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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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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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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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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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87 ('흑의백' 나탈리아 - 2)

DUMMY

 “‘까마귀’에게선 소식이 없습니까? 재상.”


 “별다른 보고는 없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꾸러미와 나무통 하나를 배송해달라는 것 말고는요.”


 재상의 사무실에 방문한 레흐가 보고를 듣는다. 그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다.


 연로한 재상을 배려해, 직접 걸음을 옮긴 레흐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꾸러미와 나무통이요?”


 레흐가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는지 턱을 쓰다듬는다.


 그는 정우의 광기의 편린을 보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희생의 범위는 다르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하려는 모습이.


 그렇기에 불안하다.


 모든 자제심이 사라졌을 때, 얼마나 냉혹해질 수 있는지는 레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청컨데, 이 늙은이에게 주군의 고민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주군.”


 “별일 아닙니다. 그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재상의 요청에도 레흐는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지 않는다. 이미 할 일이 많은 재상이다. 이상 부하를 늘릴 순 없다.


 “여전히 거짓말이 능숙지 못하십니다. 주군. 미력하나마 40년간 주군의 가문을 모셨습니다.”


 재상이 레흐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성장기엔 무던히도 애를 먹이던 아이가 이리도 훌륭한 공작이 되었다.


 “늙어가며 는 것은 눈치뿐이더군요. 늙은이 마음 풀어준다 생각하심이 어떻습니까.”


 늙은 몸이 움직이는 한, 이 청년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까마귀’, 그자가 큰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레흐가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연다.


 “큰일이라 하옵시면?”


 “‘흑의백’ 나탈리아를 죽이려 든다거나, 반란을 부추겨 권좌에서 쫓아내려 한다던가요.”


 재상 자신도 이전 자문회의에서 레흐와 정우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느꼈다.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을.


 “저 역시 나탈리아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강제로 그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레흐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강하게 쥔다.





 그간 수많은 ‘브로지카’ 백작령의 백성들이 ‘피셰’로 폭정을 피해 몰려들었다.


 운이 좋은 몇몇 가정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들이 묶여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돌려보내느니 차라리 죽이라는 백성들의 외침 하나마다, 레흐의 마음엔 흉터가 새겨졌다.


 어째서 저들이 고통받아야만 하는가. 서약과 법률에 묶인 자신은 어떻게 움직여야만 하는가.





 차라리 공작의 자리를 내팽개치고 나탈리아를 처단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 그랬다간 올레스니카의 백성들이 홀로 남게 된다.


 이웃 영주들과 제국은 지금도 호시탐탐 올레스니카를 노리고 있다.


 굶주린 이리떼와 같은 자들에게서 백성들을 지켜야만 한다.


 자신의 서약을 위해서라도, 먼저 간 부모님과 집사님을 위해서라도.





 “나탈리아를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정의가 바로 섰음을 백성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거기에, 브로지카의 백성들은 오랜 폭정으로 희망을 잃었다.


 그들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앞으로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유혈과 폭력은 기존의 압제자가 다른 압제자로 바뀐 것으로 보일 뿐이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탈리아는 탐욕스러우나, 멍청한 자는 아니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는 한도 안에서만 폭정을 저지른다.


 계약상 레흐에게 바쳐야만 하는 군역이나 세금은 단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납부했다.


 레흐의 명령 역시 월권행위가 아닌 이상 철저히 복종했다.


 자신이 법정에 설 어떤 빌미도 남기지 않았다.


 설령 자기 백성들에게 아편을 팔고, 엄청난 수준의 세금을 뜯어가더라도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백성들에겐 희망이 필요해요.”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셔선 안 됩니다. 주군. 이미 백성들을 위해 많은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어째서 자신을 그리도 괴롭히십니까.”


 “지키기 위해서 한 서약입니다. 끝까지 지켜야지요.”


 희미하게 미소 짓는 레흐를 재상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까마귀’가 좋은 소식을 들고 오길 기다려야겠군요. 주군.”


 “유능한 자입니다. 이번엔 나탈리아를 법정에 세울 수 있겠죠.”


 재상이 쓰고 있던 안경을 올린다. 레흐의 말은 재상을 향하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자를 어째서 브로지카에 보냈는가’에 대한, 레흐 나름의 자답이었을 뿐. 


 어쩌면 변명에 가까운 자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브로지카’에 잠입한 지 1주일째. 드디어 때가 왔다.


 오늘은 달빛이 없는 날이다. 마침 올레스니카가 자랑하는 별무리도 짙게 낀 구름에 빛을 잃었다.


 밤눈이 어두운 자라면 10걸음 앞의 사람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둠 속에 숨어들기 가장 좋은, 나와 같은 ‘포식자’, ‘사냥꾼’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이다.


 내 눈은 이런 밤에도 150보 너머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다. 





 잠입과 탈출, 살해와 연출까지 모두 계획이 마련되었다. 성에 배달을 다니며 마련해놓은 ‘장치’도 충분하다.


 모든 ‘사냥’의 준비가 끝났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다.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만큼, 이번 일은 철저히 나탈리아 하나만을 노려야 한다.


 오늘 밤, 브로지카의 모든 이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





 등짐을 지고 성문 앞에 다다랐다. 어둠이 짙게 깔린 성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몇몇 방과 복도를 제외하고는 조명이 켜진 곳이 드물다. 움직이는 불빛만이 순찰자가 있음을 보여준다.





 “덕배 아냐.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성문 앞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 두 명이 날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온다.


 횃불이 근처에 있는 데도, 40보 거리까지 다가설 때까지 날 눈치채지 못했다.


