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아가씨, 귀족에게 무예는 기본 소양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소집령을 내리실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술 사범을 맡은, 50대 중반의 종사가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는다.
“오늘까지 이 책 내용을 외워야 한단 말이에요. 그냥 평소처럼 적당히 넘기면 안 돼요?”
나탈리아는 훈련장의 구석에서 책을 읽기 바쁘다. 오늘도 시험에 실패했다간 집사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아직 성에서 나탈리아의 입지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아버지’인 백작의 심복의 눈 밖에 나는 일은 피해야 한다.
“..하아. 좋습니다. 집사님껜 제대로 교육을 끝마쳤다고 보고하죠.”
평소에도 어린아이들에겐 약한 종사다. 나탈리아의 목적은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아이들을 대하듯 친절함을 잊지 않는다.
“고맙습니다. 그럼..”
“대신, 간단한 기술 하나만 배우십시오.”
다시 독서에 집중하려던 나탈리아를 종사가 멈춰 세운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녀가 들려있다.
“그건 비녀잖아요? 제국 여자들이 머리 손질에 쓰는.”
“예. 끝을 뾰족하게 갈면 암기로도 사용할 수 있죠. 이걸로 기습을 가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꼭 배워야 해요?”
“얼마 안 걸립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위험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지.”
방어하는 척 치켜세웠던 왼 팔뚝의 뒤편에서 비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렸을 적 종사에게 배운 이후로, 매일 밤 잠들기 전 머리에 꽂아두던 물건이다.
“네놈 눈구멍에 바람구멍을 내주마!”
“..크윽!”
나탈리아가 단검이 박힌 오른팔을 옆으로 휘둘러 정우의 자세를 무너트린다.
불의의 일격에 대응하지 못한 정우의 몸이 앞으로 기울고, 한쪽 발이 지면에서 떨어진다.
일상생활이었다면 지극히 작은, 사소한 빈틈일 뿐이다.
그러나, 전투에선 아득한 실력 차를 넘어설 수 있을 정도의 유리함을 제공한다.
오른손으로 내지른 일격은 연막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모든 움직임이 이번 일격을 위한 포석이었다.
정우와 나탈리아 사이의 실력 차이는, 어린아이와 정예병의 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극한으로 집중했다 한들, 평범한 일격은 전혀 닿지 않는다.
상대가 ‘각오’를 가지라 일갈한 그 순간, 하나의 ‘길’이 보였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첫수는 무리한 공격으로 상대의 조롱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굳이 고통을 가하기 위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광인이다.
목숨을 걸기엔 충분하고도 가능성이었다.
넘어지는 순간, 재빨리 머리의 비녀를 뽑아 왼 팔뚝에 숨겼다. 모든 포석이 이어지고, 남은 것은 준비된 일격을 꽂아 넣는 것뿐이었다.
서로의 생명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 정우의 눈을 뚫고, 눈 너머의 뇌를 파괴할 섬광이 시시각각 쇄도한다.
심장 박동. 시선의 미세한 움직임. 근육의 떨림. 그 모두가 한순간으로 압축된다.
“크으윽!”
그러나 비녀는 노렸던 눈이 아니라, 정우의 뺨을 가르고 어깨에 박혀 버렸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우가 목을 간신히 틀어 궤도가 엇나갔다.
수없이 사선을 넘나든 그의 본능과 경험이 사고를 앞질렀다. 정우 자신도 놀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경의를.. 표한다. 팔을 희생할 ‘각오’를 하다니.. 죽을 뻔했다. 훌륭한 일격이었어.”
정우가 비녀를 뽑아 다시 한번 일격을 가하려는 손을 쳐내고, 네 걸음 뒤로 빠르게 물러난다.
뺨을 흐르는 피가 흘러 입과 목까지 붉게 물들인다. 어깨의 출혈 역시 상당하다.
당장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싸움을 빠르게 끝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엔 충분하다.
“..제기랄!”
나탈리아가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축 늘어트리곤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들고 있던 단검 역시 떨어트렸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다.
“비장의 수가 무위로 돌아갔는데도 눈이 죽지 않았군.”
“네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서로의 목숨을 빼앗을 상대가 앞에 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나탈리아가 흔들리는 몸을 다잡아 전투 자세를 잡는다. 삶과 아이를 지키려는 갈망은 뜨겁게 타오르다 못해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보일 정도다.
“..! 크큭..! 그래. 더 필요한 건 없지.”
나탈리아의 일침에 정우가 숨을 삼킨다. 이미 상대는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킬 존재가 되었다.
“사과하겠다. 널 지금까지 ‘평범한’ 사냥감으로 봤다. 지금부턴 널 ‘강적’으로 생각하겠다.”
정우가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더 뽑고는, 역수로 잡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맹세하지. 목적을 위해 시신을 훼손하는 것 외에는, 더는 널 조롱하지도, 모욕하지도 않겠다. 그리고, 너의 ‘일부’를 전리품으로 챙겨가겠다. 너와의 ‘승부’를 기억할 수 있도록.”
“그거 고맙군. 빌어먹을 놈아.”
어느샌가 둘 사이엔 증오와 분노, 절박함과 슬픔을 넘어선 기묘한 인연이 생겼다.
서로의 ‘각오’를 인정하고,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무언가 기묘한 유대감.
순수하고 명료하기 그지없는 목적과 투쟁심만을 바라보는 그런 유대감.
