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은 왕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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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연필
작품등록일 :
2023.02.2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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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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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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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6화.

DUMMY

말을 마친 카일은 여태까지 받은 충격이 컸는지 비틀거리다 주저앉고 말았다.


엘레인은 주저앉은 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태까지 안젤리네를 잘 지켜 왔잖아. 앞으로 나도 있으니 맡겨줘.”


“틀려.”


“뭐가 틀려?”


“내가 안젤리네를 지킨 게 아니야. 반대로 안젤리네가 날 지킨 거야.”


카일은 충격적인 옛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 역시 지하 마을에 가본 적이 있어. 안젤리네와 같이...”


“뭐?”


“나와 안젤리네는 어렸을 적 검은 천으로 시야가 막힌 우리에 갇혀서 그 마을로 끌려갔어. 그래. 우린 제물이었어. 그리고 네가 말한 불길한 탑 역시 그때 보았지. 죽기 일보 직전이었어. 그때였어. 안젤리네가 탑에 적힌 기호를 해석해 냈어. 그래서 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런 동생을 잃다니...”


엘레인이 카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진정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린 해낼 거야. 안젤리네를 무사히 데리고 올 거라고.”


엘레인의 눈은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엘레인의 말과 행동은 카일에게 용기와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소매로 눈가를 훔친 카일이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거야. 나만 믿어.”


엘레인은 두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런 엘레인은 카일의 눈에 너무 눈부셔 보였다. 처음 대련했을 때의 엘레인이 아니었다. 경지와 힘, 정신까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엘레인이 자신과 동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카일이 뒷목을 주무르며 엘레인에게 말했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


“뭐가?”


“내가 영주성에 온 걸 어떻게 알고 안젤리네를 데리고 갔을까?”


“감시자가 본 것 아닐까?”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살면서 가장 주의한 건 감시자야. 들킬 리가 없는데.”


“그럼 첩자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건 빅터와 공작가문의 세 사람뿐이었어. 아. 그림자들도 있나. 하지만 제랄드 공작이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 키웠는데 그 안에 첩자가 있다는 게 믿기 힘드네.”


“나도 모르겠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어쩌면 박사의 단독행동일지도 몰라.”


“박사의 단독행동?”


카일은 모두가 모여있을 때 간부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었다. 엘레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지하 수로에서 봤던 붉은 눈의 괴인이 박사라고 불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응. 간부들은 한 조직에 속해 있지만 협력적이진 않아. 오히려 따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 그중에서도 박사는 특이한 인물이야. 무력을 사용하는 걸 본 적도 없고 베인과 카르도가 권력 다툼할 때도 나서지 않았어. 늘 연구에 관심만 보이거든.”


엘레인은 고심에 빠졌지만, 뾰족이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때 제랄드 공작의 명령을 받은 그림자가 찾아왔다.


“출발한다. 바로.”


엘레인은 의문을 뒤로 하고 그림자를 따라나섰다.


영주성에서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엘레인과 제랄드 공작, 그리고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봉을 맡은 1진이었다.


그림자 병단을 이끄는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제랄드 공작 앞에 모습을 나타내 엎드리고 말했다.


“목표한 비밀통로 앞까지 길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제랄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거기서부터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니 힘을 온존해 두도록.”


순식간에 지하 마을로 통하는 비밀통로 앞까지 도달한 1진은 스크롤을 찢어 헤이스트를 걸고 마법 장비에 마력을 불어넣어 민첩성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가자. 앞을 막는 적은 내가 처리하겠다.”


제랄드 공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레인의 눈앞에 전에 봤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이 줄줄이 벽에 걸려있었다.


“이곳이 확실합니다. 흑마법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쥐들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엘레인의 말에 제랄드 공작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쥐들은 상관하지 않고 전력으로 움직인다. 엘레인 앞장서라. 전력으로 움직인다.”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십번도 더 봤던 지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왕관을 불렀다.


‘엘. 강제 모드를 키고 문 앞까지 길을 안내해줘.’


[ 강제 모드를 발동합니다. ]


엘레인의 평소보다는 배 이상 빠른 움직임으로 길을 주파했다.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오감은 공유하고 있던 엘레인은 의문을 드러냈다.


‘감시하고 있는 쥐들이 보이지 않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행은 문 앞까지 도달했다.


문 앞에 상주하고 있는 붉은 해골 조직원들은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제랄드 공작과 일행들은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봤다.


[ 목표지점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제 모드를 정지합니다. ]


몸의 자유를 찾은 엘레인은 마안을 활성화했다. 건물 안에 있는 마력들이 보였다.


“적들은 건물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감시탑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생긴 이래 문은 고사하고 비밀통로의 위치조차 들통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쥐들이 빈틈없이 감시해주니 지하에 상주하는 조직원들은 점차 나태해졌고 감시를 게을리했다. 카르도는 이 문제를 몇 차례 고치려고 했으나 가뜩이나 힘든 지하 생활에 그런 성실함을 보일 리 없었다. 모든 조직원이 문지기를 기피하자 카르도 역시 이 문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제랄드 공작이 문을 보고 턱짓했다.


“저게 네가 말한 문인가?”


엘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림자들을 통솔하던 대장이 말했다.


“애들을 풀어 열 방법을 찾겠습니다.”


제랄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늦다. 그냥 돌파한다.”


“그게 무슨?”


