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부터 초전박살 (2)

이성적인 매니저 모드 얼른 셔터 내려!
지금부터 여긴 감성이 지배한다.
‘주모오오! 여기 오 나인 뽕, 한 사발이요.’
내가 왜 이리 호들갑이냐고?
노래도 인트로가 중요하잖아. 딱 귀에 꽂혀야 사람들이 계속 듣지.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 그래서 초반 15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거다.
그런데 영화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심해.
왜?
영화는 관객이 돈 내고 영화관에 들어왔잖아. 초반이 지루해도, 재미없어도 일단 봐야지. 돈 아깝게 그냥 나가?
하지만 드라마는 달라.
공짜야. 재미없으면 시간 아깝다는 생각, 바로 들어. 손가락만 까딱하면 곧바로 채널이 돌아가. 요새 볼 게 어디 한두 갠가?
심지어 요샌 죄다 스마트 TV라 방송 볼 거 없으면 너튜브 봐버린다. 당장 나만 해도 그래.
‘와, 우리 작감이 미쳤어요!’
진짜 이희경 작가 깡다구 하나는 인정해야지.
대본에 나온 순서를 배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바꿨다. 원래는 궁궐이 보이면서 차유석이 등장하는 게 첫 장면일 예정이었다.
어라?
근데 첫 화면부터 이상한데?
드라마 시작할 때 브금과 함께 첫 장면이 나오잖아. 근데 그 브금이 내 귀에 너무도 익숙해.
오 나인 OST였거든. 왕 등장 브금으론 말도 안 되지.
이게 뭐지? 하고 있는데 첫 장면인 궁궐 드론 샷이 점점 클로즈업돼.
어어? 저기 수라간이네?
내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하는 거지.
그러다 어린 나인들이 바쁘게 수라상을 준비한다고 돌아다녀.
여기서 바로 소월이 진아 얼굴이 똭!!
내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드라마 제목이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잖아. 그리고 주인공이 4명이라는 건 홈페이지나 기사로 이미 다 알려졌다.
근데 첫 장면에 왕인 차유석 얼굴이 아니라 시아 예린이 얼굴 딱 나와.
별다른 정보 없이 보는 시청자 눈엔 ‘오! 쟤네가 주인공인가?’ 이런 생각 들지. 물론 1화 다 보고 나면 생각은 바뀌겠지.
하지만 가장 강렬해야 할 첫 장면을 시아와 예린이가 먹어치웠다는 게 중요하다.
이러니 내가 안 미쳐?
좋아 죽지.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야.
우리 아이들 총출동해서 들썩들썩!
오 나인 노래 부르면서 살랑살랑 춤추는데, 온몸에 벼락이 관통한 것처럼 전율이 짜르르 흘렀다.
소름 쫙 돋아버렸잖아.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여기서 나뿐일걸?
‘아니네?’
단아 작가가 슬그머니 내 쪽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역시 작가님은 아시는구나······.
누구보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단아 작가다. 그래서 금방 알아차린 거겠지.
나는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얼른 TV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화면이 전환되며 차유석이 무쇠 식칼을 들고 채소 써는 모습이 나왔다.
‘저 인간도 독하다, 독해.’
곤룡포 입고 칼질하는 모습, 이거 귀합니다.
퓨전 사극이래도 드라마 역사상 최초일걸?
더 놀라운 건 요리할 때 대역 안 쓴 거다. 보통 요리하는 장면이나 피아노 악기 연주하는 장면은 손만 따는 경우가 많다.
한두 달 열심히 연습한대도 어색하니, 속 편하게 대역을 쓴다. 그런데 지금은 전신샷.
저 한 장면 때문에 차유석이 드라마 준비하는 동안 스타 쉐프 매일 찾아가서 요리 배웠다지 아마?
드라마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 주르륵 올라올 거다. 차유석의 연기 열정 어쩌고 하면서.
