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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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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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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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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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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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프롤로그

DUMMY

이 이야기는 ‘붉은 손’의 이야기다.


“너, 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화염에 휩싸인 건물 안에서, 정우가 비단옷을 입은 여인의 손목을 방의 기둥에 못질하고 있다.


못이 조금씩 여인의 손목을 파고들 때마다 여인의 입에선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여인의 얼굴은 눈물과 피, 재와 먼지가 뒤섞여 만신창이다.


“전부 다 살려고 한 일이야! 살려줘! 제발! 살려만 주면 뭐든 할게! 우린 말이 잘 통하던 사이잖아!”


“미리 짜둔 것도 아닌데,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너 이전에 다섯 명 전부 다. 그런데, 난 지금 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었어. 네가 왜 우리 마을 사람들을 몰살했는지 물어본 게 아니라.”


정우가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여인의 눈을 바라본다. 무감정한 눈엔 증오가 서렸다.


“뭘 원해? 작위? 돈? 정보? 내가 다 줄 수 있어! 뭐든지!”


못질을 멈춘 걸 좋은 신호로 보고 여인이 제안을 이어간다. 그러나, 제안한 것들은 정우에겐 아무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고통이 여인의 판단력을 흐리고 있다.


“나는. 지금.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었어.”


끊어지는 단어마다, 정우가 새 못을 깊게 박아 넣는다. 방금보다 내려치는 힘이 강해졌다.


“끄아아악!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그냥 장물 처리 담당이었을 뿐이야!”


어깨를 으쓱거리곤 못질을 이어간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진 않은 눈치다. 여인은 고통에 부들거리며 울부짖을 뿐이다.


“사실, 나도 잘 몰라. 불 때문에 돌아가셨는지, 총이나 칼에 돌아가셨는지 알 방법이 없거든.”


정우가 분노를 삼키듯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어떻게 해도 어머니와 같은 종류의 고통을 줄 방법을 생각해 냈어.”


정우가 여인의 다리 쪽에 건물이 무너지며 생긴, 날카로운 돌덩이 하나를 던진다. 솜씨 좋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도끼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다.


“마님께선 배짱이나 운이 남다르시지 않습니까? 충분히 살아나가실 수 있습니다.”


청년이 조롱 섞인 미소와 함께 여인의 귓가에 속삭인다.


“이건 퇴직 기념 선물로 받아 가겠습니다. 미천한 시종이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마님.”


정우가 여인의 손에서 붉은 손이 작게 새겨진, 조그만 은반지 하나를 빼간다. 한껏 과장된 자세로 절하고, 출구를 향해 달려나간다.


여인은 잠시 멍하니 돌덩이와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이내 돌덩이의 의미를 깨달은 듯 절규한다.


“제발 총으로 그냥 머릴 쏴! 제발! 이리 오라고 이 X새끼야!”


정우가 그 절규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나 그는 감정에 휘둘려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사내가 아니다.


뒤를 돌아봐 여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여인이 탈출구로 삼을 통로를 가구로 단단히 막아둔다. 손목을 잘라낸 여인이 막힌 길을 발견하곤 절망할 것을 생각하며 그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마님을 찾을 수 없었소. 미안하오. 내가 못나서···.”


이윽고 먼저 탈출한 가솔들이 기다리는 건물 출구에 도착했을 때, 그가 미소를 거두고 슬픔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다. 자신을 책망하는 말은 의심을 없애기 위한 쐐기다.


가솔들이 평소 충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였던 그를 감싸준다. 모든 게 정우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대륙 동부에서 발흥한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잡은 지 어언 200년, 강성했던 제국은 점점 힘을 잃고 쓰러지고 있다.


황제 앞에 조아려 신하를 자청하던 서부의 왕국들은 대륙 바깥의 식민지들을 기반으로 점점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 어떤 나라에선 서부의 왕국들을 통합해 황제 없는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마저 일고 있다.


제국 내부의 상황 역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공작들을 필두로 한 대가문들 사이엔 황제에 대한 불만과 요구가 점점 증가하고, 북방과 남방에 세운 식민지들은 야인 부족에게 위협받는다.


제국은 현 상황을 억누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군사력과 행정력은 그저 해묵은 위협과 악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쓰더라도 충분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도적이 창궐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잦은 전쟁 사이마다 찾아오는 짧은 평화의 시기,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한 많은 수의 용병이 도적으로 전직한다. 총과 칼에 기대 살아온 자들인 만큼 관군도 그들을 토벌하는 데 애먹는다.


심지어, 중심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은 그런 관군의 힘조차 빌리기 어렵다. 도적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아 하룻밤 만에 마을 하나를 불태우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15년 전, ‘적수단’이라는 도적단이 제국 동부 변경의 호산주에서 날뛰었다. 수십의 마을이 불타버렸고, 관군은 그들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머리잡이들 역시 현상금을 노리고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그들은 푸른골을 불태운 것을 마지막으로 조직을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정우는 푸른골의 유일한 생존자다. 단 하루 만에 어머니와 이웃을 모두 잃은 그는, 자기 심장이 뛰는 한 도적단의 그 누구도 살아있지 못할 것이라 맹세했다. 그리고, 지금껏 여섯을 사냥했다. 이제 남은 건 넷뿐이다.





눈이 많이 쌓여 힘든 길이었다. 마을의 돌아보고 묵을 곳을 정하려는 참에, 방벽에서 내려온 경비병이 성벽 밖의 마을 어귀에서 퉁명스러운 어투로 신원을 묻는다.


