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 어느 살인자와 학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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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작품등록일 :
2023.04.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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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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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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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 96 (순혈당 - 5)

DUMMY

 “뭐라고..?”


 밀리고 있는 자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한 말에, 창을 내지르던 여인의 입에서 반사적인 답이 돌아온다.


 “대답은 이걸로 대신하지.”


 정우의 무심한 말과 함께 여인의 머리를 향해 의자가 날아든다. 간신히 뒤로 물러나던 것처럼 보이던 정우가, 몸을 빼는 반동을 이용해 의자를 휘둘렀다.


 모두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일부러 빈틈을 드러낸 것부터, 아슬아슬한 선까지 공격을 맞아주며 뒤로 물러난 것까지.


 방진 대열에 소개 있는 동안엔 결정타를 꽂아 넣기 어렵다. 방금처럼 확실한 빈틈이 아니고서야, 동료들의 보호를 받으며 다시 정신 차릴 시간을 벌 수 있다.


 날붙이에 몇 번 베이는 정도쯤, 확고한 일격을 위해선 충분히 치를 수 있는 대가였다.





 “커헉!”


 낡은 의자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충격에 여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운다. 뇌진탕에 빠져 멍해진 여인의 시선이 허공을 응시한다.


 여전히 앞은 보이는 상태지만, 사고와 반응이 현격히 느려졌다.


 “아직 안 끝났어.”


 목표를 잃고 흔들리는 창끝을 넘어, 정우의 손이 창대를 움켜쥔다.


 “...”


 상대에게 무기가 잡힌, 위급한 상황임에도 여인은 반응하지 못한다. 그저, 멍하니 정우의 손을 바라볼 뿐이다.


 “..흡!”


 정우가 힘껏 창대를 당기고, 창대를 붙잡은 여인의 몸이 끌려들어 온다. 둘 사이의 거리는 팔을 내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우의 일격이 이어진다. 창대를 잡던 왼손은 그녀의 목을 잡고, 더더욱 가까이 끌어들인다.





 “..크흡!”


 끌려들어 간 여인의 배를 날카로운 나무토막이 꿰뚫는다. 복부를 꿰뚫은 나무토막이 등의 살갗을 뚫고 나온다.


 뛰어난 사냥꾼과 전사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그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할 뿐.


 부서진 의자의 파편이라 한들, 숙련된 자의 손에 들리면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피와 체액이 나무토막을 타고 흘러, 이미 피투성이가 된 정우의 팔을 적신다.





 “..흐으..으으..으윽.”


 이미 절명에 이르는 일격을 가했음에도, 정우는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사냥과 싸움을 거치며, 정우는 한 가지 사실을 몸에 새겼다. 마지막 숨을 다해 내지르는 단말마가 가장 위험한 일격임을.


 복수나 ‘개인적인 일’이나 감정이 섞이지 않고서야, 굳이 빈틈을 노출할 필요는 없다.





 여인의 배에 열 개 가까이 되는 구멍이 뚫리고서야 정우가 목을 붙잡고 있던 목을 풀어놓는다.


 한때 ‘사람이었던 것’이 물이 빠져나간 물 부대처럼 바닥에 쓰러진다. 흘린 피가 고여 생긴 피 웅덩이 위의 시신이 붉게 물든다.


 4번 찌를 무렵엔 비명이 잦아들었고, 7번 찌를 무렵엔 미세한 움찔거림마저 사라졌다.


 “우욱..!”


 “마르카..!”


 여인의 시신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난자당한 복부에선 장기가 흘러내리고, 머리의 혈관이란 혈관은 지나친 고통에 터져버렸다.


 “으으..”


 “도망..도망가야 해...”


 끔찍한 시신의 상태를 목도한, 단 넷밖에 남지 않은 순혈당원들 사이로 공포가 퍼져나간다. 


 프란치셰크를 제외하곤, 이런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그들이 그간 해온 일이라곤 제국 출신의 상인이나 제국에 협력적으로 보이는 자들을 주먹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그들의 사업장에 불을 지른 것이 전부다.


 하나같이 일방적인, ‘자기들은 당할 일이 없다’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들이다.





 “우습군. ‘대의’니 뭐니 하더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나?”


 정우가 남은 한 자루의 권총을 프란치셰크를 향해 조준한다.


 “이런 녀석들이 하는 게 뻔하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데.”


 빈틈을 타 장전을 마친 유나 역시 양손의 권총을 조준한다.


 겁에 질린 순혈당원들이 한층 더 움츠러들어, 오히려 정우와 유나가 그들을 포위한 형세가 되어버렸다.





 “살아날 기회를 주지. 방패를 내리고 항복해라. 나도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싶진 않거든.”


 정우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어투로 항복을 종용한다.


 이런 아수라장을 겪고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그에게, 순혈당원들 모두의 피가 얼어붙는다.


