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88 ('흑의백' 나탈리아 - 3)

“아줌마는 누구세요?”
누더기를 걸친 소녀가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여인에게 묻는다.
여인의 멀쑥한 정장은 우중충한 뒷골목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비쩍 마른 소녀의 시선엔 경계심이 가득 담겨있다.
소녀의 얼굴엔 상처와 멍이 가득하다. 다른 거지 아이들이 그녀를 구타하고 음식과 돈을 빼앗은 흔적이다.
“너희 어머니는 어디 있나.”
“죽었어요. 2년 전에. 폐병으로요.”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에겐 집이 있었다.
찬바람이 들이치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집이었더라도 말이다.
‘너만 없었어도.’, ‘넌 태어나선 안 됐어.’같은 말로 저주하고 학대하던 어머니였지만, 최소한의 의식주는 챙겨주었다.
“그런가. 너는 고생을 좀 한 것 같구나.”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소녀를 친절히 대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그녀가 자비를 구걸할 때는 대개 발길질이 날아왔고, 그나마 덜 잔혹한 이들은 먹다 남긴 뼈다귀 같은 것을 던져주었다.
간혹 운 좋게 멀쩡한 음식이나 동편이 손에 들어오더라도, 힘센 아이들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너를 데리러 성에서 나왔다.”
“성에서요? 저를요?”
소녀가 경계심에 몸을 움츠린다. 어째서 자신 같은 거지를 성에서 부른단 말인가.
“그년도 참 멍청해. 주군께서 자길 다시 부를 거라 멋대로 기대하곤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다니. 덕분에 찾는 수고가 줄었다만.”
여인이 비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소녀의 두려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투다.
소녀는 여인이 하는 혼잣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여인의 정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정장에 달린 단추 하나만 있어도, 이틀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아무튼,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 넌 누구지?”
잠시 소녀의 얼굴을 훑어보던 여인이 품속에서 초상화를 꺼내며 묻는다.
여인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소녀였지만, 이내 마음을 정하곤 입을 연다.
이름쯤이야, 알려준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이 여인이 휘두를 수 있는 폭력이 무서웠다.
“소피아의 딸, 나탈리아예요.”
정우가 어둠이 깔린 성을 조용히 달린다. 그의 속도는 미끄러지는 뱀만큼이나 빠르다.
지고 온 나무통에 숨겨둔 장비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검은 가죽 갑옷은 어둠과 합쳐져 몸을 완전히 가려주고, 개조한 전투화는 어떤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그림자가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적어도 유나 수준의 감과 눈을 가진 자만이 이상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엔 그런 수준의 병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병사들은 위치를 지키는 것에만 전념해 시선이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다.
이미 철통과도 같은 권력을 장악한 나탈리아에겐 정예병 따위, 무의미한 낭비였다.
백성들의 소요나 반란 정도는 갓 무기를 들어본 병사들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
혹 이웃 영주가 침공해 온다고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바보 같을 정도로 고결한 주군, 레흐가 병사를 이끌고 도와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물론 병사들의 희생은 따르겠으나, 나탈리아에겐 병사들의 생명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쩌면, 권력에 흠이 가지 않는 선에선 병사들의 피 역시 많이 흐를수록 좋을지도 모른다.
백성들의 피와 병사들의 피 둘 다, 증오스러운 브로지카 백작령의 피라는 점은 같다.
“보안이 개판이군. 이렇게나 쉽게 뚫리다니.”
내부 성벽에 도달한 정우가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성벽 위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자에 온 신경을 쏟은 탓에 내성의 방비가 약해졌다.
불을 밝힌 화로는 굉장히 띄엄띄엄 배치되어, 수많은 빈틈을 만들어낸다.
그마저도 지키는 병사는 하나 뿐에, 몇몇은 불의 온기에 꾸벅꾸벅 졸고 있다.
“구조나 설계 자체는 나쁘지 않다만.”
순식간에 성벽 위에 다다른 정우가 손과 발에 묶어뒀던 등반용 송곳을 풀어낸다.
‘덕배’로서 배달하러 다니며 기회를 봐 미리 숨겨뒀던 물건이다.
“저곳인가. 나탈리아가 머무는 곳이.”
성의 심장부인 아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짙게 깔린 어둠도 5층 높이로 솟은 아성의 위용을 감추진 못했다.
사전에 조사해둔 대로 ‘입구’는 단 하나뿐이다. 분명 그 입구에는 병사와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제길. 나도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나답지 않아.”
정우가 주먹을 움켜쥐며 혀를 찬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다.
병사들이나 시종들이 아무리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들, 평소의 정우였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사람을 말려들게 하는 걸 싫어할 뿐, 장애물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표적인 나탈리아를 제외하곤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여러모로 짜증 나는 사람이야. 레흐 그자.”
화재 현장에서 레흐가 자신에게 무릎 꿇는 것을 본 이후, 그가 오랫동안 잊어왔던 감정과 감각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인간성’, ‘연민’ 같은 감정들이.
