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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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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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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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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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86 ('흑의백' 나탈리아 - 1)

DUMMY

 “사막 너머의 사람이 이곳까지 오는 일은 흔하지 않은데. 특히나 그쪽처럼 상인이 아니라면 더더욱. 무슨 일이지?”


 검문하는 병사가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올린다. 예상한 수준의 의심이다.


 “쇤네는 떠돌이라 말유.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여까지 왔슈.”


 어수룩해 보이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것 참, 연기라지만 마음에 안 드는군.


 “..흐음.”


 “여기선 한몫 잡았으면 좋겠슈. 참한 샥시도 얻구, 집도 얻구...”


 “그런 건 제국 안에서도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말유, 친구가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왔는디, 그 친구가 모아둔 재산을 들고 튀어버렸슈!”


 어수룩한 말투와 추레한 옷차림이 말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레흐가 걸치고 다니는 망토를 참고해 입어봤는데, 꽤 효과가 좋다.





 “그 썩을 눔의 시키! 잡히면 가만 안 둘 거유! 내 그눔 뺨따구를 그냥..!”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여기서 한 번 더 밀어붙이면 충분히 넘어올 것이다.


 “나리도 그리 생각하시쥬?! 그눔이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디.., 다 거짓부리였슈! 세상에 믿을 눔 하나..”


 병사 쪽으로 몸을 기울여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눈에 띌 수 있는 내 외모는 검댕 칠과 가죽 조각으로 감춰, 평범하게 못생긴 얼굴이 되었다.


 “알았소! 알았으니 잡담은 멈추시오! 뒤로 좀 물러서고.”


 병사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 친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건 있소?”





 “야, 있슈. 이거면 되쥬?”


 그에게 위조한 호패를 건넨다. 올레스니카는 제국이면서, 제국이 아닌 곳이다.


 줄곧 속했던 서부 왕국에서 벗어나, 제국에 편입된 지 60년을 갓 넘겼다.


 아직 제국의 제도나 문화, 기술이 온전히 자리 잡지 않았다.


 그러니 병사들도 위조된 호패를 보아도 별 이상을 감지하지 못한다.


 “소패 변경백령, 노을골의 덕배.”


 “야, 맞슈. 지는 들어가서 힘쓰는 일을 할 거구만유. 창고 같은 데면 더 좋구.”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힘쓰는 시늉을 해 보인다.


 “머물 곳은?”


 “일하는 데서 알아봐 주지 않겠슈?”


 병사가 옆의 동료를 돌아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킥킥거린다. 대책 없는 머저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딱 좋다. 약간 모자라 보이면서도, 엉뚱한 짓은 안 할 거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좋소. 지나가시오. 카탸, 얼마나 버틸 것 같아? 2주 안에 도망친다에 은편 2닢 건다.”


 병사가 작은 목소리로 옆의 동료에게 내기를 건다. 내게 하는 소리인 걸 모를 줄 아는군.


 “2주나 버틸 리가. 1주에 2닢 건다.”


 뭐, 무시당할수록 좋은 상황이다. 기쁘게 받아들이자.


 “헤헤, 고맙구먼유. 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슈.”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군. 이건 단순한 ‘소요’ 이상의 상황인데.”


 ‘브로지카’는 마치 도시 전체를 회색으로 덧칠한 듯, 어둡기 그지없다.


 한낮의 태양마저 그 온기를 빼앗기는 느낌이다. 레흐의 직할령인 ‘피셰’와는 전혀 다르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에게선 어떠한 활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향한 무한한 적의와 경계심만이 피부를 찌른다.


 병사들도 다를 것이 없어, 저들은 ‘수호자’라기 보단 ‘감시자’에 가깝다.


 그들의 쉬지 않는 시선에 백성의 안전 따윈 안중에 없다. 반역자와 순응하는 자만이 존재할 뿐.





 처형되어 광장에 내걸린 몇 구의 시신들이 암담한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다.


 광장을 지나는 자들이 시신을 볼 때마다 멈춰서 저마다의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공포에 몸을 떨고, 어떤 이는 분노에 주먹을 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을 위해서 울지 않는다.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도시 전체에 공포의 냄새가 진동한다. ‘흑의백’ 나탈리아. 나와 통하는 구석이 있는 여인이다.





 “어이, 덕배! 여기 와서 이것 좀 옮겨줘!”


 “야, 지금 가유.”


 2주간 위장 근무를 할 곳으로 광장 근처의 상사를 골랐다.


 “등짐 그대로 지고, 나무통을 백작 각하께 전달해줘. 자세한 건 성의 나리들께서 하실 테니까, 너는 그분들 시키시는 대로 하면 돼. 간단하지?”


 담당 업무는 짐꾼. 이곳저곳을 다니며 귀동냥하기 좋은 자리다.


 이번처럼 성안까지 들어갈 땐, 성의 보안 취약점도 조사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야, 알았슈. 금방 갔다 올게유. ..영차!”


 무게나 흔들리는 감각, 소리로 봤을 땐 무언가 가루 같은 물건이다. 화약인가?


 아니, ‘바보’에게 폭발물을 맡기는 머저리는 없겠지. 화약은 아니면서, 성과 거래할 만한 물건이라.


 몰래 내용물을 확인해봐야겠군. 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내용물을 확인할 방법은 차고 넘친다.





 “네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병사의 인도를 따라 들어간 알현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줄지어 서 있었다.