엘레인의 의문은 제랄드 공작의 다음 행동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을 뽑은 제랄드 공작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눈부신 검기에 휩싸인 검이 뚜렷한 형태를 갖췄다.


롱소드에 검기로 이뤄진 날까지 붙으니 왠만한 양손 검보다 더 큰 검의 형태로 변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에 주변의 땅이 갈라지고 제랄드 공작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엘레인은 그 위압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잊지 않고 눈에 새기겠다는 듯이.


‘저게 내가 목표로 하는 마스터의 경지인가.’


그 소란에 목조 건물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무슨 소동이야!”


대뜸 고함을 지르며 나온 남자는 웃통도 깐 채 손에 술병을 쥐고 있었다.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코까지 뻘게져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제랄드 공작을 보고 눈을 비볐다.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 뺨까지 때려보던 남자는 아픔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술병을 떨어트리고 주저앉았다.


“저저...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제랄드 공작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박차고 돌진했다.


손에 쥔 검이 더욱 밝게 타올랐다. 검을 둘러싼 검기는 더욱 커져 커다란 몽둥이를 연상하게 했다.


엘레인은 왕관의 설명에 저것이 마스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강으로 둘러싸여 원 길이보다 세 배 이상 길어 보이는 검이 문 앞에서 기묘한 움직임으로 원을 그렸다.


카가가강. 쿠르릉.


강철로 된 문의 중앙이 반원 모양으로 도려내지며 문의 일부분이었던 강철 조각이 뒤로 넘어갔다.


엘레인은 그 신위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건물 밖으로 얼굴을 내민 붉은 해골 조직원들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송사리들은 뒤에 오는 인원들이 처리할 것이다. 그림자 병단이여. 베르미어를 구원해라.”


제랄드 공작이 검을 들어 문 안쪽의 마을을 가리켰다. 탑을 중심으로 그림자 병단의 제일 목표인 돌기둥들이 보였다.


그림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네갈래로 갈라져 목표인 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제랄드 공작은 중앙에 있는 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엘레인도 제랄드 공작의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쓰러져 가는 집들 사이에서 괴물들이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제랄드 공작은 거침없이 괴물들을 베어 넘겼다.


강인해 보이는 근육과 질겨 보이는 피부도 소용없었다. 제랄드 공작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배는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괴물들이 갈라졌다.


엘레인은 뒤를 따르며 제랄드 공작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마안까지 활성화한 엘레인의 시선은 제랄드 공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력의 흐름, 조작, 통제 모두 처음 보는 방식이야. 말 그대로 외부의 마력까지 호응시켜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어.’


제랄드 공작의 검무는 아름다웠다. 그 압도적인 신위 앞에 괴물들은 불에 뛰어드는 나방이었다.


마을 중심부 탑 옆의 가장 큰 건물에 있던 카르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광인처럼 날뛰며 화를 냈다.


“도대체 감시하는 놈들은 뭘 한 거야? 박사! 박사 어디 갔어? 박사는 왜 연락을 안 한 거지? 그놈들이 쥐들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때 문을 박차고 베인이 들어왔다.


“들었겠지만 일이 틀어졌다. 돌기둥을 무너트리려면 얼른 명령을 내려야 한다.”


폭탄을 터트리면 자신들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탑에 봉인된 존재 역시 그런 사태를 원할 리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에 빠진 카르도의 머릿속으로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에 집중하던 카르도가 이를 드러냈다.


자신감을 되찾은 카르도가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웃었다.


“그분께서 계시를 내리셨다. 넌 가서 봉인 해제 진을 발동시켜라. 그동안 내가 시간을 벌겠다.”


베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해제 진은 미완성 아닌가?”


카르도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의문을 갖지 마라. 그 분께서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광기에 젖은 목소리로 카르도가 소리치자 베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탑으로 향하는 제랄드 공작의 앞을 가로막는 괴물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모습이네. 정말 마스터의 무력은 대단하구나.’


말 그대로 일인 군단이었다.


제랄드 공작을 지켜보던 엘레인은 괴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은신 망토를 뒤집어쓰고 안젤리네를 찾아 나섰다.


‘탑으로 가보자. 거기서 박사의 위치를 캐보자.’


조심조심 탑으로 가는 향하는 엘레인의 눈에 돌기둥을 감싸고 올라오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폭탄을 무력화 시켰다는 그림자들의 연락 신호였다.


곧이어 나머지 돌기둥에서도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엘레인은 그 광경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제 폭사 당할 걱정은 없어졌네.’


그 순간 낮고 커다란 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졌다.


우우우웅.


뱃고동을 연상시키는 소리였다.


소리를 시작으로 마을 이곳저곳에서 붉은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제랄드 공작이 소리쳤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냐?”


엘레인 역시 이 소란에 당혹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개의 붉은 빛기둥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공동안을 밝히고 있는 탑 맨 꼭대기와 연결되었다. 그러자 환했던 공동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야가 온통 붉어졌다.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제랄드 공작의 신위에 주춤대던 괴물들이 두 팔을 들어 올려 기쁨을 드러냈다.


“서둘러야겠군.”


제랄드 공작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특유의 감으로 위기를 느꼈다.


괴물들은 어디선가 힘을 공급받는지 한층 더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우툴두툴한 가시가 몸에서 마구 돋아났다.


다시 검을 치켜세운 제랄드 공작의 뒤로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2진이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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