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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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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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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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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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9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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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5 (순혈당 - 4)

DUMMY

 “소신, 폐하의 부름에 답하였나이다. 옥좌의 주인께 무한한 영광 있으라. ”


 ‘태은의 공작’ 을파소가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오며 절을 올린다.


 집무실은 황제의 것이라기엔 단출하기 그지없다. 철필 자국이 가득한 책상부터 의자의 닳은 팔걸이까지, 수십 년 넘게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제국이 흔들리는데, 사치를 위해 사용할 돈 같은 건 없다는 황제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오셨군. 앉으시오. 논의할 것이 많소.”


 책상 위의, 광대한 세계의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제가 손을 흔든다.


 밀담을 위해 시종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 이상, 불필요한 예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논의라 하옵시면.. ‘서부’의 일을 이르시는 것이옵니까?”


 그런 황제의 모습이 익숙한 듯, 을파소 역시 개의치 않고 맞은편의 의자에 앉는다.


 “그렇소. 계획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간소한 복장에 예법조차 생략하는 황제이나, 주변을 내리누르는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감에 가득 찬 눈과 자세는 태산과 같이 주변을 짓눌러, 강대한 전사조차 무릎 꿇릴 존재감을 발한다. 확신에 찬 음성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조차 찾아볼 수 없다.


 6척이 넘게 쭉 뻗은 풍채와 강대히 단련된 육체, 뚜렷한 이목구비에선 억누를 수 없는 영웅의 기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러한 면모 아래엔 25년이 넘는 치세와 50번이 넘는 겨울을 견뎌낸 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날로 무거워지기만 하는 옥좌의 무게는 그를 사정없이 짓눌러, 당장이라도 자리에 쓰러질 만큼 고통스럽게 한다.


 빛바랜 머리칼과 얼굴에 새겨진 주름 하나마다, 그가 내지르지 못하고 억누른 감정이 담겨 있다.


 그의 내면은 이미, 죽음만을 기다리는 팔순 노인의 그것과 다름없다. 그저, 황제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계획대로, 의심받지 않고 ‘늑대공’의 측근에 사람을 심어두었사옵니다. 폐하의 친서 역시 전달했음을 확인했나이다.”


 을파소의 말대로, 나신은 이미 ‘포타첸의 공작’ 늑대공 안나의 측근이 된 지 오래다.


 황제의 친서를 확인한 이후론 안나는 그를 더더욱 중용해, 사적인 ‘조언자’를 넘어 공적인 요직까지 차지했다.


 “‘누더기 공’ 레흐의 권력 역시 점점 강해지고 있나이다. 제국 법정에 올라온 ‘브로지카’ 백작령의 상속 문제만 빠르게 해결해 준다면, 적어도 4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훌륭하오. 계획의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은 어떻소?”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나이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서부 왕국들 곳곳에 제 수족들이 침투했사옵니다.”


 “수고하셨소. 경의 수고는 언제나 의지가 되오.”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신뢰와 은혜에 비하면 티끌과 같은 수고이옵니다.”


 황제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공로를 치하한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두 사람의 유대는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





 “우리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20만이 한계요. 그것도 1년 이상은 유지할 수 없지. 무력만으로 서부 왕국들을 병탄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황제가 미소를 거두곤 을파소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제국의 충신인 그에게 압박을 가하는 건 내키지 않으나, 위급한 제국의 상황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서부의 왕국들은 가장 약한, 북방의 ‘칼마르 연방’ 마저도 5만의 병력을 너끈히 동원할 수 있소. 서부 끝자락의 ‘골란디아 왕국’ 같은 경우는 15만은 능히 짜낼 수 있고.”


 신대륙에서 흘러온 부 덕분에 서부의 왕국들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뤘다.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금은 수십 배가 늘었고, 무장과 병력의 수준 역시 제국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나마 격변하는 시대와 내부의 여러 불온한 움직임, 급증하는 인구로 인한 행정 수요 등이 그들의 발목을 묶고 있을 뿐이다.