 “50 가마니가 비는군. 왜지?”


 검은 옷을 두른 여인이 옥좌에 앉아 가장 앞에 선 사내에게 묻는다.


 ‘흑의백’이라는 별명에, 옥좌에 앉은 자다. 저 여인이 ‘브로지카’의 백작, 나탈리아다.


 자세히 보니, 옷 위로 배가 조금 부른 것이 보인다.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건가.





 “..이게 한계입니다. 각하. 더 이상 세금을 냈다간, 농장 식구들이 겨우내 굶게 됩니다!”


 “흠, 그런가. 비극이군.”


 나탈리아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 다가간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일어날 일이 말이야.”





 “끄아아아악! 내 얼굴! 내 얼굴이!”


 말이 끝나자마자, 나탈리아가 차고 있던 채찍을 꺼내 얼굴을 후려쳤다.


 사내의 얼굴에 길쭉한 흉터가 새겨지고,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감히! 내 몫을! 가로채려 해!?”


 그러나, 나탈리아는 멈추지 않는다.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사내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한다.


 그녀의 옷과 얼굴에 튀는 피도 그녀를 막지 못한다.


 “제기랄! 피가 튀었잖아!”


 채찍질은 점점 더 분노와 광기에 집어삼켜져 간다.


 “고귀한 이 몸이, 네깟 쓰레기들 따위를 벌하느라, 검은 옷만 입고 다녀야겠나?! 쓰레기라면, 적어도 피는 튀기지 말란 말이다!”


 “끄아아아악!”





 “..끄으. ..끄윽!”


 사내의 비명이 흐릿한 흐느낌이 될 때까지. 채찍질은 이어졌다. 알현실에는 짙은 공포가 깔려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근위대.”


 나탈리아가 채찍질을 멈추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린다. 조금 전의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다.


 “예. 주군.”


 “이 쓰레기의 목을 쳐서 광장에 걸어둬라. 죄명은, 반역 및 절도죄가 좋겠군.”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근위병에게선 아무런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사내를 업어, 지하 감옥으로 옮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부류의 인간이다.


 자신은 하나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서, ‘얻을 욕망’만 있는 자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은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지금 당장 칼을 뽑아, 저 빌어먹을 여인의 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저 여인이 허망하게 죽어버렸다간, 브로지카의 백성들의 분노가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분노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레흐에게 향하게 되겠지.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내 아이야. 어미의 배 속에서 잘 보고 배우렴. 이게 백성을 다루는 방법이란다.”


 나탈리아가 사랑이 가득 담긴 손길로 배를 쓰다듬는다. 가장 헌신적인 어머니와도 비교할 수 있을 법한 손길이다.


 저런 악인도 자기 자식은 소중하단 건가.


 “언제나 무자비하고, 주먹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으렴. 백성이란 것들은, 자비를 베풀면 기어오르는 법이란다.”


 망언을 끝없이 내뱉는 입과는 다르게,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얼른 만나고 싶구나. 너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겠구나. 너는 분명 나를 닮아 아름다울 것이 확실하니 말이다.”


 피로 물든 검은 옷과 아이로 부른 배, 평온한 미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리감을 자아낸다.


 나도 광기에 차 있긴 하지만, 저 여인도 만만치 않게 미쳐있군.


 “브로지카의 모든 걸 널 위해 준비해 놓았단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네 것이다. 너른 평원부터, 그 위를 다니는 백성들까지. 어서 나와서 어미를 기쁘게 해주렴.”





 “어디, 오늘 수확을 점검해볼까.”


 은신처로 삼은, ‘브로지카’의 버려진 창고에서 모은 정보를 점검한다.


 어두운 뒷골목에 위치해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면서, 위장 신분인 ‘가난한 떠돌이’와도 어울리는 곳이다.


 이곳에 머무는 것을 들켜도 ‘어떻게든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





 “별다른 수확이 없군. 운이 아주 ‘안 좋았어’.”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정보는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이다.


 세금을 너무 올려서 살기 힘들다거나, 병사들이 들이닥쳐 숨겨둔 재산을 징수해갔다는 소식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얻은 정보라고는 내가 운송한 물건이 아편 분말이었다는 정도다.


 이걸 공개해 봤자, 피해를 보는 건 위장 취업한 상가뿐이겠지. 나탈리아는 분명 오리발을 내밀 것이다.





 ‘흑의백’ 나탈리아를 제국 법정에 세우기 위해선 반역, 내지는 탈세 혐의가 필요하다.


 둘 다 입증이 매우 어렵고, 나탈리아가 죄를 저질렀다는 보장도 없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증거를 찾아 나탈리아의 성에 침입해, 서재나 금고를 뒤지기엔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크다.


 의심 가는 곳에 침입해 수색하는 것만 해도 1주일은 걸린다.


 지금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적어도 1달 안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반란의 결말은 끔찍하겠지. 병사들의 총칼에 수백, 수천의 사람이 목숨을 잃어,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반란과 소요의 억제’지, 나탈리아에게 정의를 집행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흑의백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단은 찾을 수 없다. ‘불운’하게도 말이다.


 그렇다면, 소요와 반란의 원인을 제거하면 그만이다. 레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겠지만.


 “남은 수단은 하나뿐인가.”


 압제자의 목에 칼날을 쑤셔 박을 생각을 하니, 목뒤로 전율이 흐른다.


 강철허리를 사냥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군.


 그때처럼, 최대한 극적인 죽음을 선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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