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화 강화 교섭의 시작

“결국, 답은 정해져 있군.”
히로이에가 말했다.
다른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의 함대만으로도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중국군의 함대마저 가세한다면, 우리에게는 악몽일 겁니다.”
“협상은 필수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관백을 설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고스티뉴가 말했다.
“그렇지. 관백이 동의하고, 이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정도로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하겠지요.”
미츠나리가 말했다.
“아고스티뉴. 우리는 결국 저들의 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들은 대로다. 관백은 삼국을 통일해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고려를 정복해 보급기지로 삼고 중국까지도 정복하려고 했던 관백인데, 우리가 빈손으로 물러난다면 패전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고스란히 넘겨질 테지. 우리 목숨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해 협상에 임하라.”
히데이에는 아고스티뉴에게 협상의 전권을 맡겼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협상에 임하겠습니다.”
아고스티뉴는 처소로 돌아가 심유경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아고스티뉴는 심유경의 전령에게 답신을 적어 보냈다.
심유경, 그대의 서신은 잘 확인했다.
암브로지우가 무사하다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만간 내 가신을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협상을 원한다.
이곳의 장수들은 자의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관백의 야심으로 인해 이곳에 강제적으로 온 것이라 장수들 모두 화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관백의 지휘를 받고 있고, 관백의 허락 없이는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협상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관백의 명예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백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이 땅에서 우리가 떠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협상 타결은 그대가 그런 조건을 제시할 권한이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 가지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그대가 그대 진영의 두 사람을 사절로 삼아 관백에게 파견해 화평을 요청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중국 황제의 명으로 다른 사신들을 파견해 과거 일본과 중국 간에 행하던 교역을 다시 허가하고, 쓰시마와 고려 사이에 있는 교역 규모를 크게 늘려 고려에서 공물을 바쳐 관백이 군대를 철수할 명분을 주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심유경은 아고스티뉴의 답신을 총대장인 송응창에게 보였다.
송응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강화 교섭의 전권은 그대에게 있다. 나는 고려인들을 속일 수도 없고, 황제 폐하를 기만할 수도 없다. 일본군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히데요시의 항서를 받아올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은 그대의 재량에 맡긴다. 책사 5명을 붙여줄 테니, 그들과 함께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라.”
“좋습니다. 어디 칼날 위에서 춤을 춰 보지요.”
송응창의 허락을 받은 심유경은 흔쾌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웃었다.
심유경은 다시 아고스티뉴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는 아고스티뉴의 답신에 동의하며 자신이 그럴 권한이 있음을 전했다.
심유경과 아고스티뉴는 서로 일정을 조율하며 있었다.
심유경의 시종이 한 전령과 함께 들어왔다.
“주인님, 일본측에서 또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답신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고스티뉴가?”
“아닙니다. 기요마사라는 일본군 장수입니다.”
심유경이 반색했다.
“기요마사는 2군의 대장인데. 그자가 왜 나한테 서신을 보냈지?”
심유경은 전령을 바라보며 기요마사의 서신을 읽었다.
중국의 유격장군 심유경은 보시오.
나는 일본군 2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오.
최근 나는 그대가 1군 대장 아고스티뉴와 강화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소.
나 또한 강화 교섭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나 유감스럽소.
그대가 교섭 상대로 삼고 있는 아고스티뉴는 그렇게 신뢰할 만한 자가 아니요.
그는 신분도 천하고 성격은 변덕스럽고 교활하며 신의가 없는 사람이오.
그리고 일본군을 지휘하고 있는 총대장과 봉행들, 그들은 교섭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그대의 선의가 왜곡되고 이용당할 소지가 있어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것이오.
나는 이 전쟁이 어느 한쪽의 우세를 점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고, 계속 전쟁을 끄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이라 생각하오.
그래서 강화 교섭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대가 아고스티뉴와 협상을 하면서 파국으로 가게 된다면, 강화 교섭 자체에 양측이 모두 회의를 갖게 될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오.
심유경, 그대는 아시오?
나 도라노스케(기요마사의 별명)는 관백의 조카라는 사실을.
나는 그대가 비열하고 뒤통수 치는 아고스티뉴가 아니라 나를 통해 강화 교섭을 한다면 어떨까 제안하오.
나는 관백과 직접 통할 수 있는 신분이며, 그대의 일을 가장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대의 생각을 내 전령에게 답신으로 보내주기 바라오.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오.
기요마사의 서신을 본 심유경은 미소를 지었다.
“도라노스케라고?”
“네. 그분은 관백 전하의 조카분이시자 가장 총애받는 장수입니다. 우리측과 협상하신다면 일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심유경은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심유경은 답신을 다 쓴 후, 기요마사의 서신과 함께 봉했다.
답신을 기대하고 받을 준비를 하던 전령은 의아했다.
“그것은 우리 주군께서 쓰신 서신인데.”
심유경은 서신을 봉한 봉투를 전령이 아닌 시종에게 건넸다.
“아니, 왜?”
“이것을 아고스티뉴에게 전해라.”
