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92 (순혈당 - 1)

“1주 전, 나탈리아가 죽었소. ‘한밤의 까마귀’라고 자칭하는 자에게.”
브로지카에서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레흐의 집무실을 방문한 정우. 책상을 마주한 둘 사이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돈다.
“귀하는 그녀의 영지인 브로지카를 방문했소. 그리곤 뺨에 흉터가 생긴 채 귀환했지.”
레흐의 말에는 의심을 넘은 확신이 담겨있다.
확고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점이 정우의 소행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 근방에서 백작의 성채에 침입해 은밀히 백작을 살해하고, 잔혹한 지시를 적어놓을 수 있는 자는 몇 없다.
그중에서도 조그만 단서조차 남기지 않을 자는 정우 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주군. 저는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보고서에 적히지 않았습니까.”
정우 역시 레흐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했음을 짐작하고 있다.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밤의 까마귀’라는 서명까지 남겼으니.
“성채 안으로는 도저히 침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비가 꽤 견고하더군요. 그래서, 불량배들을 동원해 길거리의 소문이라도 수집해보려 했습니다.”
정우가 능청스레 뺨의 흉터 근처를 긁적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의 흉터는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뭐, 보시다시피 결과는 이렇습니다만.”
정우를 바라보는 레흐의 시선이 한층 더 매서워진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려는 듯, 그의 주먹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겨우 불량배들이 귀하에게 그런 상처를 줄 정도로 강했단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대가를 톡톡히 치렀죠.”
“당장! 당장 진실을 말하시오! 귀하가 잔학한 살인자라고, 공포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라고!”
결국 참지 못한 레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벽에 걸어둔 검을 뽑아 정우의 목을 겨눈다.
잘 관리된 칼날은 당장이라도 정우의 목을 가를 수 있을 듯이 번쩍인다.
“만에 하나, 혹여 만에 하나 제가 범인이라고 해보죠. 상황이 나아지는 게 있습니까? 주군.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질 겁니다.”
목을 겨눠졌음에도, 정우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 역시 ‘확신’을 갖고 있다. 레흐가 절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지금 브로지카의 치안과 균형을 유지하는 건 ‘까마귀’의 악명이 흩뿌리는 공포뿐입니다. 그 공포가 사라졌다간, 관리들의 착취와 민중의 분노 간의 균형은 순식간에 깨지겠죠.”
레흐는 정우의 말을 반박할 수 없다. 아무리 지극한 이상주의자인 그라 해도, 현실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다.
“적어도 정의는 바로 서겠지. 악을 악으로 처벌해선 안 된다는 정의가.”
침묵 끝에 간신히 쥐어짜 낸, 혼잣말에 가까운 대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레흐 자신도 모순으로 가득 찬 말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질서에 대한 갈망이 그를 뒤흔든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 ‘고결한’ 정의가 백성들의 생명보다 소중하십니까? 관리들의 폭정이 더해져도 괜찮으십니까?”
레흐의 망설임 가득한 칼날이 흔들린다. 뒷짐을 진 정우가 마치 베어보라는 듯 목을 칼날에 들이민다.
“진정 그리 생각하신다면 베십시오. 신하의 목숨은 주군의 것이니.”
“끝까지..!”
검을 쥔 레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기세다.
“...”
그러나 정우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번 일을 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언젠가, 반드시 책임을 묻겠소.”
레흐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검을 거둔다. 현실과 타협해야만 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회한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부디, 주군의 뜻대로. 참, 화기 거래 항목도 보고서 뒤편에 붙여놨으니 검토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나가보시오. 더 이상 귀하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롭소.”
극히 의례적이고 사무적인 정우의 말투에 레흐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미천한 신하가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1주 뒤, 다시 한번 보고를 위해 찾아뵙겠습니다.”
등을 돌려 나가는 정우의 등을 레흐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너무나도 닮았군. 우리 둘은.”
레흐가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의 말대로, 둘은 너무나도 닮아있다. 확고한 목적과 목표가 생기면 절대 멈추지 않는 것부터, 자기 자신마저 수단의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까지.
그렇기에 더더욱 정우가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자신 역시 아차 하는 순간 그렇게 돼버릴 수 있으니.
레흐는 생각한다. 반드시 정우를 올바르게 이끌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이 혹여라도 폭군으로 타락해버리지 않으리란 확신을. 그리고, 언젠가 스스로 속박한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란 확신을.
“왔구나!”
“레흐 님은 뭐래? 실패해서 문책한다거나 하진 않았어?”
여관(겸 상관)으로 돌아온 나를 유나와 현이 맞이한다.
둘 다 표정에 걱정이 가득 담겼다. 뭐, 걱정의 ‘원인’은 다르겠지만.
“잘 해결됐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칠 생각인가 봐. 앞으로 ‘첩보장’일에 좀 더 신경 써야겠어.”
“휴우. 그거 다행이네. 난 자기가 쫓겨나면 어쩌나 하고...”
한숨을 몰아쉬는 현과 달리 유나는 여전히 안색이 어둡다.
현은 아직 내가 하는 일이 평범한 해결사 역할, 즉, 길거리의 폭력배들과 드잡이질하는 선에서 끝나는 줄 알고 있다.
언젠가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녀를 지켜야만 한다는 책임감에, 무엇보다도 현이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뺨과 어깨에 난 흉터 하나만으로도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따지던 그녀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곳에 돌아왔을 때 부탁해둔 건 어떻게 했어? 다음 ‘일’에 필요해서.”