 반면, 유나는 익숙한 광경을 보는 듯 평온하다. 이미 모두 죽인다고 공언한 정우다. 그 사실에 변화는 없다.


 “X발..프란, 항복하자.”


 “이대로 가면 다 죽을 거야.”


 생리적인 공포에 짓눌린 그들의 입에서 반사적인 말이 튀어나온다.


 “항복할 순 없네! 우리가 붙잡혔다간, 모든 순혈당 지부가 고사하고 마네! 수십년간 지켜온 우리 대의가 무너진단 말일세!”


 프란치셰크가 감히 순혈당원 된 자로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들에게 일갈한다.


 자기 삶에, 자신들의 삶에 남은 것이라곤 순혈당뿐이다. 삶의 유일한 가치이자, 유일한 목적이다.


 지금 항복해버린다면, 그동안 살아온 모든 삶이 무의미해진다.





 “네놈들 대의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하나 약속할 수 있는 건,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 거라는 거다. 너희 전부.”


 담담히 사실만을 읊어나가는 사실이 순혈당원들의 등골에 날아가 박힌다.


 그들이 상습적으로 내뱉는 ‘죽인다’, ‘묻어버린다’ 같은 위협보다, 훨씬 더 강하게 공포를 새긴다.


 단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11명이나 되는 동지가 목숨을 잃었다. 말의 ‘무게’가 전혀 다르다.


 “뭐, 주군께서도 너희 전부를 죽이는 건 원치 않으실 테고.”


 정우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과연 그 비웃음이 순혈당원들을 향하는 것인지, ‘주군’인 레흐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주군’ 같은 걸 모시게 된 자신을 향한 비웃음일지도 모른다.


 “체포당하건, 네 손에 죽건 결국 죽는다는 건 똑같지 않나?”


 프란치셰크가 죽음의 공포와 미묘한 결의, 동료들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지난 삶에 대한 집착이 부딫혀 산산이 부서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다시 뭉친다.


 뭉쳐진 그 감정이, 이전의 그와 같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주군의 성정은 너도 잘 알 텐데. 등신같이 물러터져선, 사람한테 해 끼치는 걸 죽어라 싫어하지 않나.”


 뒤섞인 감정이 자아내는 혼돈은 미묘하게나마 정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주변에 듣는 귀가 적다고 한들, 평소의 정우라면 하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어쩌면, 원인은 다르나 레흐를 미워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


 그 말을 들은 유나가 입안을 감도는 씁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삼킨다.


 정우가 어째서 저렇게나 레흐에 거부감을 느끼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그러니 더더욱 저 거부감을 마주 보도록 해줘야 한다.





 “위험한 곳에 잠입까지 하는 근위대원치곤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군.”


 “자의로 맹세를 한 게 아니라서. 그리고, 난 근위대원 같은 게 아냐.”


 정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어찌 보면 긴장감 없어 보이는 듯한 모습과 살육과 유혈의 현장이 괴리감을 연출한다.


 “..뭐..라고?”


 “정확히는 주군의 첩보장이다. 내 선에서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소리다. 근위대를 만날 일 없이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순혈당원들의 눈이 크게 떠진다. 희망과 놀라움이 그들의 눈을 채운다.


 “첩보장씩이나 되는 자가 왜 우릴 직접 찾아온 거지? 그리고, 우릴 굳이 항복시킬 이유가 있나?”


 그러나, 그중에서도 나은 판단력을 갖춘 프란치셰크 만큼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직접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두지.”


 대답을 들은 프란치셰크의 얼굴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투다.


 “믿을 생각이 없다면 믿지 마라. 네 자유니. 두 번째 질문은... 주군께선 너희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길 원하신다. 증오와 미움에 영향받지 않는, 온전히 증거만으로 진행되는 재판을.”





 “..빌어먹을.”


 “끝까지 고상한 척인가. X 같은 공작 놈.”


그토록 증오하던 공작이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음에, 최소한의 명예와 권리를 지켜주려 했음에 순혈당원들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고결한 자의 모습을 볼수록, 그들 자기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광휘 아래의 그림자는, 더더욱 숨을 곳을 찾아들기 마련이다.





 “운이 좋다면 너희 중 하나나 둘 정도는 살 수 있겠지. 여기서 전부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라고 본다만.”


 정우의 비아냥에 웅성거림이 커지고, 그들 사이에 ‘그래도 누군가는 명맥을 이어야 하지 않느냐’, ‘동료 중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견딜 수 없다’ 같은 말이 퍼진다.


 “슬슬 마음을 정했으면 좋겠는데. 이래 봬도 바쁜 몸이라서.”


 “좋다. 항복하겠다. 우리를 공작 놈 앞으로 압송해라. 그 빌어먹을 놈이 자비롭길 빌겠다.”


 프란치셰크가 욕지거리 한숨을 동시에 내뱉곤 들고 있던 검을 내린다.