 “혹 이런 상황에서 서부를 통합한 ‘서부의 황제’나 ‘서부의 통령’이 등장한다면, 이번엔 우리가 위협받는 처지가 될 거요.”


 반면 100년 전까지만 해도 60만 병력을 2년 이상 동원할 수 있던 제국은, 전임자들의 무능과 제국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몰락을 거듭했다.


 “허니 어떠한, 그 어떠한 실수도 용납될 수 없소. 서부에 공화파가 준동하는 이 기회를 놓쳤다간, 다신 대륙 서부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소.”


 “결단코 폐하께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겠사옵니다. 폐하께 영광을 바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진하겠나이다. 그것이 폐하의 ‘발톱’으로서의 책무이옵니다.”


 을파소 역시 결의에 찬 얼굴로 예를 갖춘다. 그에겐 황제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고, 황제의 소망이 자신의 소망이다.


 이번 ‘계획’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X발..! 뭐 이런 새끼가...”


 몇 걸음을 빠르게 내달린 순혈당의 지도부가, 벽에 걸려있던 무장들을 하나둘씩 챙긴다.


 휘두르는 자들처럼 하나같이 낡긴 했으나, 갑주를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을 해칠 수준은 된다.


 특히나 방패는 장식을 겸한 만큼 특히나 크고 무겁다. 평범한 납탄 정도는 몇발까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다.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닐세! 보통 실력이 아니야! 동지들이여, 어서 방진을 짜게!”


 혼란에 빠진 무리를 프란치셰크가 간신히 수습한다. ‘피의 대관식’ 날 평범한 참석자인 척하며 도망친 이래로, 다신 도망치지 않겠다 다짐한 그다.


 그 ‘각오’가, 정신적인 충격을 수습했다.





 “쯧, 생각만큼 첫 일격을 가하진 못했어. 열 명은 염라 앞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유나각 혀를 차며 탄포를 입으로 가져간다. 옷 소매에 숨긴 탄포는 정우와 유나 모두 4개.


 상식적으로 본다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선 부족한 양이다.


 “그만. 복기는 나중에 해도 돼. ‘일’에 집중해.”


 물론, 둘의 실력은 평범한 상식에선 벗어나 있다.


 정우 역시 탄포를 찢어 화약을 권총에 쏟아붓는다.


 그와 유나의 손놀림엔 어떤 불안도, 망설임도 없다. 단단한 방패로 방진을 짠, 수적으로 우위인 상대더라도 그들을 위협하진 못한다.


 흔들리지 않는 손은 단 30초의, 방진을 짠 상대가 발을 떼기도 전에 네 자루의 권총을 전부 장전했다.





 “어떻게 할 거야? 저 정도 방패면 철갑탄 아니면 안 뚫릴 것 같은데.”


 유나가 권총을 방패를 향해 조준하며 속삭인다. 방패 벽 위로 고개를 드는 순간, 바로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도록.


 “달려들어야지. 접근해서 사격 각을 열어젖히자.”


 “그래. 그게 최선이겠네. 탄약도 빠듯하니까.”


 여전히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반대편과는 다르게, 정우와 유나의 의사결정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이미 ‘각오’를 마친 자들이다. 승리와 생존, 그 두 가지를 위해선 그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준비됐지?”


 정우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며 속삭인다. 교차한 양손에 들린 권총과 단검이 흉흉한 빛을 발한다.


 “그걸 말이라고. 맡을 방향이나 말해.”


 양손에 권총을 든 유나가 씩 웃는다. 옆의 녀석과는 일상생활에서도 죽이 잘 맞지만, 싸울 땐 한층 더 죽이 잘 맞는다.


 그러니, 저 우중충한 녀석을 진심으로 웃게 하고 싶다.





 “..왼쪽!”


 정우가 잠시 몸을 이완시키더니, 폭발적으로 왼쪽 뱡향으로 도약한다. 순간, 순혈당의 시선이 정우를 향한다.





 “하! 앞으로 튀어나오다니, 멍청하긴! 동지들이여, 앞으로 나가게!


 “우오오오! 가자!”