 “헤헤, 사장님이 백작님께 선물을 보내셨슈. 나리들도 늦게까지 고생이 많으시구만유.”


 “이 시간에 선물이라고? 흐음.”


 병사들이 의문을 표한다. 예상대로다.





 “에이, 나리들께서도 아시지 않슈. 이런 밤중에 우리 사장님이 보낼 ‘선물’이 뭔지는.”


 무언가 엉큼한 짓을 생각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선물’을 가리킨다.


 ‘선물’은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나무통이다. 은밀히 사람을 성으로 들일 때 자주 사용하는 수단이다.


 “..아아. ‘그거’군. 주군의 침대를 덥혀줄.”


 경비병들 역시 날 따라 씩 웃는다. 역시, 착각하게 만드는 게 속여넘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거기에, ‘폭군’의 잠자리 상대를 건드릴 만큼 간 큰 병사는 이곳에 없다.





 “제기랄. 난 지금 몇 달째 남자 손도 못 잡아봤는데, 주군께선 남자 궁할 일이라곤 없어.”


 “쉬는 시간에 카드 돌리면서 내 손 잡았잖아. 난 남자 아니냐?”


 경비의 푸념에 뒤편에 있던 동료가 핀잔을 던진다.


 “네가 남자냐? 친구지. 서로 다 벗은 것도 봤는데.”


 “하긴, 전에 너 옷 갈아입을 때 토할 뻔했지. 씻고 다녀라. 좀. 가까이만 가면 쉰내가 진동해.”


 “뭐래. 미친놈이.”


 갑자기 병사 둘이 농담 따먹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폭군 밑에 있다고 해도, 이들 역시 평범한 사람이다.


 역시, 이번 일은 최대한 표적에만 집중해야겠다. 다른 병사들 가운데도 이런 자들이 있을 테니.





 “저어, 나리들. 들어가도 될까유? 사장님이 늦으면 경을 쳐서...”


 “그래. 들어가. 야, 냄새쟁이야. 덕배 이 녀석 안내 좀 해줘.”


 “알았다, 왕궁댕이야. 덕배, 따라와.”


 둘 다 서로에게 중지를 날리며 웃고 있다. 제기랄, 가다듬은 긴장이 풀어질 정도로 유쾌한 장면이군.





 “..저기, 나리. 여기 창고에서 뭐 하나만 챙겨 가두 될까유?”


 앞서가던 병사를 창고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세운다.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쥬, 저번에 배달왔을 때 말유. 실수로 창고 선반에 흘리고 갔슈.”


 “꼭 지금 챙겨야겠어? 일단 ‘배송’부터 끝내지 그래? 통 안에 있는 사람도 힘들 텐데.”


 “너무 소중한 물건이라 그래유. ..고것이, 지가 부적처럼 차고 다니는 물건이유. 나리도 봤쥬?”


 “늘 팔에 묶고 다니던 천 말인가? 한 2일 동안 안 하고 다닌다 했는데.”


 걸려들었다. 브로지카에 머무르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같은 천을 팔뚝에 두르고 다닌 보람이 있다.


 “야, 그렇슈. 일할 때 방해가 돼서 잠깐 풀어둔 건디, 깜빡하고 놓고 와버렸슈. 금방 챙기는 건디, 챙기고 가면 안되겠슈?”


 “..하아. 그래, 그럼. 문 열어줄게.”


 병사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곤 창고 문을 열어준다. 계획대로 됐다.


 천을 풀어둔 건 당연히 실수가 아니다. 그저 ‘구실’이 필요했을 뿐.


 이제, ‘덕배’가 들어가고 ‘까마귀’가 나올 시간이 되었다.





 “여기, 찾았슈! 여기 있었슈!”


 등짐을 내려놓고 천 조각을 팔랑거려 병사의 주의를 끈다.


 “나 원, 다신 잃어버리지 말라고. 이번은 특별히 예외를 둔 거니까.”


 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아직 거리가 부족하다.


 “헤헤, 고맙슈. 덕분에 살았슈. 나리, 이리 오셔서 이것좀 보셔유. 추억을 나누고 싶어유.”


 최대한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의 경계심을 하나씩 해체한다.


 “그렇게 좋아? 너도 참, 속이 편한 녀석이야. 다들 여기 오면 벌벌 떨기 바쁜데.”


 앞으로 4걸음.


 “지는 나리를 보는 게 좋구먼유.”


 “세상 사람들이 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1걸음. 최고의 순간이 다가온다.





 “..어? 나리, 저기 문밖에 뭔가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이제 팔 하나만큼 정도만 떨어져 있다. 지금이다.


 “응? 뭐가 지나갔..”





 “잠시 자고 있으시오. 내일이면 브로지카에 새 시대가 찾아올 거요.”


 천 사이에 숨겨둔 바늘을 그녀의 목에 찌른다. 바늘이 부드럽게 파고들어 독을 주입한다.


 이전 화재 현장에서 썼던 독과 같은 종류다. 이번엔 용량을 늘렸으니 적어도 새벽녘은 돼야 일어날 것이다.


 추가로 숨겨놓은 살인용 바늘은 쓸모가 없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물러져 버렸다고 해야 할지.


 “..너, 누구..”


 갑작스런 배신에 충격받은 탓인지, 쓰러지는 와중에도 내게 정체를 묻는다.


 날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군.


 “둥지를 잘못 찾은 까마귀라 해두지.”





 “기다려라, 나탈리아. 까마귀가 네 심장을 쪼아내러 간다.”


 통에서 회수한 장비를 갖춰 입고 문을 나선다. 오늘 밤, ‘흑의백’ 나탈리아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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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3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3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1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0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1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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