“..!”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뎌 서로의 급소를 노린다.
어둠 속의 칼날이 빛날 때마다 서로의 몸에 상처가 한 줄씩 새겨져 간다.
그러나 둘 다 고통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통 따위에 신경 쓸 틈 따윈 없다.
칼날을 주고받을 때마다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감각은 극도로 압축된다.
그렇게 수십 번의 합을 나눈 끝에야, 승부가 결정되었다.
“주군, 오늘 일정은..으아아아!”
다음날,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온 시종장이 살해당한 나탈리아를 발견했다.
시신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나탈리아를 오래도록 섬긴 시종들마저 알아보기 힘들어할 정도로.
“맙소사...”
“..우욱! 우으윽!”
“20년 넘게 싸움터를 누볐지만... 이 정도로 끔찍한 광경은 처음이오.”
시종장이 불러 모은 가신들은 나탈리아의 시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탈리아의 시신은 흡사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갈린 복부 사이론 내장이 흘러나왔고, 난도질당한 살갗은 성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지옥에서 고문받던 죄인이 현실로 나온 듯한 광경이었다. 거기에, 핏덩이에 가까운 무언가가 끔찍함의 절정을 보였다.
강제로 어미의 배 속에서 끄집어내진 아이의 시신이, 나탈리아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저, 저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 겁니까?
“..미친 자로군.”
시간이 지나 충격이 잦아들고서야, 신하들은 벽에는 피로 휘갈겨 쓴 섬뜩한 지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는 예를 갖춰 매장하고 어미는 광장에 걸어놔라. 죄인이란 표식을 걸어서. 브로지카의 모두가 폭군의 몰락을 지켜볼 수 있도록. - 한밤의 까마귀.’
정우의 지시대로, 나탈리아의 시신이 광장에서 브로지카의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었다.
섬기던 주군의 시신을 광장에 내거는 일 따위, 제정신이 박힌 신하라면 하지 않을 짓이다.
그러나, 정우의 지시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주군을 끔찍하게 참살한 자다.
‘까마귀’라 자칭한 자는 자신들의 목 따위, 추수철 농부가 밀을 베는 것보다도 쉽게 벨 수 있을 터다.
그렇지 않아도 폭정을 저지르던 주군이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서도 충성을 바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배신으로 실추될 명예 따위, 나탈리아의 금고를 털어서 나올 보물들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마침 인색하던 주군이기도 했으니,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받아 간다고 정당화하기도 좋았다.
마음이 정해진 뒤의 신하들의 행동은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저기 걸린 게 백작 각하..가 아니라, 나탈리아라는 게 사실인가?”
“맞다니까 그러네. 지난밤에 누군가가 죽여버렸다고 하네.”
평소 손수 처형한 자들이 내걸리던 교수대에, 나탈리아 자신이 매달린 모습은 수많은 군중을 끌어모았다.
“마귀 같은 년. 잘 뒈졌다.”
“캬악, 퉤! 저년 죽인 사람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구먼. 누군진 몰라도.”
“지옥에서 영원히 썩어라. 빌어먹을 년아! 네년 손에 죽은 아들이 네년이 고통받는 걸 봤어야 했는데.”
시신의 처참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슬퍼하거나 연민을 느끼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러왔던 증오를 저주의 말로 바꿔 미친 듯이 내뱉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처형이나 고문을 당한 친지가 있는 자들은 유품을 품에 안고 오열한다.
시신을 지키는 병사들마저 주군의 비극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허공을 응시한다.
몇몇은 평소 원한이 쌓였는지, 창으로 옛 주군의 시신을 쿡쿡 찔러보기까지 한다.
정우의 예측대로 큰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신을 조리돌린 것이 ‘분풀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몇몇 셈이 빠른 자들이 ‘분풀이’ 너머의 보상을 이야기했지만, 신하들이 이미 금고를 이미 털어버린 뒤였다.
장부 역시 조작되어,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혹을 구시렁거리며 말이다.
옥좌는 여전히 비어있고, 주장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우가 새겨넣은 공포가 모두의 권력욕을 억눌렀다.
평소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옥좌를 바라보던 신하들은 ‘까마귀’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하고, 평민들 역시 감히 나서지 못한다.
다만, 나탈리아를 살해한 일은 브로지카의 현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여전히 땅은 가난하고, 폭정으로 인한 상처가 벌어져 있다.
관리들은 ‘까마귀’를 두려워해 이전만큼 폭정을 저지르진 않으나, 여전히 무거운 세금이 백성들을 괴롭힌다.
내일에 대한 기대나 희망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허덕일 뿐.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후계자가 없는 권좌는 으레 지루한 재판을 거쳐 섬기던 주군의 영역에 귀속된다.
그동안 과두정을 구성한 기존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백성들을 수탈할 것이고, 레흐는 거기에 맞서 자기 영향력을 늘려갈 것이다.
레흐엔 최악을 간신히 벗어난, 차악의 결과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확실하게 구해내지도 못했고, 주인이 없어진 영지를 빠르게 회수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백성을 두고 끊임없이 정치적인 줄다리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에겐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우에겐 레흐의 의사 따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끝 모를 증오를 분출하는 것과 레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 말고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
거기에 ‘강적’과의 싸움을 통해 한 단계 ‘성장’을 이루기까지 했다.
허울뿐인 주군의 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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