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래로 늘어트린 노인의 손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각성력을 온몸에 두르는 형식이 아닌 신체 일부분에 압축시킬 수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차종호 보다는 강자였고 차상호에 근접하는 실력자임이 확실해 보였다.
' 대략 각성기 7성 정도 '
노인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아 약간 놀랐지만 그렇다고 긴장되거나 걱정이 되는 건 아니다. 이길 수 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절대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 싸워보고 안되면 도망친다. '
관산의 머리속에는 소을순의 수많은 경험들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것이 아니어서 기억의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많은 실전 경험을 겪으며 몸속에 녹여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발각되었을 때 도망가지 않고 나선 것이었고 지금도 감히 노인을 경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인이 각성력을 끌어올릴 때 관산도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뽑아들고 20년 영기를 끌어올리며 자하신공을 운용했다.
3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언뜻 관산의 눈빛에서 보라색 안광이 번뜩이는 걸 본 노인은 흠칫 놀라더니 잠깐 고심한 끝에 다시 말을 걸어왔다.
" 어느 가문의 자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죄의 의미로 200금석을 지불할 테니 원하는 아이만 데리고 물러나는 게 어떻겠나. "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지만 여전히 관산은 고개를 저으며 이를 거부했다.
" 아직 어려서 그런가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군.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하면 아버님께서 많이 슬퍼하실 것이네. "
노인은 관산이 어떤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고 오해하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관산같이 20살 이전에 각성을 이룬다는 건 비약을 먹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건하지 못한 정신으로 비약을 복용했다가는 90프로 확률로 폭주에 빠져들기에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옆에서 폭주의 조짐이 나타날 때마다 기운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줘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각성기 후기 대원만(大元滿)도 불가능했다. 최소한 성혼기(成魂己) 초기에 접어든 고수여야 가능했다.
' 제길 처음 보는 녀석인데 도대체 어느 집 망나니야? 혹시 단국 4대 공족들의 사생아인 아니겠지? '
노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노인의 곁에 붙어 있던 젊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 정말이냐? "
" 예 주인님. 모습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신평이란 아이가 틀림없습니다. 상족께서 저에게 찾아와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
" 후후후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군.. "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관산의 얼굴을 바라보던 노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미련 없이 모든 각성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관산도 노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를 알고 있었다.
[ 주인님. 저 아이 아무래도 차상호 상족이 찾는 아이 같습니다. ]
방금 젊은 남자가 노인에게 속삭인 말이었다.
차상호가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의 인맥이 생각보다 넓다는 걸 깨달은 관산에게 이들을 절대 살려 보낼 수 없는 이유가 하나더 생기고 만 것이다.
" 잡아서 차상호에게 넘긴다면 제법 많은 돈을 받아 낼 수 있겠구나 "
첫 공격은 노인의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붉은 기운에 쌓여 있는 노인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오자 관산은 혈운보(血雲步)란 보법을 밟아 간단히 피해 버렸다.
처음보는 수법에 놀란 노인은 황급히 두 주먹을 교차해 다시 관산의 상하단을 동시에 공격해왔다.
" 누구에게 배웠느냐? 재주가 좋구나 어디 이것도 피해보거라 "
순식간에 세 배 크기로 불어난 노인의 주먹이 얼굴과 복구로 쏘아져 오자 관산은 다시 혈운보를 시전했고 그의 신형이 바닥에서 살짝 떠오르며 마치 귀신처럼 미끄러졌다.
아직은 보법의 경지가 깊지 않아 많이 부자연스러웠지만 관산의 혈운보는 노인의 정권을 무력화 시키기에 충분했고 더불어 노인을 긴장시켰다.
" 쥐새끼 같은 놈 "
화가 난 노인은 귀신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관산을 바짝 따라붙었고 관산이 서 있는 일대에 무차별적인 정권 소나기를 펼쳐냈다.
보법으로 피할 수 있는 곳까지 사전에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인 거 같았는데 관산은 그자리에 멈춰 보란 듯이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의 묘리를 이용해 노인의 공격을 하나하나 흘려 버렸다.
" 이. 이럴수가 "
관산이 보여주는 기술은 이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예인지라 당하는 노인의 안색은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 생각보다 더 할만한데? '
관산에게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인의 각성력은 분명 자신의 20년 영기내공보다 강했지만 특별한 무리(武理)가 담겨있지 않아 상대하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 힘의 차이는 지금 수준의 무공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 노인과 싸우면 싸울수록 관산의 자신감은 높아져 갔다.
' 탐색은 이쯤 해도 되겠어 '
하지만 그와 반대로 노인은 점점 초조해져만 갔다.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어린아이가 갑자기 생긴 힘에 취해 세상 물정 모르고 덤벼드는 줄 알았는데 관산의 실력을 접해보니 생각보다 더 대단했기 때문이다.