“화약에 불량품이 있으니까 검사할 장소로 보내 놓으라고 한 거? 제대로 배송해놨지.”
그거 다행이군. 바로 ‘다음 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아, 맞다. 자기가 성에 찾아간 사이에 우체부가 왔어. 우리 도박장 인장이 찍혀있는 걸로 봐선 지은이네가 보낸 거 같아.”
출발할 때 맡겨놨던 조사가 끝났나 보군. 나신의 거취나 아편 거래 건에서 수상했던 것들, 붉은머리의 행적에 관한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고했어. 편지는 갔다 와서 읽을게.”
“갔다 온다니? 설마 또..?”
현의 얼굴이 다시 걱정으로 어두워진다. 피를 흘리며 돌아온 것이 고작 1주일 전이니, 어쩔 수 없나.
“괜찮아. 잠시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것뿐이야. 오늘 밤 안으로 돌아올 거야. 상처 없이, 온전하게.”
“정말이지..?”
“그럼.”
불안해하는 그녀를 안아주고 머리를 토닥인다. 경직된 그녀의 몸이 조금씩 풀려가고, 따듯한 온기가 서로의 몸을 채운다.
‘유나, 장비 챙겨서 나와. 할 일이 있어.’
우리를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미묘한 미소를 띠며 바라보는 유나에게 입만 움직여 말한다.
“에라이, 짝없는 년은 서러워 살겠나. 밖에 산책이나 좀 다녀와야겠네.”
비밀스러운 태도에 ‘할 일’이 뭔지 알아챈 유나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방으로 돌아간다.
4피트 반 맥주점. 피셰의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허름한 맥줏집이다. 주변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건물들 탓에 안 그래도 음습한 분위기가 강해진다.
“이야, 황도 뒷골목이 생각나는걸. 온종일 입담배나 씹어대는 놈들까지 있음 딱 맞는데.”
“비슷하긴 하네.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
그 앞에 선 정우와 유나가 감상을 나눈다. 모든 것이 번영하는 듯한 도시에도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실소를 흘린다.
“계획은 있지?”
“솔직히 말하면, 없어.”
정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겸양에 가깝다. 몇 가지 안전장치는 마련해 뒀지만, 정작 들어갔을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계획은 없다.
“뭐?!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진짜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거야?”
유나가 앞서가던 정우를 황급히 멈춰 세운다. 예상외의 답변에 적잖이 당황했다.
“근처 주점이나 여관은 전부 돌아봤는데, 정보를 구할 수가 없더라고. 굉장히 폐쇄적인 녀석들이었어.”
“그럼.., 붉은머리의 조직..이 아니라, 회사 같은 거야?”
“그래. 아마 은거지에 상주하는 수뇌부들 말고는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는 자가 없겠지. 전형적인 점조직형 구조야.”
“상대하기 번거로운 녀석들이네. 쯧.”
“좋게 생각하자고. 점조직은 머리만 쳐내면 아래 녀석들은 알아서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임에도, 정우의 태도나 표정엔 변화가 없다. 맥줏집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각오’를 굳혔다.
“간만에 몸 좀 풀게 생겼어.”
유나가 어깨를 풀며 제자리에서 몇번인가 뛴다. 작은 체구 탓에 어찌 보면 귀여워 보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눈에 깃든 각오와 살의는 진실하기 그지없다. 필요하다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인자’의 눈이다.
“어이, 주인장! 맥주 큰 걸로 두잔 주쇼!”
“여기 로수 한 사발!”
맥줏집 안쪽은 여러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난로와 화로, 사람들의 체온으로 달궈진 주점 안쪽은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동생이 참 귀엽구먼. 나이 차가 좀 나는 남매인가 보오. 동생 끼니를 챙겨주러 오셨소?”
주점의 주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곤 정우와 유나를 맞이한다.
“누가 남매라는 거요! 친구요! 친구! 이놈이랑 나랑 4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역린이 건드려진 유나가 바락바락 소리치며 따진다.
술을 시킬 때 무시당하거나, ‘어른들의 업소’를 방문할 때 번번이 거절당하는 등, 평소에도 이곳저곳에서 곤란을 겪는 그녀다.
정우나 예현처럼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고 쉽게 넘어가긴 힘들다.
“진정하라고. 여기 ‘주먹질’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
“..!”
당장이라도 주점 주인의 멱살을 잡으려 드는 유나를 정우가 뒤에서 끌어안아 제지한다.
마침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어서, 미묘하게 오빠와 동생처럼 보이는 구도가 되었다.
“..칫,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다음부터 조심하쇼. 주인장.”
정우에게 뒤에서 끌어안겨진 유나가 토라진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유나의 힘이라면 충분히 저항하며 주인장의 멱살을 잡아챌 수 있었겠지만, 정우의 팔이 등에 닿는 순간 몸에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며 힘이 빠져버렸다.
“미안하게 됐소. 그래서, 무슨 일로 왔소?”
주점 주인이 무안한 표정으로 목뒤를 쓸어 넘긴다.
“일 끝내고 이 녀석이랑 목이나 축일까 해서.”
정우가 끌어안겨진 유나를 턱짓으로 가리키곤 바닥에 내려놓는다.
볼이 빨개진 유나는 주점 주인과 정우의 시선을 피하기 바쁘다.
“그렇구먼. 빈자리 아무 데나 가서 앉아 계쇼. 주문은 뭐로 하실 거요?”
“흑맥주 두잔, 생강이랑 계피 넣어서. 거품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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