 프란치셰크가 정우의 움직임을 조롱한다. 지금 장전된 탄환은 해봐야 4발.


 몸통과 허벅지를 방패로 철저히 가린다면, 치명적이지 않은 부상자 4명 안쪽으로 저 머저리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곤 포위한 채 창과 검으로 고슴도치를 만든다면, 상대는 어른인 척하는 꼬맹이 하나만 남는다.


 그 꼬맹이는.., 잠깐, 그러고 보니 그 꼬맹이가 안 보이..





 탕! 탕!


 발소리와 함성 사이로 총성이 울린다. 방진의 양 끝에서 돌진하던 남녀가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다. 둘 다 등의 정중앙을 관통당했다.


 정우의 계획대로다. 그의 움직임에서 의도를 파악한 유나가 오른편으로 소리 없이, 몸을 숙인 채 뛰어들어 방진의 뒤를 잡았다.


 원래부터 작은 그녀의 체구에, 가구의 그림자까지 합쳐져 기척을 지워버렸다.


 정우가 굳이 큰 소리를 치면서 큰 움직임을 취한 건 상대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기 위해서였다.


 “미코와이! 그레타!”


 “이 X같은 년이!”


 동료가 살해당한 탓에, 프란치셰크가 억누른 동요가 다시 한번 퍼져나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유나를 향한다는, 최악의 판단을 저지르려 한다.


 “멈추지 말게, 동지들! 저기 저 쓰레기가 먼저일세! 저 빌어먹을 꼬맹이는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아!”


 그러나 이번에도 프란치셰크가 간신히 몇 초 정도의, 찰나에 불과한 빈틈 정도로 동요를 억누른다.


 일반적인 상대를, 일반적인 싸움터에서 상대했다면 충분히 훌륭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늦었어.”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정우는 평범한 상대가 아니다.


 단 몇 초의 시간이더라도, 생사를 나누는 찰나를 수없이 넘나든 정우에겐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방진 끄트머리까지 접근한 정우가 가장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자의 방패를 강하게 밀어 찬다.


 늦게나마 반응한 순혈당원들이 창과 검을 휘둘러 막아보려 했지만, 반응에서 


 “크흑!”


 그의 몸이 기우뚱거리고, 밀어 차던 자세의 반동을 이용한 정우가 다시 한번 어깨로 방패를 밀어 친다.


 금속 방패에 전력으로 몸을 들이미는 행동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는 행동이나, 정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커헉!”


 완전히 중심을 잃은 순혈당원이 바닥에 쓰러진다. 속도를 탄 정우가 그의 몸을 그대로 짓밟고 선다.


 “다비드! 일어..!”


 탕!


 옆의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던 여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드러난 빈틈을 향해 발사한 정우의 탄환이 그녀의 목을 파고들어 폐를 관통했다.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쓰러진다.


 “안돼! 마우르..!”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쓰러진 자가 동료를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정우가 던진 단검이 그의 미간에 꽂혔다. 부드럽게 들어간 칼날이 그의 머릿속을 파괴했다.





 “죽여버리겠어!”


 그들 옆에 있던 동료가 몸을 틀어 정우를 향해 창을 내지른다. 숙련되지 않은 창끝이지만, 피하기 까다롭다.


 시신 위에 올라서서 자세가 흐트러진 데다, 거리도 지나칠 정도로 가깝다.


 “죽어! 죽으라고!”


 그러나, 정우가 쌓아 올린 무용이 간발의 차이로나마 몸을 피하도록 이끈다.


 창이 한번 내질러 질 때마다, 정우의 몸 이곳저곳에 베인 상처가 늘어간다.


 “이제 빈손인 놈이..! 그만 피하고 죽으라고!”


 그녀의 말처럼, 정우에겐 겉으로 보이는 무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단검은 모두 던져버렸고, 손에 쥔 권총은 비어있다.


 주먹을 휘두르기엔 확실하게 급소를 노릴 수 없는 거리다.


 “..죽는 건 네 쪽이야.”


 궁지에 몰린 사람답지 않은 말이, 정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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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7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3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2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0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97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0 0 11쪽
»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0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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