 “무기를 버려라. 방패까지 포함해서.”





 털썩!


 잠시 망설이던 순혈당원들이었지만, 이내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무장을 해제한다. 수적으로 앞섬에도, 완전히 의지가 꺾였다.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정우가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악의와 경멸, 성취감이 한 덩이 된 미소는 보는 사람이 오한을 느끼게 할 정도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여정이 편안하길.”


 그리고, 약속된 말이 한 번 더 그의 입 밖으로 떨어졌다.





 탕! 탕! 탕!


 “끄흐윽..!”


 “..허억..! 살려..준..다면서..!”


 “아아악! 아아악!”


 연달아 발포된 탄환 3발이 프란치셰크를 제외한 순혈당원들 전부를 꿰뚫는다. 폐부와 심장을 관통당한 둘은 즉사했고, 척추가 찢겨나간 자는 바닥에 엎어져 고통에 신음한다.


 “이 X새끼가! 네놈을 저주한다! 악마도 네놈 소행엔 절규를 내뱉을 거다! 아니, 1만번의 저주도 네놈에겐 부족해! 영혼이 갈가리 찢겨도 모자랄 놈아!”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에 절규하며 프란치셰크가 정우를 향해 달려든다. 지나친 슬픔과 고통에, 눈의 실핏줄이 터져 뺨을 따라 피눈물이 흐른다.


 “조용. 목을 아껴야지. 나중에 많이 써야 할 텐데.”


 그러나, 그의 분노와 절망은 정우의 광기와 잔혹함에 대항하기엔 부족했다.


 분노와 절망은 각오와 의지를 폭발시킬 좋은 ‘연료’일 뿐, 그 자체가 힘을 선사하진 않는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즐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옆으로 비켜서며 프란치셰크의 뒤를 잡은 정우의 주먹이, 후두부를 강타한다.


 프란치셰크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고, 순식간에 의식을 잃는다.





 “이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네가 귀족 가문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아.”


 유나가 한숨을 쉬곤 장비를 갈무리한다.


 “동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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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붉은 손 - 119 (르브셰 공성전 3) 24.06.08 2 0 11쪽
119 붉은 손 - 118 (르브셰 공성전 2) 24.06.04 4 0 12쪽
118 붉은 손 - 117 (르브셰 공성전 1) 24.06.01 5 0 12쪽
117 붉은 손 - 116 (까마귀 무리) 24.05.30 6 0 11쪽
116 붉은 손 - 115 (제국군 군무회의) 24.05.28 6 0 12쪽
115 붉은 손 - 114 (승전보) 24.05.25 7 0 12쪽
114 붉은 손 - 113 (최초의 공화국 7) 24.05.22 5 0 11쪽
113 붉은 손 - 112 (최초의 공화국 6) 24.05.18 7 0 11쪽
112 붉은 손 - 111 (최초의 공화국 5) 24.05.14 7 0 11쪽
111 붉은 손 - 110 (최초의 공화국 4) 24.05.11 8 0 11쪽
110 붉은 손 - 109 (최초의 공화국 3) 24.05.04 7 0 11쪽
109 붉은 손 - 108 (최초의 공화국 2) 24.04.30 9 0 12쪽
108 붉은 손 - 107 (최초의 공화국 1) 24.04.26 9 0 11쪽
107 붉은 손 - 106 (공화파 탄압 5) 24.04.24 8 0 11쪽
106 붉은 손 - 105 (공화파 탄압 4) 24.04.20 8 0 11쪽
105 붉은 손 - 104 (공화파 탄압 3) 24.04.19 9 0 11쪽
104 붉은 손 - 103 (공화파 탄압 2) 24.04.16 12 0 11쪽
103 붉은 손 - 102 (공화파 탄압 1) 24.04.10 12 0 11쪽
102 붉은 손 - 101 (막간의 이야기 4) 24.03.31 13 0 11쪽
101 붉은 손 - 100 (막간의 이야기 3) 24.03.28 11 0 11쪽
100 붉은 손 - 99 (막간의 이야기 2) 24.03.22 13 0 11쪽
99 붉은 손 - 98 (막간의 이야기) 24.03.21 11 0 11쪽
98 붉은 손 - 97 (순혈당 - 6) 24.03.17 10 0 11쪽
» 붉은 손 - 96 (순혈당 - 5) 24.03.12 11 0 11쪽
96 붉은 손 - 95 (순혈당 - 4) 24.03.09 11 0 12쪽
95 붉은 손 - 94 (순혈당 - 3) 24.03.05 11 0 12쪽
94 붉은 손 - 93 (순혈당 - 2) 24.02.27 10 0 11쪽
93 붉은 손 - 92 (순혈당 - 1) 24.02.21 11 0 12쪽
92 붉은 손 - 91 ('흑의백' 나탈리아 - 6) 24.02.16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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