' 젠장 잘못 생각했어. 이런 기술들을 절대 혼자 익힐 수는 없어. 이 녀석 분명 명사나 고수의 지도를 받고 있는 게 틀림없어 '
힘 자체만으로 봐서는 분명 자신이 우위에 있었지만 생전 처음보는 관산의 기술들은 그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 빌어먹을 용철이 놈 말만 듣고 덤벼드는 게 아니었는데.'
노인은 자신에게 관산의 정체를 이야기했던 청년을 죽일 듯 노려보다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서걱
" 이런! "
잘려나간 옷자락. 조그만 늦었다면 가슴을 크게 베일뻔 했다. 놀란 노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목검을 앞세우고 있는 관산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베인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못했다. 방금의 일검으로 노인은 여기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
노인은 더 이상 실력을 숨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숨겨둔 비장의 수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 좋다. 그동안 쌓아온 게 아깝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원상 복귀 시킬 수 있다. 어디 누가 죽는지 해보자. 마력 해방! "
노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해방이란 단어를 무슨 시동어처럼 외치며 자신의 이마에 삼지창 형태의 기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이 붉게 물들면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양의 각성력이 몸 밖으로 터져 나왔고 몸 밖으로 흘러나온 각성력은 빠르게 머리 위로 뭉치더니 눈이 세 개 달린 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몸 속으로 사라졌다.
관산은 노인의 각성력이 만들어낸 뱀의 형상을 마수 목록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건 틀림없이 3급마수 삼목비사(三目飛蛇)였다.
" 흐흐흐 이놈 깜짝 놀랐나 보구나. 죽기 전에 좋은 걸 알려주마 이건 3급 마수 이상 되는 놈들을 주 재료로 해 만든 상급 각성 비약으로 각성을 이룬 자들 만 시전할 수 있는 숨겨진 비기이다. "
노인의 몸을 두르고 있는 각성력은 짙은 피 냄새를 풍기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는데 의외로 노인은 기운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듯 보였다.
' 다스려지지 않은 야성의 기운이다. '
하지만 기운의 크기 만큼은 차상호와 오일이 보여주었던 각성력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 할 정도여서 관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이후 찾아올 후유증이 커 보입니다만. "
관산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렇게 힘을 폭증시키고도 후유증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사용하지 왜 아껴 놓았겠는가
" 확실히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구나. 맡다. 이 힘은 유한하며 힘이 다하면 내 경지는 두 단계나 하락해 각성기 5성으로 떨어지겠지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의 난 경지가 세 단계나 상승해 무려 각성기 후기에 들어섰다. 중기와 후기는 하늘과 땅차이 만큼 크다. 그 말인 즉슨 넌 절대 내 손에서 살아 날 수 없다는 말이지. "
저런 기운과 이런 좁은 곳에서 격돌했다가는 아이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관산은 지체 없이 창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이제 와서 도망가려고? 도망가기에는 이제 늦었다. "
" 자신 있으면 쫓아와 보시던가. "
관산의 도발에 노인은 망설임 없이 그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노인이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엄청난 속도를 냈지만 관산도 모든 내공을 어풍비행술에 실은 상태라 쉽사리 따라 잡히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관산은 빠르게 달려 인적이 없는 공터로 이동해 걸음을 멈췄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마자 노인도 그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 여기냐 무덤 자리로 고른 곳이 "
" 누구 무덤 자리가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
이번만큼은 그도 자칫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심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조잡한 목검을 다시 허리에 찔러 넣고 대신에 혈왕장을 끌어올렸다.
대결 중 목검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노인의 기세는 굉장해서 마치 모시립을 다시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타필승(先打必勝) 비록 동네 애들 싸움에서나 사용할 법한 용어지만 확실히 먼저 공격한 사람이 유리한 건 맞다. 그래서 관산은 과감히 혈운보를 시전해 선제공격을 펼쳤다.
그가 처음 사용한 무공은 혈왕장 제 1초식 마라인이었다. 익히고 있는 장법중에 마라인의 숙련도가 가장 높고 대인전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 하하하 이제야 발버둥을 치는구나 "
벼락같은 기습임에도 각성력이 둘러지지 않은 장법이라 노인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관산은 일부러 장법의 궤적을 단순하게 만들어 공격을 훤히 들어냈고 역시나 노인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에 주먹을 말아 주고 있는것이 아마도 장법을 맞받아쳐 관산의 손을 박살 내 버리려는 속셈 같았다.
노인의 속셈이 훤히 읽혔지만 그는 모른체하면서 끝까지 마라인을 뻗어 나갔고 장법이 노인의 가슴을 적중하려는 순간 역시나 노인은 관산의 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기다렸다 이놈. 팔 병신부터 만들어주마 "
' 기회! '
그 역시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관산은 노인의 주먹과 마라인이 부딪히는 순간 벼락처럼 장법을 회수하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흘려보내는데 성공했고 무릎을 굽힌 상태로 한바퀴 회전해 손가락을 말아 쥔 반장의 혈왕결인을 노인의 심장으로 찔러 넣었다.
쾅
바위도 뚫고 들어가는 혈왕결인이 노인의 심장에 정확하게 적중하고 말았다.
" 크어어어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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