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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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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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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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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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85 (유나 1)

DUMMY

 “당장 떨어져요! 당장!”


 현이 들고 있던 가방까지 내팽개치며 나와 유나 사이에 끼어든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장난이 과하잖아요!”


 “아이, 그게 아니그..”


 유나 녀석, 밀려나며 끊어진 빵을 여전히 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의 집념이다.


 “똑바로 말해요! 입에 있는 거 뱉고!”


 현이 유나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씩씩거리는 그녀의 눈엔 눈물이 조금 맺혀, 어마어마하게 화난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아.., 앙대! 아딕 빼믄 앙대!”


 저렇게 흔들리면서도 눈은 내가 빵에서 입을 떼는지 지켜보고 있다.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뱉으라고요! ..이익!”


 결국, 현의 거친 손길에 유나의 입에서 빵이 빠졌다.


 막아보려 했던 유나지만, 울며불며 날뛰는 예현의 얼굴을 바라보곤 이내 힘을 뺐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고, 현이 나와 유나를 꿇어앉혔다.


 현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다. 호랑이라도 잡아먹을 기세다.


 아니, 호랑이에게 노려봐질 때도 이 정도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야 ‘뱀 앞의 개구리’라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다 ‘장난’이었다고요?”


 “그, 그래. 정말이야. 이 녀석이 못된 장난을 친 거라고.”


 잘못한 건 유나 녀석인데, 어쩐지 나까지 꿇어앉혀졌다.


 억울하다. 그저 장난에 휘말렸을 뿐인데, 


 “자긴 조용히 하고 있어! 지금 둘이 얘기 중이잖아!”


 억울함을 피력하려 붙여 본 말이 순식간에 일축당했다.





 “지금 남의 남자 입술을 훔치려고 한 게, ‘장난’이라고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지는 말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진다.


 “..아니, 그게에... 떼려고 했어. 입술이 닿기 전에. 그냥 정우 이 녀석이 얼마나 버티나 보려고만 한 거야.”


 유나가 울상지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나, 표정만 울상이지 눈물은 전혀 고이지 않았다.


 이젠 가짜로 우는 척까지 하고 있다. 내게 잘못을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이 녀석도 잘못이 없진 않아! 내가 하자고 했을 때 뺐어야지!”


 유나가 갑작스레 날 돌아본다. 어우, 저 밉살맞은 얼굴에 꿀밤이나 좀 먹였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네가 날 속였잖아! 평범하게 투전이나 돌릴 것처럼 하더니!”


 “네가 멋대로 착각한 거잖아! 네가 속은 거 인정하고 항복했어야지!”


 이런 씨..! 속에서 천불이 인다. 화난 현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머리가 어지러운 통에, 유나가 기름을 붓는다.


 “이 녀석이 달려들어서 말려든 거야! 오히려 피해자라고, 난!”


 이 정신 나간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지.





 “아오, 이걸 그냥..!”


 참지 못하고 목에 팔을 걸어서 조여버렸다. 폭발할 것 같은 얄미움을 식히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켁, 켁! 아이고오, 이놈이 사람 목을 조르네! 봤어? 정우 이 녀석도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거라니까!”


 유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화를 돋운다. 지금 당장 이 녀석을 이성희롱죄로 병사들에게 넘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만! ..어휴, 머리가 아프네...”


 보다 못한 현이 우릴 제지한다. 진심으로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문지르고 있다.





 “유나님, 제가 다른 장난은 맞춰줘도, 제 남자 몸에 손 대면 어떻게 한다고 했죠?”


 현의 말에 유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간다. 현 성격에 뭔가 물리적인 제재를 가할 것 같진 않은데, 뭐지?


 “..히익! 그것만은 하지 말아줘어. 제발. 내가 다 잘못 했으니까아. 제바알.”


 울상인 유나가 현의 치맛단에 달라붙는다. 이번엔 진짜로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고 있다.


 “그렇게 달라붙어도 안 봐 드릴 거예요. 앉아요.”


 “제바알. ..히끅!”


 저 녀석이 저렇게 진심으로 울상인 건 처음 본다.


 “계속 이러면 시간만 더 늘어나요. 빨리 저기 구석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아요. 지금이 5시 좀 전이니까, 6시간 동안 잔소리를 들으려면 서둘러야죠.”


 유나가 싫어할 만하군. 전투 외의 상황에선 3분도 가만히 못 있는 녀석이니.


 거기에, 분노한 현의 입심은 꽤 강한 편이다. 그걸 6시간 동안 듣는 건 저 녀석에겐 웬만한 전투보다 더 힘들겠지.


 “..우으...”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방의 구석을 향해 걸어간다. 정말로 ‘처벌’이 싫긴 한 모양이다.


 “자긴 가봐. 못된 장난에 말려든 게 맞는 거 같으니까. 6시간 동안은 돌아오지 말고.”


 역시, 현이 내 억울함을 알아줬다. 고마움에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어질 정도다.


 돌아오는 길에 꽃다발과 사탕을 좀 사 와서 기분을 풀어줘야겠다.





 “..유나님을 벌주기 전에, 잠깐 실례할게. 자기.”


 음, 뭐지..? 방을 나서려는 참에, 현이 내 옷깃을 잡아끈다. 그리고...


 “..흡.”


 고개를 돌리자마자 현의 입과 나의 입이 포개졌다. 그녀의 혀가 얽혀들어 온다. 딸기 맛이 입 안에 감돈다.


 따스한 숨결이 뺨에 닿아, 이전까지 있었던 바보 같은 싸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에 맞춰 그녀의 심장박동이 입을 타고, 손길을 타고 전해진다.


