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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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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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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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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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3 (순혈당 - 2)

DUMMY

 ‘주문’을 들은 주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는다. 어찌하여 이방인이 ‘순혈당’의 암구호를 알고 있단 말인가. 어딘가 이상하다.


 “..! 흠, ‘이곳’사람들 외엔 잘 마시지 않는 술인데. 그쪽은 아무리 봐도 ‘이쪽’ 사람으론 안 보인단 말이지.”


 “자주 들은 말이오. 부모님이 제국 출생이셔서.”


 진실이면서도 진실이 아닌 말이다. 자신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오해를 유도하고 있다.


 그 모습을 유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감탄 섞인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소? ..흐음. ”


 주인장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방인 출신이 순혈당원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믿기 어려운 눈치다.


 “이전에 내 ‘친우’와 만났을 때 ‘추천받은’ 조합이었소. 맛이 꽤 훌륭하다더군.”


 “친우라..”


 “교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소만, 올레스니카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주 훌륭한 사내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지 궁금하군. 어떤 자요?”


 주인장이 탁자 뒤에서 몸을 기울여, 정우와의 거리를 좁힌다. 그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함에도, 주인장의 경계심이 극에 달한 것이 공기로 전해질 정도다.


 “미안하오.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겠군. ‘신뢰’가 최우선이니. 다른 이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소.”


 “설령 그쪽 ‘주문’을 내오지 않는다 해도?”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말이오. 내 ‘친우’는 나를 신뢰해 이곳을 소개해 주었소. 그 신의를 저버릴 순 없소.”


 정우는 주인장의 시험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 매달리는 듯한 움직임을 취해서야, 그저 의심만 살뿐이다.





 “‘zaufanie jest wszystkim'”


 대신, ‘신뢰야말로 모든 것이다.’라는 말을 주인장의 귓가에 속삭인다.


 “..!”


 주인장의 눈이 충격과 희망, 반가움으로 크게 떠진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천천히 잊혀가는 올레스니카의 말이었다.


 이곳 피셰처럼 이미 제국의 말과 문화가 깊숙이 침투한 지역에선 ‘못 배운 시골뜨기들의 말’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인의 자손이 올레스니카의 말을 사용했다.


 이것이 올레스니카의 말과 문화가 제국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바꿔말해 순혈당의 활동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젊은 시절부터 이어온 투쟁이 어떤 결실을 보았다는, 그동안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감격이 주인장의 심장을 가득 채운다.





 “‘Chwała ojczyźnie.'”


 주인장의 입에서 ‘조국에 영광을.’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의 경계심은 단 한마디의 말로 풀어져 버렸다.


 “좋소. ‘주문’을 내어드리지. 날 따라오시오.”


 만면에 웃음기를 띤 주인장이, 뒤편 창고로 정우와 유나를 이끈다.





 “이야, 네 혀 놀리는 솜씨는 어디 안 가네. 처음 널 봤을 때만 해도 싸움이 네 특기인 줄 알았는데.”


 정우의 옆을 따라 걷는 유나가 몸을 기울여 속삭인다. 몸의 긴장도 조금 풀어져 있다. 여차하면 무기를 뽑아 한바탕 날뛸 생각도 했었던 듯하다.


 “뭐, 사냥은 끈기와 교활함이 핵심이니까. 둘 다 내 특기지. 궁지에 몰린 곰이 얼마나 교활해지는지 알면 놀랄걸.”


 “헤에. 결국 사람 속이는 거나 동물 속이는 거나 별 차이는 없다는 거네.”


 유나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속삭인다. 평소 싸울 때 외에는 맹해 보이는 그녀지만, 때때로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고 계시오?”


 속삭임이 닿았는지, 앞서 나가던 주인장이 뒤를 돌아본다. 다만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는 없다.


 “아, 별것 아니오. 그저 ‘대화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사람의 호감을 사는 법 같은 것 말이오.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나게 될 텐데, 미리 알면 좋지 않소.”


 “흠, 그렇군. 그쪽 처자는 참 좋은 친구를 두었구려.”


 납득한 주인장이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유나가 정우를 더더욱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이 아린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나 예현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그런 소탈한 청년이 어째서 이런 면모를 갖게 되었단 말인가.





 주인장이 안내한 곳은 창고에 딸린 지하실이었다.


 바닥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입구가 빈 상자와 술통으로 교묘히 가려져 있어, 관계자가 아니라면 쉽사리 알아볼 수 없다.


 지하실은 위층의 맥줏집보다 명백히 큰 구조로,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지하실에 딸린 가구나 집기류는 규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때 순혈당원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의기투합했을 원탁은 여러 곳이 갈라져 있고, 정교했던 계획들이 적혀있던 낡은 양피지 위엔 조잡하고 충동적인 글씨가 잔뜩 적혀 있다.


 벽면에 비치된 무장들 역시 군데군데 녹슬고 갈라져 제구실을 하기 힘들어 보인다.


 핏방울과 검의 문장이 새겨진, 거미줄과 먼지가 쌓인 깃발이 천장에 내걸려 옛 영광과 대의를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곧 동지들을 불러오리다.”


 전혀 정리되지 않은 광경임에도, 주인장은 익숙하다는 듯 넘기곤 지하실에 난 문 중 하나를 나선다.