알아들었다는 듯, 시종은 말했다.
“알겠습니다.”
시종이 방을 나갔고, 심유경은 당황한 전령에게 말했다.
“나는 일본군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 2군 대장 기요마사가 1군 대장 아고스티뉴와 사이가 나쁘고, 서로 먼저 서울을 차지하겠다고 다퉜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요마사가 관백의 조카라는 이유로 거만하게 굴어 다른 장수들과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을.”
“장군!”
심유경은 전령을 무시하며 말했다.
“돌아가라. 그대를 생포해 아고스티뉴에게 보내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라. 개인적인 악감정과 증오심으로 상대를 비방하는 자를 내가 어떻게 신뢰하고 교섭 상대로 삼을 수 있겠는가?”
“장군, 숙고해 주십시오. 좋은 기회를 놓치시는 겁니다.”
“돌아가라. 나도 사람을 볼 줄 안다. 뒤에서 상대를 비방하는 자를 나는 믿지 않는다. 어쩌면 모르지. 뒤에서도 내 욕을 하고 있을지. 그에 비하면 아고스티뉴는 사내답고 믿을 만한 남자이다.”
기요마사의 전령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아고스티뉴는 심유경의 서신을 읽었다.
심유경은 평양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라면서 기요마사가 심유경에게 보낸 서신을 함께 동봉한다는 내용이었다.
아고스티뉴는 기요마사가 뒤에서 그런 교란 작업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심유경이 기요마사의 서신을 증거로 보내준 것은 아고스티뉴로서는 너무도 호재였다.
그 서신은 아고스티뉴에게 중요한, 유리한 증거가 되어 줄 것이었다.
아고스티뉴는 그 서신을 히로이에에게 보고하고 전달할까 생각하다 함구하고 숨겨뒀다.
**********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강화 교섭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양측간의 전투는 휴전하게 됐고, 마을을 떠났던 백성들도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성의 의병단에도 그 소식은 전해졌다.
현성은 물론이고, 모두 기뻐했다. 히토미 또한.
그간의 긴장은 풀리고, 그들은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보고 있었다.
히토미는 이대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현성은 히토미와 지수, 우태, 동이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현성은 이전에 충주에서의 추억을 생각했다.
‘그때 이렇게 우리는 함께 다녔었어.’
이 시간이 영원하길 현성은 바랐다.
마을은 다시 사람들이 돌아와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망가진 집들이 보수되고 있었고, 저자는 바구니나 보자기를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구휼미요! 구휼미 받아가시오! 황제 폐하가 보내신 구휼미요. 고려의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내신 구휼미요. 모두 황은에 감사드리시오.”
만력제가 보낸 구휼미였다. 사람들은 쌀을 타가면서 모두 만력제를 칭송했다.
현성과 히토미는 마주 보며 웃었다. 지수, 우태, 동이도 기뻐했다.
“형님, 이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동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너희들의 부모님도 돌아오셨을 걸? 지수야, 너의 어머니도 돌아오셨을 거야.”
현성은 잠시 생각하며 말했다.
“그동안 너희들, 너무 수고했어. 만일 원한다면, 너희들은 지금 돌아가도 좋아. 부모님들이 너희들을 보고 싶어할 거야.”
그러나 세 아이는 단호했다.
“오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끝까지 함께 해야지. 우리를 아이 취급하지 말라고.”
지수가 정색했다. 우태도 맞장구쳤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우리는 계속 동거동락해야지. 나중에 형님이 출사하면 나는 형님 호위 무사가 될 거야.”
현성과 히토미는 세 사람이 떠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누가 나한테 벼슬을 준다고. 나는 출사에 관심이 없다니까.”
“그래도, 우리와 함께 돌아가야지. 설아 언니도 같이 우리 마을로 가자. 우리 모두 같이 살자.”
지수의 말에 히토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마웠다.
다섯 사람은 한참을 티격태격하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날이 저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희망에 들떠 있는데, 유일하게 좌불안석인 사람이 있었다.
하야토였다. 그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당황했다.
히토미가 저녁 식사를 들고 하야토를 찾아갔을 때, 하야토는 히토미에게 물었다.
“리다아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저들의 표정이 왜 이렇게 밝은 겁니까? 우리 군이 중국군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히토미는 고민했다. 하야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응, 하야토, 맞아. 우리 군이 중국군을 물리친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요? 왜 저들의 표정이 저렇게 밝은 것입니까?”
“우리 군이 승세를 이어가 협공을 위해 북진한 고려의 근왕군을 공격했어. 그런데, 거기서 그만 대패하고 만 거야.”
하야토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군이 고려군 따위에게 질 리가요.”
“그런데, 사실이야. 우리 군은 졌고, 중국군이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이제 서울을 지키기는 힘들게 된 거야.”
하야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카타님은요? 야카타님은 무사하십니까?”
“걱정하지마. 야카타님은 무사하셔.”
하야토는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이질감을 느꼈다.
‘리디아님은, 표정이 밝아 보였어.“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