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89 ('흑의백' 나탈리아 - 4)

4층 높이의 나탈리아의 첨탑은 악의의 산물로 가득 차 있었다.
1층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과 장식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은 처절할 정도로 세밀히 묘사되어, 탑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2층엔 인간의 두개골이나 정강이뼈, 치아 같은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의 ‘작품’들을 통해, 이 탑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일부’가 이곳에 ‘전시’될 수도 있음을.
두개골의 텅 빈 눈두덩이에선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와, 방문자들에게 당장 돌아갈 것을 간청했다.
“이래서 ‘공포의 탑’이라고 불린 건가.”
브로지카의 백성들은 첨탑을 ‘비에자 그로제’, 즉 공포의 탑이라 불렀다.
탑에 끌려가고서 살아 돌아온 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설령 살아 돌아온 사람이더라도, 공포와 고뇌로 미쳐 죽음보다도 끔찍한 삶을 살아나가야만 했다.
원래 이름이던 ‘비에자 야스네고 오카’, ‘밝은 눈의 탑’의 흔적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감시를 위해 사방에 뚫린 창문은 희생자의 비명을 퍼트리는 출구가 돼버렸다.
“시시하군.”
그러나, 탑을 오르는 정우에게는 아무런 공포를 심어주지 못했다.
이미 몇번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문과 살인, 죄악을 범한 그다. 투쟁심이 들어있지 않은 공포 따위, 가소로울 뿐이다.
정우는 크게 ‘증오’와 ‘분노’, ‘악의’로 이뤄진 인간이다.
아무리 그동안의 인연으로 ‘인간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고 한들, 그의 본성과 경험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악귀는 물러졌다 해도 악귀인 법이다.
“..역시, 이건가.”
3층의 문을 연 정우가 익숙하면서도 참혹한 광경에 혼잣말을 내뱉는다.
20평 정도의 공간엔 온갖 고문 도구와 기구가 널려있었다. 도구들엔 하나같이 피가 말라붙어 있다.
“..끄으윽. ..너무..아파...”
“..차라리..죽여..줘...”
“..앞이..앞이 보이질 않아..!”
그리고, 네명의 사람들이 그 고문실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둘은 몸을 강제로 늘리는 틀에 묶여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다른 둘은 가시가 잔뜩 박힌 침상에 눕혀져 피를 흘리고 있다.
그들 모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정우가 방에 들어온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시시각각 생명이 빠져나가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은 그들이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건넜음을 알려준다.
“구역질이 나는군.”
그 광경이, 처음 나탈리아의 알현실에 들어왔을 때 타올랐던 분노에 다시 불을 지폈다.
무고한 자들을 고문하고 도륙해서? 아니다. 본디 귀족들이란 것들은 저런 것들이다.
아무렇지 않게 백성들을 수탈하고 살해하는 자들이 바로 귀족이다.
마을이 도적의 손에 불타버릴 때도, 이권 다툼에 미쳐 지켜야만 하는 백성들을 저버린 자들이다.
짐승들끼리 서로 잡아먹는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정우가 분노한 지점은 단 하나, ‘공정함’을 중시하는 그의 ‘신념’과 반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원한다면, 자기 생명 역시 걸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원한다면, 역시나 상응하는 무언가를 걸어야만 한다.
자연이 그렇듯, 세상 만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쟁취해야 할 대상이다.
나탈리아에겐 ‘각오’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가.
분명 희생자들을 구속해 고문대에 묶기까지, 그녀 자신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나탈리아가 결투나 전투, 모략을 이용해 희생자들을 붙잡았다면, 정우 역시 정당한 결과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쪽은...”
들불처럼 퍼지는 분노에 주먹을 움켜쥔 정우를, 고문대에 묶여있던 사내가 발견했다.
“나탈리아의 심장을 취하러 왔소. 오늘 밤, 나탈리아는 ‘까마귀’의 먹이가 될 거요.”
정우가 사내의 귓가에 속삭인다.
“..! 지금 당장이라도..돌아..가시오. 살아남지..못할..거요.”
놀란 사내가 눈을 크게 뜨려 하지만, 이내 힘을 잃고 고개를 떨군다.
“지금 와서 돌아갈 거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그런가. 무운을..비오.”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다.
눈 앞의, 검은 옷의 괴한이 나탈리아를 처단하고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밤의 침입으로 인해 폭정이 더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부탁이.. 하나 있소.”
“말씀하시오.”
정우의 어투엔 어떤 온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이들을 보는 시선은 망가진 논밭의 작물을 보는 농부와도 같다.
자신의 논밭을 망친 범인에게 분노하더라도, 꺾인 작물 하나하나에 슬픔을 느끼는 농부는 없다.
“내 숨을..끊어..주시오. 더 이상..버틸 수가..없소. 자비를..베풀어..고통을..끝내 주시오.”
간신히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그의 입에선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린 데다, 상처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감염되었다.
혹 이곳을 벗어나 실력 좋은 의사에게 치료받더라도, 길어야 1주일 일 것이다.
“그러지. 빠르게 끝내 주겠소.”
“..고맙소.”
정우 역시 구태여 만류하지 않고 단검을 뽑아 든다.