레흐는 정우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과거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로. 먼저 떠난 이들이 진정 원하는 길을 걷기로.
그 모습은 어딘가, 정우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질투심 사이로, 질투의 양면인 ‘동경’이 드러났다.
이왕 그를 도와야 한다면, 당분간은 그의 방식에 맞춰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살육 욕구가 차오르는 자들만큼은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정우가 등에 멘 간이 석궁을 꺼내, 밧줄을 건 화살을 장전한다.
비록 1발밖에 쏠 수 없는 조악한 석궁이지만, 1발이면 충분하다.
어두운 숲속에서 호랑이를 추격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팡!
조준을 마친 정우가 방아쇠를 당긴다. 팽팽히 당겨진 활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화살은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 3층의 난간에 깊숙이 박힌다.
성가퀴에 단단히 묶은 밧줄을 타는 정우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어둠 속을 나는 제비처럼, 순식간에 3층 난간에 도착한 그를 침묵에 잠긴 아성이 맞이한다.
“여긴가. 첨탑의 입구가.”
소리죽여 아성을 누비던 정우가 거대한 나무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나탈리아의 침실이 있는 첨탑의 문이다.
첨탑은 아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한눈에 브로지카의 모든 것을 돌아볼 수 있다.
정우가 힘을 줘 묵직한 문을 민다.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서늘한 공기가 첨탑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이건 예상외로군. 빌어먹을.”
문 너머의 광경은, 온갖 경험을 쌓은 정우의 정신마저도 잠시 흐트러트렸다.
“이곳이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이다. 따라와라.”
중년 여인의 뒤를 나탈리아가 따른다.
여전히 움츠린 채긴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행색이다.
꾀죄죄했던, 거의 걸레와 같았던 누더기는 아름다운 비단옷이 되었다.
얼굴에 한가득 묻어있던 때와 검댕은 자취를 감췄고, 씻지 못해 엉겨 붙어있던 머리는 멀끔히 빗겨졌다.
성을 돌기 전에 음식을 배불리 먹여둔 덕인지 창백하던 얼굴엔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덕분에 지금 나탈리아의 모습은 귀족 가문의 아이처럼 보일 정도다.
“이 탑은 전전대 백작께서 감시 용도로 증축하신 첨탑이다. 백작령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야.”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소녀의 머릿속에 그동안 핍박받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자비를 애타게 구하던 자신을 냉정히 비웃던 사람들의 그 찢어버리고 싶은 입꼬리.
서로 힘든 사람들임에도, 가장 약하던 자신을 사정없이 물어뜯던 무자비한 아귀들.
아무것도 모르는 딸에게 폭언과 학대를 일삼던, 어머니 자격도 없는 쓰레기가.
절박함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자리를, 증오심과 분노가 채워간다.
사람의 따스함을 느꼈던 기억들마저 격류에 바위가 깎여나가듯 마모된다.
“경제력이 취약한 이곳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효율적으로 병사를 써야만 한다는 판단이셨다.”
증오로 가득 찬 나탈리아에겐 여인의 설명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다들 자기 먹고 살기도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이 땅에 뭔가 좋은 벌이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니.”
탑의 정상에 올라 브로지카의 전경을 바라보는 건 나탈리아의 복수심에 불을 지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저 아래에서 시궁쥐처럼 땅을 기던 자신이 지금은 이곳에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마주하는 장엄한 광경은 나탈리아의 어린 마음에 헛된 우월감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주군의 시종장이라는 설명은 이미 했었지.”
“...”
“듣고 있다고 생각하겠다. 그래서, 내가 널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시종장이 잠시 말을 끊고 나탈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금부터 자신이 말할 것을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널 주군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다.”
“뭐라고요?! 저를요?!”
거지 소녀가 성에 들어온 것 이상의 놀라운 일은 없다곤 생각했는데, 나탈리아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3달 전, 주군의 하나뿐인 아드님께서 돌아가신 걸 너도 알고 있을 거다.”
그 장례식은 여러 의미로 나탈리아의 기억에 남아있다. 장례식조차 없이 묻힌 어머니와는 다른, 애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간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인척 가문에서 양자나 양녀를 들이는 것부터, 그나마 가까운 계승권자를 찾는 것까지.”
여인이 브로지카를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그러던 중에 너와 네 어미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지. 사생아라고는 하나, 그래도 직계 혈족에게 승계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녀의 눈엔 피로가 가득 쌓여있다. 오랜 시간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뭐, 적어도 읽고 쓰기 정도는 배워야 문서에 인장이라도 찍겠다만. 내일부터 당장 ‘교육’이 시작될 거다. 준비해둬라.”
이날, 나탈리아는 결심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브로지카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야 말겠다고.
브로지카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했던 고통을 수천 배로 되갚아주기로.
그리하여, 브로지카의 모든 이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어린 소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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