‘연기 열정은 무슨. 대한민국 가전 광고 혼자 다 먹으려는 욕심일 게 뻔하지. 하여간 세상 모든 관심은 죄다 가지려고 해요. 우리 애들한테 양보 좀 하면 얼마나 좋아?’
요리하는 왕을 저만치서 지켜보는 내시는 안절부절. 그러다가 중전이 멀리서 다가오는 화면으로 전환.
다행히 소월, 진아의 기지 덕에 중전에게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
‘좋긴 한데, 이거 겁나네. 이걸 나더러 감당하라고?’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
초반 15분 지났는데, 중전이 병풍이야······.
그럼 난 그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아야 해.
이러면 한지윤 기분 더럽지. 내가 한지윤 매니저잖아? 당장 작가한테 쳐들어간다고 길길이 날뛴다. 당연히 시늉만 해야지······.
그렇게라도 내 배우 달래야 하는 상황이야.
세상에 어떤 주인공이 초반 15분 동안 얼굴 한 번 비추고 사라져?
심지어 15분쯤엔 모나도 나왔다니까.
중전=홍 빈, 이건 정말 아니지.
한지윤만 불만 폭발할 상황도 아니야. 차유석도 빈정 상하지. 작감이 씬 순서 멋대로 바꾸고 통보하지도 않았잖아.
결과적으로 우리 애들한테 톱스타 둘이 물 먹은 게 됐다. 심지어 카메오까지 붙여서 아주 제대로 띄워줬어.
작가가 왜 그랬는지는 대충 이해가 가.
우리 애들이 예뻐서라기보다 너무 무명이라 그랬겠지. 아예 얼굴도 모르는 신인 배우는 시청자의 관심을 붙들어놓기 힘드니까.
신선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우리 아이들로 시청자 초반 시선 확! 붙들고 바로 차유석, 한지윤 등장시켜서 채널 못 돌리게 한 거다.
문제는 두 톱스타의 분노를 나보고 덤터기 쓰라는 건데······.
‘갑자기 매니저 고질병 도지네.’
1단계는 심장 두근거림.
2단계는 진땀.
3단계는 현기증.
현재 2단계 경보 떴다. 등이 축축해.
그런데 화면에서 예린이 시아 얼굴만 나오면 내 입꼬리가 눈치 없이 자꾸 실룩샐룩.
‘뭐 어때?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오늘만 살지 뭐.’
인생 뭐 있나? 이 맛에 매니저 하는 거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잖아.
내일의 강지훈 힘내라. 나는 이제 모른다.
그냥 즐길란다.
* * *
드라마가 끝나고 바로 예고로 한지윤이 두둥! 나오더니 진짜 끝. 그리고 곧장 한지윤이 모델인 광고가 TV에서 나온다.
저러면 한지윤 두 번 죽이는 거잖아. 1화 한지윤 등장 시간 보다 연달아 나오는 광고 시간이 더 길겠네.
‘이걸 어찌 수습해야 하나······.’
솔직히 내가 수습할 일은 아니야. 근데 이희경 작가한테 큰소리 빵빵 쳐놓은 요 주둥이가 방정이지.
속으로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도 내 눈은 아이들을 살폈다.
광고 몇 편 지나가는데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몽롱한 눈.
마치 꿈에 취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
“크흠! 드라마 어땠어? 선생님이랑 작가님은 어땠어요? 작가님 감상평이 제일 궁금합니다.”
“저요? 저야 마냥 좋죠. 제 그림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배우분들이 워낙 연기를 잘해주셔서 제 웹툰보다 더 나은데요?”
“우리 애들 앞이라고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겸손은요. 주연 배우로 차유석, 한지윤 배우 캐스팅됐다는 소식 듣고 심장 뛰어서 잠을 못 잤어요. 솔직히 제 웹툰에는 과한 톱스타잖아요. 그리고 피프티 나인 멤버들이 첫 장면에 모두 나와서 춤추는 거 보니까 저까지 가슴 벅차더라고요.”
“저도요! 드라마도 좋은데, OST가 어찌나 좋던지. 차유석 얼굴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니까.”
