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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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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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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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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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5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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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4 (순혈당 - 3)

DUMMY

 “반갑습니다. 정우라 합니다. 대의에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우가 초로의 사내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한다.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지금 나서면 적어도 넷은 즉사시킬 수 있겠지만, 둘러싸인 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거기에, 아직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 모습에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유나 역시 어깨의 힘을 뺀다.


 “프란치셰크라 하네. 만나게 되어 반갑네. 오던 중 게오르기에게 얼추 소개받았네. 듣던 대로 참으로 훌륭한 젊은이로군. 한명씩 동지들을 소개해 주겠네.”


 초로의 사내가 악수를 마치곤 돌아가며 주변 사람들의 이름과 간략한 사항들을 말해준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옷차림답게, 설명 역시 직업이나 그동안 해왔던 일 등에 대한 것들이 전부다.





 “..마지막으로, 이쪽은 올가라고 하네. 내가 자리를 비울 때 마지막 결정을 담당하는 사람일세.”


 “여, 앞으로 잘 부탁하네. 프란, 슬슬 자리에 앉자고. 모였으니 한잔 걸쳐야지.”


 발그레한 뺨과 퉁퉁한 몸매가 눈에 띄는 중년 여인이 손에 든 술병을 흔든다.


 병엔 ‘탄야 양조장’이라는 글자가 제국어로 새겨져 있다.


 증오스러운 제국을 쫓아내기 위해 동포들에게도 무기를 겨누는 자들이, 새로운 동지를 환영하기 위해 제국의 술을 꺼낸다.


 “...”



 겉으로 보기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정우지만, 속으론 터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대의’라는 허상에 스스로 목을 매는 자와 신념을 지키지 않는 자, 이 두 부류는 정우가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이다.


 전투를 앞둔 상황이 아니었다면 바로 면전에서 비웃었을 것이다.





 “그래, 이만 앉지. 이 친구들도 오래 기다렸고, 우리 당의 상황도 제대로 알려줘야 하니.”


 정우의 본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저 자리에 앉은 프란치셰크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술잔을 돌린다.


 원탁의 가장 상석엔 프란치셰크가 앉고, 그 맞은편에 정우와 유나가 앉는 형세가 되었다.





 “그래서, 새로 사귀게 된 친우가 순혈당을 소개해줬다고?”


 프란치셰크가 묻고, 주변의 시선과 귀가 전부 정우와 유나를 향한다.


 여전히 별다른 악의나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랜만에 찾아온 ‘동지’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다.


 “예. ‘일’이 있어서 이곳 피셰에 들르게 되었는데, 여독을 풀러 머문 여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럼, 이쪽의 귀.. 아니지, 듬직해 보이는 처자는 자네 동료인가?”


 이미 언질을 받은 듯, 유나를 대하는 태도가 극히 조심스럽다. ‘작다’, ‘어려 보인다’와 비슷한 어휘를 쓰지 않으려는 것이 바로 티가 날 정도다.


 “맞소. 유나라 하오. 솔직히 말하면 ‘대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소만, 이 녀석이 혼자 다니게 둘 수 있어야지.”


 “..!”


 정우가 충격에 숨을 삼킨다. 예상외의 일이다. 그 단순하면서 사람 좋은 유나가, 사실을 교묘히 반죽한 거짓을 말했다. 그것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무리 전투를 앞둔 상태라 ‘살인자’의 마음가짐을 갖추었다고 해도, 평소라면 적어도 시선이라도 피했을 것이다.


 분명, 조금 전의 번뜩임이 그녀를 어딘가 다른 지점으로 변화시켰음이 틀림없다.





 “그렇군.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처자는 우릴 배신할 생각이 있는가? 지금 당장 우리 위치를 공작의 성으로 달려가 밀고할 생각이 있냐는 말일세.”


 프란치셰크가 미소를 거두곤 몸을 앞으로 당긴다. 


 “이 녀석이 순혈당을 섬기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바늘에 따라가는 실 같은 거지.”


 유나가 엄지로 정우를 가리키며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놓는다.


 ‘우연히’ 제국 출신인 두사람이 같은 대의를 품고 있다곤 생각하기 어렵다.


 적당한 의심을 사는 대신, 당장 필요한 만큼의 신뢰는 얻어낼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좋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오. 언젠가 자네가 진심으로 우리 순혈당의 대의를 따를 수 있다면 좋겠구려.”


 프란치셰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실망이 얼굴에 드러난다. 그러나, 사람이 부족한 만큼 지금 당장 추궁할 생각은 없다.


 어쨌건 젊은 당원인 만큼 여러모로 써먹을 구석이 많다.





 지난번 꾀어 온, 갓 시골에서 넘어온 젊은 녀석들은 공작과 붙어먹은 녀석을 습격하는 데 사용해버렸다.


 혈기만 넘치던 자들이라, 정작 ‘임무’에는 실패해버린 것이 아까울 따름이다.


 이곳에 있는 수뇌부만 멀쩡하다면 새로 들어온 녀석들이야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만.


 오히려 ‘대의’를 섬길 기회를 주는 것 아닌가. 감사 인사를 들어도 부족하지 않다.





 “멍하지 있지 말라고, 프란. 새로 동지가 합류한 날인데, 이래서야 쓰나.”


 옆에 앉은 올가가 프란치셰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술잔을 치켜든다.


 그녀의 손길에서 오랜 벗을 향한 우정이 묻어나온다. 함께 나이를 먹어간 형제자매 조차도 저런 애정을 보이긴 쉽지 않을 것이다.


 “자, 술잔을 올리세!”


 올가의 외침에 맞춰 모두가 잔을 쳐든다. 프란치셰크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환대는 진심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기 직전, 정우가 말을 흘린다. 물론,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다.