 분명 하루 이틀 이런 상태가 지속된 것이 아니리라.





 “하, ‘nasz duch nie zginie’. ‘우리의 정신은 쇠하지 않으리.’라. 역설적이군. 지금 상태를 봐서는.” 


 정우가 깃발에 새겨진 문장 아래의 글귀를 보곤 비웃음을 흘린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고귀한 무언가를 위해서’ 같은 형체 없는 신념을 경멸하는 그다.


 쇠락한 ‘대의’만큼 조롱을 참기 어려운 것은 없다.


 “그러게.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은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경비가 고작 다섯이야. 무장 수준도 별로고.”


 유나가 곰팡이 낀 벽면을 둘러보며 그동안 지나온 길을 되뇐다.


 생각보다 쉬워질 듯한 일에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자에 앉을 만큼 긴장을 풀진 않는다.





 “뭐, 그렇겠지. 지지받지 않는 저항조직은 이렇게 되기 마련이잖아. 조사할 때 알게 된 건데, 우리가 재판받을 때 느꼈던 분위기가 여론인 것 같아.”


 “여기 사람들 전부 순혈당을 싫어한다는 거?”


 “맞아. 초창기엔 동조하던 사람들도 상당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과격한 방법들을 쓰다 보니까 결국 다 떨어져 나갔지.”


 정우가 탁자 위의 양피지를 만진다. 오래간만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양피지가 부스러져 흩어진다.


 “주군의 대관식을 습격한 게 결정타였어. 자기들 딴엔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라고 생각한 것 같다만.”


 “레흐 말로는 그때 죽은 사람이 엄청났다고 했잖아. 그리고..”


 말을 잇기 전 유나가 잠시 정우의 눈치를 살핀다.


 레흐에게 이상할 정도로 적의와 질투심을 품고 있는 정우인 만큼, 유나도 말을 꺼내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사람들도 레흐 정도의 공작을 쫓아내긴 싫었을 테니까. 귀족 중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





 “..그래. 특이하긴 하지.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야. 자기 없앨 순 없어.”


 역시나, 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차가워진 시선엔 베일 정도의 무뚝뚝함이 묻어난다.


 “여하튼, ‘피의 대관식’ 날 손실된 세력을 지금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어. 그날 이후론 뒷골목 주먹패 정도 규모로 쪼그라든 모양이야.”


 정우의 말대로, 현재 순혈당의 세력은 모든 조직원을 합쳐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질적 수준 역시 극도로 추락해, 대관식 습격처럼 정교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공작의 목숨을 위협하던 이들이 지금 하는 일이라곤 제국의 말을 가르치는 교습소를 습격하거나, 제국 출신 상인이 운영하는 상회나 공방을 습격하는 일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올레스니카인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


 이야기를 듣던 유나가 잠시 숨을 죽이곤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슬슬 ‘준비’를 해야겠어. 어떻게 할래?”


 두 사람이 챙긴 무장은 숨겨 입은 방탄복과 각각 권총 2자루, 단검 2자루가 전부다.


 본격적인 전투를 대비하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는 무장이지만, 두 사람에게 두려움은 없다.


 이미 이것보다도 훨씬 가혹한 싸움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방심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선사한다.


 “평소대로 하자. 내가 시선을 끌고, 네 기습으로 ‘판’을 시작하는 거야.”


 “신호와 표적은?”


 유나가 품속에 숨겨둔 권총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원탁에 집중한다. 벌써 머릿속에 전투 상황을 그리고 있다.


 “내가 ...이라고 하면..,”





 “그쪽이 새롭게 합류한 동지인가 보구려.”


 “새 얼굴을 보니 참으로 기분이 좋소.”


 “옛날 생각이 나지 않나? 동지들.”


 ‘작전’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주인장을 따라 14명의 사람이 지하실로 들어온다.


 그들 모두 50을 바라보는 나이의, 평범한 인부 행색의 사람들이다.


 땀에 전 옷을 입고, 일자리의 동료들과 술 한잔으로 피로를 풀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나가는, 그런 자들이다.


 젊은 날의 이상은 이미 그들의 얼굴에서 떠나고 없다.


 그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그저 ‘그렇게 사는 법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고,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은 모조리 소진돼버렸다.


 “...”


 그들을 바라보는 정우의 표정에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경멸이, 거부감이 희미하게 깃든다.


 경하나 유나, 예현, 레흐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라면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았을 감정들이다.





 “야! 인사해야지. 멍하니 뭐 하는 거야.”


 굳어있던 정우의 옆구리를 유나가 툭툭 친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조금 당황한 티가 난다.


 “..실례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분들을 뵙게 돼서, 잠시 넋을 놔버렸습니다.”


 임기응변에 능한 정우 답게, 금세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순혈당의 지휘부를 맞이한다.


 “아니, 우리가 영광이네. 자네 같은 사람들도 우리 ‘대의’에 동참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가장 앞에서 걷던, 희끗희끗한 머리의 사내가 정우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게 말이오. 자기 뿌리도 잘 모르는, 요즘 젊은것들하곤 완전히 다르지!”


 그에 맞춰 정우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순혈당원들이 정우와 유나의 주변을 에워싼다.





 앞으로 그들 앞에 펼쳐질 운명조차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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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7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3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2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0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0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0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0 0 12쪽
»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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