선생님, 차유석 얼굴 마르고 닳겠던데요······. 저번에 팬이라고 하도 노랠 불러서 내가 사인도 받아줬구만.
황희진은 제 노래가 진짜 드라마 OST로, 그것도 첫 곡으로 선택된 거에 크게 고무된 것처럼 보였다. 함께 그 고생을 했으니, 누릴 자격 충분하십니다. 아직 2탄 남았어요.
우리 아이들은?
코 찔찔이 모드다. 그나마 시아랑 예린은 실감이 안 나는지, TV만 멍하니 보는 중.
오히려 나머지 셋이 둘을 끌어안고 훌쩍훌쩍이다.
‘이래서야 감상평은 듣지도 못하겠네.’
여기서 누구 한 명만 울잖아? 그럼 전부 수도꼭지 열리는 거지.
“그러는 강 실장님은 감상평 없어요?”
황희진의 물음에 나는 씩 웃었다.
“저 오늘부로 인생 드라마 바뀌었습니다.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가 제 원픽이에요.”
“어이없어 증말! 이제 1화 봐놓고 무슨 인생 드라마에요?”
“그냥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 원래 순정파에요.”
“순정파라는 사람이 인생 드라마를 그리 쉽게 바꾸나?”
“어허! 이런 날 팩트 폭행 금지에요.”
황희진과 단아 작가는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황희진은 애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근데 이제 시작인 거 알지?”
“네!”
“그리고 진짜 좋은 집으로 이사 가면 내가 집들이 1호 손님인 거 까먹으면 혼나! 내가 너희 1호 팬이야.”
“어? 전 제가 1호 팬이라 생각했는데요? 전 이미 그림 그려서 조공까지 했어요.”
“전 곡 만들어서 줬거든요!”
“제 그림이 먼저잖아요. 그러니 제가 1호 팬이죠.”
와, 단아 작가님도 저런 농담 할 줄 아시네.
덕분에 우리 아이들 눈물이 나오려다 멈췄다. 서로 팬이라 주장하는 사람들 모습이 낯선 거다.
“근데 예린이 너 연기 레슨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발음이 웃겨. 그치 다혜야?”
“즈언하아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즈언하아아!”
은진, 다혜는 예린이 놀리기 시작. 예린이는 발끈하다가 큰언니들 붙잡고 찡얼대겠지.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아깐 나 잘한다며?!”
“무수리 연기를 잘한다는 거지.”
“이씨! 나 나인이라고오오!”
“응, 다음 무수리.”
하람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시아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좋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싶을 정도로.
그러나 난 지금 순간을 마냥 즐길 수가 없다. 원래 매니저는 드라마 딱 끝나면 바로 바빠지거든.
일단 내 배우 기분에 맞춰 적당한 액션 취해야지. 그다음 시청률 체크해, 시청자 반응 살펴, 적당히 포장해서 배우 기 살려주는 게 매니저 일이다.
이걸 죄다 매니저 혼자 해?
작은 회사야 다 하겠지.
근데 웰 메이드 정도면 지원팀에서 실시간 시청률 뽑고, 우리 배우가 나왔을 때 시청률 변동 추이 그래프까지 싹 다 뽑아서 담당 매니저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지금 나로서는 시청률 자료를 구할 수가 없다. 배우 파트나 그렇게 하는 거지, 아티스트 파트에선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를걸?
‘일단 시청률을 알아야 뭐라도 하지.’
나도 원래는 다 방법이 있었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잖아.
근데 드라마 보자마자, 내 계획이 박살 나버렸다.
실은 두드림 마수철 이사한테 연락하려 했거든. 그쪽이면 실시간으로 체크해서 드라마 방영 중에도 매니저한테 자료 보낼 테니까.
하지만 우리 애들이 차유석한테 비춰야 할 스포트라이트 홀랑 삼켰다. 이럴 때 자료 달라고 하면 쌍욕 날아오지.
“저 잠깐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누구랑? 여자랑?”
하여간 황희진 작곡가는 로맨스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비밀?”