 크게 떴던 눈이 점점 감긴다. 입에 모든 감각이 집중된다. 시간이 점점 느려진다.


 세상의 색과 소음이 차단된다. 우릴 둘러싼 벽과 가구가 허물어지고, 세상에 나와 그녀만이 남는다.





 “미안. 너무 갑작스러웠지?”


 그녀의 음성이 나를 다시 이 세상으로 돌려놓는다. 좋은 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가 버리는군.


 “갑자기 생각나서. 이만 나가봐.”


 머리가 멍해진 탓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따라 방을 나선다. 지금도 어쩐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다.


 “돌아오면 안 재울 거야. 각오해.”





 “조준점이 흔들리지 않게! 조준은 더 빠르게!”


 재무관과 초회차 운송 계약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훈련장에서 병사들을 훈련하던 유나와 눈이 마주쳤다.


 잘 맞지 않는 갑옷을 억지로 입어, 흡사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총기가 모자란 탓에, 병사들은 줄을 지어 총을 쥐며 훈련받고 있다.





 “여, 고생한다.”


 연단 위에서 병사들을 둘러보고 있는 유나에게 다가간다. 장난칠 때와는 전혀 다른 진지함이 드러난다.


 유나의 작은 체구에도 병사들에게선 무시하는 분위기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적당히 ‘실력’을 보여줬나 보군.





 “나 보러 온 거야? 이런이런, 역시 내 매력이란..”


 연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진지함이 여름날 청주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돌아왔을 때 유나는 계속 히끅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더 말을 못 하고 담요 하나만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


 그리곤, 이틀 뒤에 다시 장난을 시작했다. 도무지 논리적으론 이해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적어도 지금은 내 몸에 손대진 않으니 발전했다고 해야 하려나.





 덕분에 난 그날 밤 죽을 뻔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허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런 거 아냐.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냥 마주친 거지.”


 레흐의 군 현대화 사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오늘 내게 주문한 훈련용 총기 200정과 탄약도 1달 안에 도착할 것이다.


 훈련 교관의 자리는 계획한 대로 유나에게 돌아갔다.


 처음엔 반발과 의심이 좀 있었다. 유나가 200보는 떨어진 곳에 있는 표적을 5번 연속으로 맞추자마자 사라졌지만 말이다.





 “훈련은 잘 돼 가?”


 “나쁘진 않아. 몇 명 빼고는 총에 익숙지 않은데, 눈이 좋은 녀석들이야. 금방 배우겠지.”


 유나가 뒷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린다. 표정과 행동 쪽이 본심이군. 제대로 훈련이 되고 있진 않은 모양이다.


 이래서야, 내가 ‘뒷골목’에서 벌어다 줘야만 하는 시간이 늘어날 것 같다.


 레흐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슬슬 회의도 끝나 가는군. 다음 안건은 무엇인가.”


 처음 참여한 자문회의에선 행정 이야기나 외교, 군대 양성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유익한 정보도 몇몇 있었으나, 대게는 지루하기만 한 이야기였다.


 ‘주변 영주들이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그나마 큰 수확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쩌면 새로 자문회에 합류한 날 경계해, 핵심적인 정보를 나누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주군. ‘브로지카’ 백작령에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관장이 책상 위의 지도 한쪽을 가리킨다.


 ‘브로지카’는 올레스니카 안의 봉역 중 하나로, ‘피셰’ 남서쪽으로 하루나 이틀 정도 말을 전력으로 달리면 닿는 곳이다.


 “또 그곳인가. 저번 소요가 일어나고서 채 2년도 되지 않았지 않나.”


 반복된 소요라···알아둬서 나쁜 것 없는 내용이다. 


 “큰 일이었나 봅니다. 주군.”


 “100명을 훌쩍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소. 엄청난 비극이었지.”


 레흐가 최대한 들키지 않게 이를 악문다. 그의 직할지에서 일어난 비극이 아님에도,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브로지카’ 백작령은 내 신하인 ‘흑의백’ 나탈리아의 영지요. 그녀의 가문이 대대로 그곳을 다스렸지.”


 “자주 소요가 일어난다니, 그리 좋은 통치자는 아닌가 보군요.”


 “그렇소. 폭정으로 봉역에 악명이 자자한 여인이오. 나도 몇 번인가 개입해보려 했지만, 계약과 법률상 만류 이상의 행동이 불가하오.”


 특별한 계약을 맺지 않는 한, 주군의 봉신에 대한 개입을 금지하는 제국법 때문인가.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악인이라. 내가 할 일을 찾았군. 악인의 상대는 악인이 하는 법이다.


 레흐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주군, 잠시 ‘브로지카’에 다녀오겠습니다. 1주일 정도 걸릴 것 같군요.”


 “무슨 일이오? 설마, 무력으로 해결할 생각인 거요?”


 “그저 ‘첩보장’의 의무를 수행하러 가는 겁니다. 운이 좋다면 ‘흑의백’이 제국 법정에 서게 되겠죠.”


 레흐가 안심한 듯 한숨을 몰아쉰다. 아무리 무도한 신하라도 그에겐 지켜야 하는 사람 중 하나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물론, 단순히 정보만 수집할 계획은 아니다. 그걸 위해서 말을 애매하게 하기도 했고.





 ‘흑의백’ 나탈리아의 운이 좋다면, 그녀는 법정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꽤나 즐거운 일이 되겠지.


 제발 법정으로 끌고 갈만한 증거가 없었으면 좋겠군. 내 살육 충동을 채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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