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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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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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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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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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0 ('흑의백' 나탈리아 - 5)

DUMMY

 “히익!”


 정우가 던진 단검이 나탈리아의 발치에 박힌다. 살의가 담기지 않았음에도, 나탈리아는 벽에 기대 울부짖기 바쁘다.


 이미 공포가 모든 의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뽑아라. 마지막 저항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혹시 모르지. 천운이 따라줄지도.”


 “흐으..으으...”


 정우가 흘리는 비웃음에 부들거리면서도, 나탈리아가 간신히 단검을 뽑아낸다.


 “저런, 똑바로 노려야지. 그렇게 흔들리는 칼끝으론 두부조차 가르지 못해.”


 사정없이 흔들리는 손은 칼을 떨어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내 목은 여기 있다! 네년이 그리도 착취하고 괄시하던 ‘천것’의 목 아닌가. 와서 가져가 봐라.”


 정우가 목을 보호하던 보호대를 슬쩍 내려 무방비한 모습을 연출한다.





 “..찌를 거야..찌를 거야..찌를 거야...”


 나탈리아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다.


 지금 당장 드러난 틈을 찔러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공포로 얼어붙은 몸은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대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순간 죽는다. 저자가 든, 서슬 퍼런 단검이 온몸을 난자할 것이다.


 “도대체..도대체 왜 날 죽이러 온 것이냐?! 넌 이곳 사람도 아니잖나! 밖의 천것들이 내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었나?!”


 결국 움직이지 못한 나탈리아가 간신히 말을 짜낸다. 무력으로 꺾을 수 없다면, 살아날 수단은 세 치 혀뿐이다.


 “구제할 여지조차 없군. 네년은.”


 정우가 증오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탈리아를 쏘아본다.


 “이런 상황에 그런 게 중요한가? 어떻게든 상대의 목에 단검을 밀어 넣어야만 하는 상황에.”


 나탈리아가 쥔 단검 끝은 여전히 흔들린다. 이대론 투쟁을 통해 신념을 지킬 수도, 살아있음을 후회할 만한 고통을 줄 수도 없다.





 “하아, 좋아. 대답은 해주지.”


 정우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어간다.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몸의 긴장 역시 누그러트린다. 지금은 최대한 상대의 전의를 끌어 올려야만 한다.


 “네년을 죽일 생각으로 이곳에 찾아오긴 했다. 네년은..내 ‘일’에 방해가 됐거든.”


 나탈리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정우가 이곳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지키지 못한 병사들에 대한 격노와 원망이 드러난다.


 격노와 원망은 투쟁심의 좋은 연료가 되어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생각은 없었어. 적당히 ‘사냥의 전율’을 느끼고 갈 생각이었지. 광장에 나온 네년을 저격해서 말이야.”


 “개자식..!”


 “오히려 고마워 해야 할 텐데. 네년에겐 과분한 죽음이었을 테니.”


 분노와 두려움에 떠는 나탈리아에게 정우가 비웃음을 날린다.





 “천것들을 좀 착취한 게 뭐 어떻다고?! 저놈들은 저래도 싼 놈들이야! 다들 제 욕심을 위해선 어떤 일이건 불사하지! 나도 저놈들 처럼 내 욕심에 충실했을 뿐이야!”


 말을 잠시 멈춘 나탈리아가 배를 쓰다듬는다. 손짓 한번이 이어질 때마다, 사라졌던 결의가 돌아온다.


 브로지카를 모조리 폐허로 만든 뒤에는, 멋진 장원에서 이 아이를 키우기로 하지 않았는가.


 “내 아이를 위해서도 말이다! ”


 그 모습을 본 정우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직접 뱃속의 무고한 아이를 지적하는 것에 거부감을 심하게 느끼던 차에, 사냥감이 스스로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내가 지금 폭정 때문에 네년에게 최악의 고통을 선사하려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왜..? 왜 이런 짓을 하느냐!”


 예상 밖의 대답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나탈리아. 정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귀족들 따위, 결국 폭정이 본성인 자들이다. 백성들을 잡아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들이지. 범이 토끼를 잡아먹는 건 자연의 섭리일 뿐이야. 분노를 느낄 여지 따위 없지.”


 더더욱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나탈리아의 당혹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로 변해간다.





 “그런데, 범은 사냥할 때 반드시 상응하는 위험을 감수해. 토끼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앓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한다고.”


 정우의 어조가 점점 격해져만 간다.


 “네년에겐 그런 ‘각오’가 없어. 자신은 안락한 성채에 숨어서 희생양을 착취할 뿐이지. 자신은 어떤 위험도 지지 않고 말이야.”


 나탈리아를 노려보는 시선은 얼음장같이 차가우면서도, 그 너머로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다.


 “만약 네가 희생자들을 직접 병사들을 이끌어 체포했거나, 날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정예병을 길렀다면 나름대로 납득했을 거다.”


 “무..무슨...”


 “자기 행동이 백성들에게 원한을 살 수 있다는 것, 백성들에게 반격할 힘과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는 증거니까.”


 정우가 내뱉는 광기 어린 말은 나탈리아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나탈리아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착취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는데, 그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해자로서도, 피해자로서도, 제삼자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아무리 나탈리아 역시 복수에 미쳐있다고 한들, 그녀 역시 ‘평범함’의 한계에 갇혀있다.


 뒤틀렸으나마 행복과 소중한 존재의 평안을 꿈꾸는, 그런 ‘평범함’.





