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세상 속 평범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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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누각
작품등록일 :
2023.03.2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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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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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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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쌓아놓은 인맥

DUMMY

5년 내내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입구에 놓인 글자들을 숙독했다. 그러나, 이리도 봐보고 저리도 봤는데, 결론은 늘 그대로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아무리 두뇌를 쥐어짜도 해석 불가였다. 다수의 종문제자는 입구에 적힌 문구는 그저 쓸데없는 말을 휘갈겨 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굳게 믿었다. 이것이 정말로 심검법의 일경지라는 것을.


이 신뢰는 나의 건강에 그렇게 좋지 않았다, 아니, 꽤나 해로웠다. 문장 뒷부분에 유난히 나는 사로잡혔다. 아마 그것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에 그랬을 것이다. 고로 나는 뭐만 하면 피토를 유도했다. 각혈이 나의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 행동이 일상화로 등극한 후 다른 종문제자들은 나를 꺼렸다. 단단히 정신줄 버린 놈처럼 보였을 게 뻔하다.


이해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자꾸 피를 토하는데 누가 그것을 좋게 보겠는가? 그보다 극소수의 종문제자만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그저 종문제자인 5년간 최대한의 권력을 누리려고 했다. 내가 1방에 들어선 이유도 비슷하다. 4방의 일원은 평균 하루에 18시간을 일했는데, 1방의 일원은 12시간만 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방을 오르려고 노력했다. 차근차근 꾸준히 심혈을 기울인 결과 나는 4년 조금 안 돼서 1방에 입장했다.


'1방은 그래도 종문제자라는 족쇄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별로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종각에서 방(方)이라는 개념은 종문제자들이 만들어낸 거라 그저 허풍이었다. 1방이나 4방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다리 없는 자에게 나는 발가락 하나 있다고 자랑하는 꼴이었다.


내가 심검산에 처음 왔을 때 나를 폭행한 가해자는 이미 몇 년 전에 노비로 강등당했다. 나는 깨끗이 그를 무시할 참이었지만, 다른 애들의 마음은 조금 달랐나 보다. 나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신입들을 버릇처럼 팬 그는 결국 비열한 끝을 맞이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심검산을 떠나는 게 막혀있는 노비와 종문제자가 하루아침 실종됐다는 것은 아마 어디 흙 속에 묻혀있을 높은 가능성을 암시했다.


노비 말 나온 김에 나의 미래 처지가 따분하고 안쓰럽다. 노비는 따로 모여 지내는 각(閣)도 없다. 집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비는 어딘가 엉겨 붙어 생활하는 수밖에 없다. 아주 드물게, 몇몇의 노비는 자신의 몸을 외문제자나 그 위의 계층에 받친다고 들었다. 뜬구름 잡는 헛된 잡담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환경이 비참한 자들은 정신이 비참하게 오염될 마련인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말이었다. 몸을 받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걷잡을 수 없지만, 분명히 처참한 것일 거다.


그리고 곧 있으면 이게 나의 운명이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이토록 비참했다. 예정된 미래를 거스르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외문제자가 되기.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갈고닦았다. 가끔 나는 할 일도 까먹은 채 몇 시간 동안 종각 대문 앞의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를 방해한 자는 없었다. 이미 나는 오래전부터 외톨이 신세여서 자발적으로 나에게 대화를 시도할 애들은 신입 정도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물리적인 힘보다는 지적인 우월성 덕분이다. 물리적인 힘은 이미 한물갔다. 맨날 각혈하는데 힘이 남아돌겠는가? 내가 처음 두 달 정도 여기를 굴러본 결과, 일 처리 과정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살을 떼고 뼈를 깎아가며 윗대가리들과 충돌했고, 결국은 나의 승리였다. 이를 의외로 높게 평가한 종각의 장로는 나에게 칭찬을 딱 한 번 했고, 이것 때문에 나의 위상이 승승장구했다.


"후... 그런데 결국은 같은 처지네. 씁쓸하다."


"예?"


"아니다, 계속 주물러라."


뒤에서 내 어깨를 주무르던 신입은 잔말 없이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한 달 안에 나는 살고 싶으면 얼른 심검법을 습득해야 했다. 15살이라는 젊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신아, 너는 심검법 입문에 성공했느냐?"


"회린 형님,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암만 봐도 문 앞의 문구는 괴상하고 무의미하지 않나요? 그냥 저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자그마한 희망을 주려는 뻔한 술법이잖아요."


나는 현신의 머리를 콩 막대기로 때리며 대꾸했다.


"예끼! 그런 말은 못써! 너는 왜 희망이 희망인 줄 아느냐? 희망(熙茫)이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암흑 속에서도 빛이 보이는 것이다! 빛이 없는데 빛이 보이니 희망(熙茫)이다! 잘나가고 희희낙락하면 뭣하러 희망을 떠들어대냐? 없는 것도 있게 만드는 힘이 바로 희망(熙茫)이다! 믿습니까?"


"옙! 역시 형님입니다!"


나와 현신은 허허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참, 현신아. 너는 번호가 뭐였지?"


"4방 이십삼이에요."


"음? 4방 왜 이렇게 인원이 줄었어?"


한숨을 쉬더니 현신은 음울한 어조 대답했다.


