이제 저도 흡명마공을 익힐 수 있겠군요. "
[ 아직 속단하지는 말거라. 복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뒤통수와 코가 동시에 깨지는 법이니까..]
" 어르신 재수 없게 왜 그러십니까....."
[ 일단 어린 영초들은 손대지 말고 오른쪽에 막 빨간 꽃봉오리를 만들기 시작한 상옥초(象獄草)만 몇 뿌리 캐서 돌아가자. 그것조차 아직 300년도 되지 않아 보이긴 하다만 간신히 쓸 만은 하겠다. ]
" 알겠습니다. "
상옥초는 관산도 만약초본에서 본 기억이 났다. 뿌리가 코끼리 코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상옥초는 500년 이상부터 최상급으로 취급해 주고 당연히 최상급 각성 비약의 재료로 쓰인다. 하지만 그냥 먹어도 근력을 3할이나 높여주는 아주 귀한 영초였다.
물론 많이 먹으면 효과가 둔감 된다는 주의사항이 있었지만 저런 비싼 영초를 몇 뿌리나 처먹을 수 있는 팔자 좋은 놈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 돌아갈 때는 기관들을 해제하면서 갈 것이다. ]
" 알겠습니다. "
이후 관산은 관천령이 시키는 대로 기관을 뒤에서부터 해체하며 돌아갔고 의외로 그 무섭던 기관들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망가져 버려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습니다. "
[ 기관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음양의 원리를 이용해 만드는 것이라. 앞에서는 무서워도 뒤에서 공략하면 이렇게 무기력하다. ]
" 명심하겠습니다. "
모든 기관을 해체하고 돌아온 관산은 돌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상옥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1분 1초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 먹어라. 먹는 도중이라도 영초의 기운이 느껴지면 바로 흡명마공의 구결을 운용해 영초의 기운을 단전으로 이끌도록 해라. ]
" 예. "
심호흡을 한번 터트린 후 관산은 상옥초를 우악스럽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씁쓸하면서 끝에서 살짝 단맛이 올라오는 게 의외로 먹을만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관천령이 말했던 영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뿌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관산은 또 다른 상옥초를 집어 들었고 다시 통째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관산은 그렇게 연속으로 세 뿌리나 먹어치워 버렸고 드디어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 지금이다. 구결을 운용해라. ]
관천령의 신호에 맞춰 관산은 급히 흡명마공의 구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몸속을 날뛰기 시작한 상옥초의 영기가 구결에 반응을 해오자 최대한 단전으로 이끌기 위해 모든 의식을 구결에 집중했다.
[ 처음이 중요하다. 영기는 원기보다 반발이 심해 흡명마공으로는 오래 잡아 둘 수 없으니 즉시 나선력을 만들어서 최소 한 시진은 단전에 흡착시켜 놓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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