 대놓고 캐는 티가 나지 않도록 흘리듯 나직이 말한 것도,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은 것도.


 설령 자기만족일 뿐일지라도, 접대의 관습은 지켜져야만 한다.


 “...”


 유나 역시 같은 생각인지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있다.





 “다들 바빠서 말이네. 활동 자금이 저절로 모이진 않지 않나. 일단은 우리 지도부만 모였네.”


 올가가 술을 들이켠 뒤, 열을 내뱉기 위한 한숨과 함께 대답한다.


 “그럼, 여러분들께서 하나씩 지부를 맡아서 운영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올레스니카의 중요한 곳마다 우리 지부가 있지. 지부장들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지부는 서로의 위치조차 모른다네. 보안을 위해서지.”


 프란치셰크가 만족감에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자신이 구축한 보안 체계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철저하시군요. 제가 살면서 본 보안 체계 중 가장 ‘인상적’입니다.”


 물론, 정우에겐 그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비밀 결사에 이렇게나 쉽게 침투할 수 있고, 예비 인력도 없이 지도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 하나를 위해 지부장님들께서 한자리에 모여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우는 이런 ‘비전문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최후의 최후까지 계속해서 확인한다.


 “자네들 같은 의로운 젊은이들을 환영하는 일일세. 지도부 전체가 나와야 면이 살지 않겠나.”


 “헤, 마침 생업이 끝난 시간이기도 하고.”


 프란치셰크의 말을 올가가 거든다. 결국, ‘사람이 그만큼 안 모이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라는 말을 거창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촌극에 점점 비웃음을 참기 힘들어지는 정우였지만, 점점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이 그의 자제심을 지지한다.




 “혹 괜찮다면,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환대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확인이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눈앞의 늙어빠진 양 떼를, 자신들이 사자인 줄 아는 양 떼를 하나씩 도살하는 일뿐이다.


 “좋은 생각이네. 그리하게.”


 다소 무례할 수 있는 행동에도 프란치셰크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눈앞의 젊은이의 무례 따위, 이 자의 목숨을 사용하는 대가로는 지극히 싼 값이다.


 점점 자신의 ‘파멸’이 다가옴에도, 그릇된 확신과 독이 든 자만에 좀먹힌 그의 본능은 작동하지 않는다.





 “모두, 저를 봐주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정우를 향하는 그 순간, 정우의 눈빛이 돌변한다. 교활한 여우의 눈빛에서, 살육을 즐기는 사자의 눈빛으로.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높이 든다. 이미 술기운이 도는 자들은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


 긴장된 분위기를 읽은 유나가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을 수 있도록 어깨와 팔뚝을 푼다.


 신호가 떨어진다면, 안갯속의 등대가 깜박이는 것보다도 빠르게 생명을 거둘 수 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여정이 편안하길.”


 약속한 말이, 정우의 입에서 떨어졌다.





 탕!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나가 품속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격발한다.


 “끄으..억.”


 프란치셰크의 옆에 앉아있던 사내의 가슴팍이 붉게 물든다.


 그가 잠시 멍하니 자기 가슴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탁자에 고꾸라진다.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리크! 리크! 이게 무슨..!”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려 하나,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정우가 무심하게 던진 단검이 목을 꿰뚫었다. 목을 파고든 단검이 그녀의 신경을 끊어놓았다.





 “X발..! 함정이었...”


 “내가 시간을...”


 정우와 유나 바로 옆의 사내들이 늦게나마 대응을 시도한다. 거칠게 팔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에서, 녹슨 철과 같은 느낌이 사라졌다.


 “커컥! 컥! 끄으윽..!”


 “흐으윽! 내 특..! 특이..!”


 그러나 정우와 유나를 제압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미 싸움이 시작되고 ‘기나긴’ 찰나가 지난 뒤다. 간단한 움직임 따위, 손쉽게 대응할 수 있다.


 하나는 정우의 주먹에 턱이 빠져 쓰러진 뒤 머리를 밟혔고, 다른 하나는 유나의 단검에 복부를 몇번씩 난자당해 쓰러졌다.


 “다들 무기 챙겨! 빨리!”


 프란치셰크가 무기가 거치된 벽을 향해 달리며 지시를 내린다.


 순식간에 4명이나 죽어버려, 충격에 빠져 있던 자들이 그의 일갈에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그 지시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정우와 유나는 그들과는 전혀 상반된, 마치 서류를 정리하는 사무원과 같은 태도로 묵묵히 ‘일’을 계속한다.


 이미 몇 번, 몇십번이고 반복해본 일이다. 이미 ‘각오’를 마친 그들의 마음속엔 어떤 파문도 일지 않는다.


 탕! 탕!


 정우와 유나의 권총이 동시에 불을 뿜는다. 총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가장 뒤의 두 명이 맥없이 쓰러진다.


 이들의 실력은 이런 거리에선 결코 목표를 빗맞히지 않는다.





 “우오오오!”


 가장 먼저 무기를 챙긴 여인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탁자 위를 넘어 정우를 노린다.


 제대로 관리가 안 돼 있다곤 하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정우에게선 어떤 공포나 당혹감도 찾을 수 없다. 기세는 좋으나, 너무나도 느린 공격이다.


 “받아라!”


 여인이 탁자에서 뛰어내리며 도끼를 내리치는 일격을, 정우가 옆으로 단 한걸음만을 움직여 가볍게 피해버린다.


 탕!


 아무런 말도 없이, 공격을 피한 자세 그대로 정우가 여인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발포한다.


 여인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주인을 잃은 몸이 도끼 위로 쓰러진다.


 남은 수는 여덟.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곱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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