“거기 뉘쇼? 이런 날씨에. 행색을 보아하니 근처 마을 주민 같지는 않은데.”


“잠시 누군가를 만나러 왔소. 급한 일이오.”


경비병은 의외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숨을 삼키며 눈썹을 치켜뜬다. 이런 곳에 혹독한 눈보라를 견디며 방문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쪽 이름은?”


“검나뭇골 용단.”


“얼굴도 좀 보여주시오. 신원을 확인해야 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방한복의 바람막이를 내리고 모자를 벗는다. 경비병이 넋을 놓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한동안 이발이나 면도는커녕, 씻지도 못했다. 그리 보여주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왜 그러시오? 어디서 본 얼굴이오?”


말을 걸어 그녀의 시선을 돌린다. 이런 헛일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빠르게 마을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아! 아니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사래를 친다. 얼굴 가리개 위로 살짝 드러난 뺨이 빨갛게 상기됐다.


“잠시 품속에서 뭣 좀 꺼내겠소.”


그녀가 허리춤의 권총에 가볍게 손을 갖다 댄다. 경계하는 눈치는 없다. 그동안의 경험이나 선배들의 조언(을 가장한 무용담 자랑)에 영향을 받은, 단순한 습관일 뿐이다.


품속에서 작은 크기의 은반지를 꺼낸다. 중간에 붉은색으로 손 모양의 음각이 들어간 것 외에는, 완전히 민무늬인 특별한 것 없는 반지다.


“이걸 그쪽 거두마치한테 건네주고, 옛 친구가 도움을 청한다고 전해주시오.”


순간 그녀의 표정이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이내 긴장을 풀고, 나를 가까이 잡아끈다.


“보시오. 내가 그쪽이라면 우리네 거두마치랑 알고 지내는 사이란 말은 안 하겠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모호하게 대답하기 위해 고개만 끄덕인다. 그녀는 그 태도가 탐탁잖은 듯 미간을 찌푸린다.


“일단 들어오시오. 이런 추위에 오래 세워둘 순 없으니.”


우리 둘은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 길을 걷고 있다. 여전히 분위기는 어색하다. 그녀는 그 어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인지, 내게 말을 걸어 온다.


“그래, 그쪽은 어쩌다 이런 벽지까지 왔소?”


“말했잖소. 배달부라고. 보수를 받으면 배달해주는 게 우리네 일이지.”


“아니, 내 말은, 그게, 뭘 배달하길래 이런 곳 거두마치까지 찾냐 이거요. 아무리 세금 걷는 치가 나랏님 대리인이더라도 말이지. 그쪽 행색이 딱히 나랏녹 먹는 사람 같지는 않고,”


“아무리 경비병이라도 그런 건 말해줄 수 없소. 신뢰가 배달부의 생명 아니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성벽 위에서 다른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침묵을 깬다.


“야 이게 뭐이니, 야들아! 와 보라! 막내가 남자를 데려왔지않니!”


중년의 건장한 여성이 동료들을 불러 모은다. 모여든 동료들이 낄낄거리며 한 마디씩 더한다. 이 녀석이 드디어 짝을 찾았다고 하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둥 놀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녀가 잠깐 당황한 듯 뒤로 빼며 손을 내저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성벽 위를 가볍게 쏘아본다. 성벽 위에 웃음소리가 크게 번진다. 이런 소란에 끼는 건 내키지 않는다.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다.


“어휴, 여하튼, 아즈마이! 이 사람 배달부라는데, 우리 거두마치한테 전해줄 게 있다 하오!”


“대장이라 부르라지 않니!”


건장한 체격의 여성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모습을 보인다.


“물건만 받아두라. 그쪽은 돌려보내고. ”


“이 추위에? 얼어 죽을 게 확실하우다.”


경비병이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투로 항의한다.


“요즘 마을 분위기 알지않니. 내도 이러고 싶진 않아.”


성벽대장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주변 동료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다. 어떤 이는 너무한 처사 아니냐며 따지기까지 한다.


“내 약혼자요.”


경비병이 숨을 한두 번 고르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릴 내뱉는다. 성벽 위의 소란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장작 타는 소리만 희미하게 메아리친다. 나를 포함한 이곳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다.


“내 약혼자요. 이 사람”


당황스럽다. 그냥 동굴에서 지내다가 떠돌이 사냥꾼인 척하고 들어가는 게 나았겠어. 정말로 귀찮은 사람에 엮인 것 같다. 도와주는 건 고맙다만.


성벽대장을 포함한 경비병들의 눈이 매우 커졌다. 그러나 소리가 터져 나오진 않는다. 여전히 정적만이 흐른다.


성벽대장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래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좋아. 그럼 어디서 어떻게 안 사이니? 니 다른 마을로 나가본 적도 없지 않니.”


“저···그게···.”


아무리 봐도 무리한 거짓말이다. 일이 틀어진다면···. 최대한 도망가 봐야지.


“부모님 예전 동료분 자식이오. 전쟁 때 서로 목숨도 구해주고 하면서 친해졌다 들었소. 그때 사돈 맺자고 얘기 나왔나 보오. 아시다시피 부모님은 거기서 돌아가셔서 내는 못 들었고.”


자기가 생각해도 훌륭하게 둘러댔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곤 날 돌아본다.


“내 제대로 말한 게 맞소? 검나뭇골 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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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8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4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3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1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1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1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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