"이번 달 네 명이나 목숨을 잃었어요. 지난번에 아모라 꽃을 채집하라는 임무가 내려온 거 기억하나요? 우리 4방이 수행하기로 결정됐는데 불의의 사고가 나서 그렇게 되었어요. 움페한테 습격받았다나?"


"흠. 안타깝게 되었네. 그래서 그 움페는 어떻게 됐대?"


"제가 알기로는 장로가 해결했어요."


감탄과 탄식의 중간을 내뱉으며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린 다음 기분을 읊었다.


"나도 언제쯤 그 늙다리처럼 강해질까? 움페는 아주 악랄한 멧돼지여서 하나가 소규모 마을에 돌격하면 그곳을 초토화시킬 텐데, 그 매서운 짐승을 파리 잡듯이 장로가 잡다니! 또 보나마나 시체를 비싼 가격에 팔았겠지!"


"형님, 신비로움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그냥 어른 여러 명 모아서 그 움페를 사냥한 게 아닐까요?"


얼토당토아니하여 나는 곧장 반박했다.


"예끼! 무슨 소리냐!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하늘을 날아다니던 외문제자를 봤어!"


의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곁눈질로 쳐다본 현신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얻은 안마사를 잃기는 싫어서 그냥 무시했다.


한동안 안마를 받으며 날을 보냈지만, 결국에는 현신을 도로 4방으로 돌려보낸 뒤 오늘도 어김없이 대문으로 가서 거기에 새겨진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바로 영감이 떠올라 한바탕 피를 내뱉은 후 나는 슬금슬금 종각을 벗어났다.


비록 종각이 척박하고 황량해서 촌동네를 연상시켰을지는 모르지만, 바깥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전혀 새로운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얘네들은 밖을 좀 돌아다녀 봐야 해. 하도 그 촌구석에 늘어져 있으니 이 뜻깊은 경치를 외면하지."


나는 잘 가꾸어진 푸른 숲과 저 멀리 있는 웅장한 폭포를 감상하며 지난 5년간 만들어놓은 인맥을 활용하러 어슬렁거렸다.


제일 먼저 가본 외문제자는 내가 5년 차 종문제자라는 것을 깨닫자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며 쌩 어디론가 가버렸다.


두 번째로 방문한 외문제자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다가간 자는 심검산에서 비밀리에 암시장을 운영하던 외문제자였는데, 그는 나를 온전히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등 몇 번 토닥이는 게 전부였다.


아니, 잘만 살아있는데 왜 벌써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나는 결국 종각으로 돌아왔다.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기어들어 온 게 수치스러웠지만, 그만큼 걱정이 쌓였다. 노비가 나쁜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외문제자들은 나를 이미 죽은 자를 대하듯 행동했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하긴, 애들을 반쯤 납치해서 노동력으로 쓰는 조직이 좋을리만은 없지.'


이 계기로 다짐했다. 이 심검산이라는 곳을 밑바탕부터 순차적으로 조사해서 진실을 파헤칠 거라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상향식으로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향식으로도 알아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무조건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내가 근접할 수 있는 최고 권위자는 바로 종각의 장로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심검산의 위계질서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그저 장로, 외문제자, 종문제자, 노비—이렇게 마음속으로 이곳의 서열을 정리했다.


나는 곧바로 의도를 실행으로 옮겼고, 종각을 다시 나와 인근을 두리번거리며 장로를 찾아다녔다. 오랜 시간 동안 헤맨 결과 나는 간신히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노련한 어르신은 바둑판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응답했다.


"종문제자 중 한 명인 거냐? 무슨 일이 발생했느냐?"


"아닙니다. 종각은 장로님의 다스림으로 평화롭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여쭈어볼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노공은 마침내 바둑판에서 시선을 극미량 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는 진홍빛 의복을 입고 있었고, 옷의 천은 여름 산들바람에 살며시 나부끼고 있었다. 예복의 가슴에는 검의 형상을 띤 선혈처럼 붉은 표상이 있었다; 지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러느냐? 한번 말해보거라."


크게 숨을 들이마셔 용기를 품은 후 나는 입을 과감히 열었다.


"저는 장로님의 위대한 역사와 계보를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리 엄청난 힘을 터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신속히 나는 허리를 푹 숙였고, 심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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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동물과 사람이 구별되는 근본 23.04.07 24 1 10쪽
14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 23.04.06 22 1 10쪽
13 기괴한 혈고(血蠱) 23.04.05 31 1 11쪽
12 완벽한 무시를 당해보지 못해서 23.04.04 37 1 10쪽
11 어떻게 심검법 수행자가 하늘을 나는가 23.04.03 42 0 10쪽
10 복리라는 도술 23.04.02 47 1 10쪽
9 금지된 주술의 맛을 본 자 +1 23.04.01 47 1 9쪽
8 희생이라 쓰고 살인이라고 읽는다 23.03.31 50 2 11쪽
7 살인의 추억 23.03.30 55 2 10쪽
6 거센 혈결의 진실 23.03.30 56 3 10쪽
5 이면의 면식 23.03.29 57 3 10쪽
4 착취에 얽힌 이해관계 23.03.29 65 2 10쪽
» 쓸모없는 쌓아놓은 인맥 23.03.28 73 2 10쪽
2 심검산(心劍山)의 실체 +1 23.03.28 85 2 11쪽
1 10살 때 하늘을 날던 남자에게 끌려간 날 23.03.27 130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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