“아, 뭐야! 비밀 많은 남자는 바람둥이라던데.”
“······.”
예린이 듣는 앞에선 제발 말조심 좀 합시다!
* * *
시청률을 잘 아는 사람 중에서 그나마 부담 없이 전화할 사람이 딱 둘 있다.
작가, 감독.
그리고 내 선택은 작가다.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물론 감독님도 고맙지. 하지만 드라마는 작가가 왕이라니까. 얍삽하다는 말 들어도 어쩔 수가 없어.
“작가님, 저 강지훈입니다.”
- 왜 전화 안 오나 했네요.
“하하! 저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랐잖아요. 우리 작가님 이러기 있기 없기?”
- 어머! 그래서 불만?
“이런 불만이면 저 불판 위에서 밤새 스텝 밟습니다.”
- 큭큭큭!
오케이! 작가 목소리가 밝다. 그럼 뭐다?
시청률 잘 뽑혔다는 거지.
“작가님한테 연락드리려고 급하게 나오느라 아직 시청률 확인을 못 했거든요. 근데 궁금하지도 않았다니까요. 드라마 보는 순간 느낌 오더라고요. 이건 됐다! 게임 끝났다. 초전박살 박살 났구나! 제가 설레발 친 건 아니죠?”
- 뭐, 그냥저냥? 최고시청률 딱 12.3% 찍혔어요. 옆 동네는 오늘 9.9%라던데.
구구 프로?
호랑이 아니고 비둘기였어? 아주 새 됐네? 분명 나쁜 스코어는 아니지만, 후발 주자한테 바로 추월당했으니 옆 동네는 지금 초상집 분위기일 거다.
예상했어도 막상 귀로 확인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차유석은 그나마 내가 비빌 구석이 생겼거든. 절대 인정하진 않겠지만, 조진호랑 라이벌이잖아.
라이벌 자빠뜨리는 것만큼 이 바닥에서 기분 좋은 일이 없어요.
“하하, 첫 방 12.3%면 저한텐 초대박입니다. 우리 작가님 필력이면 중반부턴 30% 찍겠는데요?”
- 30은 무슨. 20%만 넘겨도 소원이 없겠네요.
요샌 시청률 10%만 넘겨도 중박 소리 듣는다. OTT에서 반응 좋으면 충분히 좋은 성적이고.
20% 넘으면 그냥 대박이지. 운만 좋으면 연말 시상식에서 상 휩쓸 만큼 잘 된 작품이다.
“그 소원 이루어질 겁니다. 제가 요새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거든요.”
- 오늘부턴 다른 기도하는 거 아니에요?
“예? 무슨 기도로요?”
- 난 왜 살려달라 기도할 거 같지? 제 부탁 안 잊었죠? 현장 분위기 난 몰라요. 저 전화 끊자마자 폰 꺼놓을 거예요.
여기서 약한 모습 보인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앞으로 우리 소월이 진아 비중이 달렸거든.
내 뚝배기 깨져서 피 철철 흐르면 어때?
수혈받으면 안 죽어.
우리 애들 잘나가면 그게 수혈이지.
“작가님 집필에 집중하셔야 하니, 당연하죠. 방송국 국장님 전화도 받지 마세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 진짜로? 지금 옆에 국장님 와 계시는데, 당장 쫓아낼까요?
- 크흠!
헉! 남자 헛기침 소리?
“생각해보니, 국장님 전화는 받으셔야겠죠?”
- 프하하핫! 강 실장, 쫄았어?
“감독님이셨어요?”
괜찮다. 떨어진 간이야 주워서 깨끗이 씻으면 되지. 우리 애들 첫 장면으로 편집해준 감독님 욕하면 못써.
- 강 실장 꿈이 용하긴 용한가 봐. 앞으로 꿈꾸면 무조건 나한테 팔아.
“······알겠습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치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날 보는 아이들에게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며 외쳤다.
“시청률 12.3% 나왔다! 옆 동네 초전박살은 9.9%라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작가의말
모래바다 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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