무의미한 희망을 주기 위해, 불필요한 의사소통을 거칠 필요는 없다.
단검이 사내의 목에 박히고, 깔끔하게 목뼈와 신경을 절단해낸다.
“편히 쉬시오. 삼도천까지의 그대 여정이 순탄하길.”
정우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들고 다른 희생자들을 향한다.
남은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무의미한 고통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으니.
“처음엔 시체만 난도질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바꿔야겠군.”
모든 ‘작업’을 마친 정우 뒤로, 시신 네 구가 늘어서 있다. 그들의 손마다, 그나마 무기처럼 보이는 고문 도구들이 들려있다.
죽음과 고통을 각오하고 높은 세금에 대한 탄원을 올리러 온 자들에 대한, 정우 나름의 ‘경의’다.
나탈리아의 방은 호화롭기 그지없다. 금을 두른 가구로 가득한 방은 피폐에 찌든 브로지카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일 정도다.
손바닥만 한 환기창 사이로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반사광만이 그곳에 스민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방의 구석에서 정우가 잠든 나탈리아를 조용히 관찰한다.
정우의 눈엔 끓어오르는 증오가 담겨있다.
당장이라도 품속의 단검을 뽑아 나탈리아의 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시시각각 찾아온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다. 나탈리아에겐 더 큰 고통을, 살아있음을 후회할만한 수준의 고통을 선사해야만 한다.
“일어나라. ‘까마귀’가 널 찾아왔다.”
“..으음. 내 잠을 방해하다니, 배짱도 좋구나. 채찍이 두렵지 않으냐?”
인기척에 잠에서 깬 나탈리아가 어둠 속 그림자를 향해 위협을 가한다.
감시망을 뚫고 괴한이 침입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지, 전혀 경계하는 조짐이 없다.
“···.”
그림자 속의 정우는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기척을 흘릴 뿐이다.
“누구냐?!”
이상을 감지한 나탈리아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난다.
금실로 자수가 새겨진 잠옷이 나풀거릴 때마다, 정우의 심장이 분노로 고동친다.
“네게 합당한 운명을 선사하겠다. ‘흑의백’ 나탈리아.”
“침입자다! 쓰레기가 내 방에 침입했단 말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탈리아가 침대 옆에 달린 밧줄을 사정없이 당겨댄다.
“꼴이 우습군. 명색이 백작이란 자가 이리도 허둥대다니.”
“하, 잘난 척하는 것도 얼마 못 갈 거다. 내 시종과 병사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정우의 음산한 목소리를 나탈리아가 한껏 비웃는다.
“편히 죽을 생각은 마라. 먼저 네놈 배를 갈라 내장 구경부터 시켜주마. 그리곤..”
“더럽게 말이 많아. 네년은.”
어둠 속의 정의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
말을 끊긴 나탈리아가 악에 받쳐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터져 나오던 말이 순식간에 들어가 버렸다.
분명 상대는 걸어오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수하들이 2분도 안 돼서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설령 침입자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자신에게 달려들더라도, 2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아무리 배 속의 아이로 몸이 무겁다고 한들, 평소 단련해둔 체력과 무예가 있다.
분명, 모든 조건이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렇다면,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무언가 묵직한 것에 짓눌리는 듯,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다.
당장이라도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질주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얼어붙은 몸이 움직이길 거부한다. 본능이 지금 당장 엎드려 빌라고 외치고 있다.
“달콤한 공포의 향기. 네년도 ‘피 냄새’ 정도는 맡을 수 있나 보군.”
수십, 수백의 살인과 사냥은 정우에게 존재감과 위협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다.
전력으로 상대를 위협할 의도를 갖춘다면, 심약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힐 정도로.
“다. 닥쳐라! 뚫린 입이라고 마음껏 놀리는구나!”
나탈리아가 의지를 다 해 다시 한번 밧줄을 사정없이 당겨 부하들을 부른다.
“밧줄을 당기는 감각이 평소와 다르지 않나?”
이번엔 정우가 나탈리아를 비웃는다. 음산한 웃음소리가 나탈리아의 몸을 더더욱 얼어붙게 만든다.
“네 부하들이 이곳까지 올 일은 없을 거다.”
충격에 나탈리아의 눈이 조금씩 커진다. 반면, 시야는 공포에 점점 어두워져 간다.
“적당히 아무 곳에나 묶어둔 걸 정말이지 혼신을 다해 당겼어. 꽤 즐거운 볼거리였다.”
경악에 찬 나탈리아가 삐걱대는 고개를 들어 밧줄의 끝단을 바라본다.
밧줄의 끝단은 원래 달려있어야만 하는 구멍이 아니라, 벽의 못에 고정되어 있었다.
“흐..흐으으...”
나탈리아의 얼굴이 절망과 공포로 물들어간다. 굳어있던 몸이 부들거리며 비명 섞인 신음을 흘린다.
죽는다. 확실하게 죽는다. 살아나갈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네년은 날 진심으로 화나게 했거든.”
반사광이 정우의 얼굴을 비춘다. 정우의 얼굴은, 지옥의 악귀들조차 절규할 정도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찢어질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와 심장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무표정한 눈이 합쳐져,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지옥에 떨어질 영혼마저 남지 않을 때까지 고문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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