 그러나, 정우 자신에겐 흔들림 없는 진리다. 그에게 있어 세상이란 거대한 숲이자 전장이다.


 만인이 신념과 생명을 걸고 투쟁해 서로의 ‘모든 것’을 쟁취하는, 마치 야생과 같은 곳. 


 “죽이고 싶다면 죽여라. 빼앗고 싶다면 빼앗아라. 단,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각오’해라.”


 정우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내뱉는다. 그의 손에 매달린 단검이 흉흉한 빛을 발한다.


 “그러니, 덤벼라. 네 말대로 ‘아이’를 지켜야 하지 않나.”


 정우가 나탈리아를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흘린다. 나탈리아가 먼저 배 속의 아이를 언급한 이상,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은 없다.





 “..크윽..! 닥쳐라! 조금 전부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정우의 도발에 자극받은 나탈리아가 앞으로 크게 한발을 내디딘다.


 배 속의 아이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일어난, 단 한 가지의 좋은 일이다.


 세상 전부를 불태우더라도,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어서라도 이 아이를, 자신의 몸을 지켜야만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미치광이를 죽여야만 한다.


 “떨림이 멈췄군. 드디어 ‘각오’를 굳혔나. 마음에 들어.”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나탈리아의 몸과 시선이 가라앉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는 엉성한 감이 있으나, 날카로워진 정신과 감각은 일류 암살자 못지 않다.


 깊은 밤의 어둠조차 의지에서 느껴지는 투명함은 숨기지 못한다.


 두 사람의 거리는 채 네 걸음도 되지 않는다. 서로의 목에 단검을 충분히 쑤셔 박을 수 있는 거리다.





 “뭘 기다리나?! 내 목숨을 원하지 않나! 쟁취해라!”


 정우의 노성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나탈리아가 정우를 향해 단검을 내지른다.


 노리는 곳은 단 한 곳, 정우의 드러난 목이다.


 단검이 어둠을 가르는 찰나의 시간. 서로의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시간이다.


 “좋은 시도였다.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나, 나탈리아가 내지른 일격은 정우의 목에 닿지 못했다.


 최소한의, 목을 가볍게 뒤로 빼는 동작만으로 칼날의 궤도를 피해버렸다.





 “...”


 나탈리아는 당황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죽일 수 있는 상대라곤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도발 역시 나탈리아에겐 이미 공허하기 그지없다. 어떤 말이 오가더라도, 어떤 행동이 오가더라도 상황은 자명하다.


 자신은 살고, 저 미치광이는 죽어야만 한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신이 명료하다.


 “..하압!”


 몸을 내밀며 빗나간 단검을 그대로 우측으로 긋는다.


 빗나가던 칼날이 다시 한번 정우의 목을 향해 쇄도한다.





 “제대로 전투를 익히지 못한 티가 나는군.”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것처럼 보이던 정우의 몸이, 중심축을 바꿔 순식간에 왼편으로 움직인다.


 “빗나간 공격을 무리해서 잇는 건 네 명줄만 줄인다. 귀족이면서 무예조차 익히지 않았나?”


 정우의 말 대로다. 부랑아 시절이 길었던 탓에, 통치술이나 예법을 익히자마자 권좌에 올라야만 했다.


 거기에, 주군인 레흐는 신하들을 잘 소집하지 않는 군주다. 무예를 쌓을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


 나탈리아가 내지른 일격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기울어진 몸은 등을 내보인다.


 “봐라. 등이 훤히 비어있지 않나.”


 단검을 쥔 정우의 손이 나탈리아의 등을 향한다. 사지에 몰린 나탈리아는 이미 무너진 자세를 바로 세워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커헉!”


 정우가 내지른 일격이 등골 한 가운데를 강타한다.


 강렬한 충격에 나탈리아가 힘을 잃고 앞으로 거꾸러진다.


 그러나, 정작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등은 깔끔하기 그지없다.


 “엄살떨지 마라. 그저 칼머리로 내리친 것뿐이니.”


 정우가 비웃음을 흘리며 나탈리아를 내려다본다. 그의 증오 어린 시선엔 미약한 기쁨과 만족감이 섞여 있다.


 ‘각오’를 갖춘 적과의 투쟁은 영혼을 성장시킨다. 이대로 쉽게 끝내버릴 수는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일어나 자세를 추스른 나탈리아가 아기의 안전을 확인하듯 배를 쓰다듬는다.


 넘어진 충격에 풀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여전한 투지와 결의가 빛난다.


 “와라.”


 나탈리아가 왼팔은 방어를 굳히듯 세우고, 오른손의 단검은 역수로 잡아 당장이라도 찌를 태세를 갖춘다.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는 명확하다. 어설프게 몸 전체를 지키려 거리를 유지해선 서서히 말라죽을 뿐이다.


 그나마 체력의 여유가 있을 때, 최대한 접근해 확실한 일격을 꽂아 넣어야만 한다.


 팔 한쪽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성장이 빠르군. 역시, ‘결의’와 ‘각오’만큼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없어.”


 “그 입, 금방 닥치게 해주지.”


 돌진자세를 완전히 갖춘 나탈리아가 정우를 향해 쇄도한다.


 “아악!”


 내리친 단검은 이번에도 손쉽게 막혔고, 되려 정우의 단검이 나탈리아의 오른 팔뚝을 깊게 파고들었다.


 “크윽..! 계획..대로다!”


 극심한 고통이 엄습하는 순간, 나탈리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뱉은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는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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